- 캄보디아의 반-베트남 민족주의
앞서 살펴본 에앙 속 토은 스님 암살의혹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캄보디아에서 반-베트남 민족주의 정서는 매우 민감한 사안 중 하나이다. 훈센 정권은 처음부터 친-베트남 위성정권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반-베트남 정서는 캄보디아 집권세력이 가장 경계하는 요소 중 하나이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점령기인 1980년대의 캄보디아에 관해선 사료도 그다지 남아 있지 않으며, 최근의 현대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훈센 정권은 자신들을 앞잡이(=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UFNS])로 내세웠던 베트남의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크메르루주 학살정권의 만행"은 부풀리고, 자신들이 집권했던 1980년대의 기록들은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1980년대 캄보디아에선 도시자급 이상 고위관료들에겐 모두 "베트남인 고문관"이 배치돼, 캄보디아인 지도자들이 "베트남의 고무도장" 역할만 했다는 정도의 사실만 회자될 뿐이다.
하지만 현재의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의 영향력은 정치, 경제, 군사 부문 등 곳곳에서 확인된다. 최대 20여만명에 달했던 캄보디아 내 베트남 점령군은 1980년대 말까지 캄보디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했지만, 그 중 많은 수가 현지에서 전역해 캄보디아 시민으로 남았고, 이후 자신들의 친인척들도 불러와 함께 정착했다. 절반은 자발적인 의사였고, 절반은 대규모 퇴역군인들이 사회불안 세력으로 변할 것을 우려한 하노이 정부의 정책 때문이었다.
미국과의 전쟁 승리 후 베트남 군 이웃국가 파병
베트남 정부가 미국에 승리한 후에도 전시에 동원됐던 대규모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이후 캄보디아, 라오스 전선으로 파병한 것도 실은 유사한 정책적 고려 때문이었다. 전역병들은 크메르어를 배우고 현지화되면서 캄보디아 동부지방에서 농토를 얻어 농민이 되거나, 훈센 정권의 고위급 관료나 군인, 재벌기업인으로 재탄생했지만(☞ 참조기사), 내면에는 베트남인이란 민족정서를 그대로 유지했다(☞ 참조기사). 훈센 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베트남인들의 캄보디아 정착을 묵인하고 지원했다.
비공식적 추산에 따르면, 현재 캄보디아 유권자 중 베트남계 인구의 비율이 최대 40%에 달할 것이란 주장도 존재한다(☞ 참조기사 1, 참조기사 2). 현재 캄보디아 인구는 15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거의 1억명에 육박하는 베트남 인구 중 일부만 캄보디아로 이동해도 캄보디아 사회의 지각변동은 당연한 것이다. 국제사회가 간혹 떤레삽 호수(Tonle Sap) 주변에서 선상생활을 하는 소수 베트남계 주민들에 관심을 보이긴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보이지 않게 급증한 베트남계 "신(新)이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며, 이 문제가 향후 캄보디아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에서 주요한 촉매제가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남방 상좌부 불교 문화권인 캄보디아와 북방 대승불교 문화권인 베트남계 주민들 사이의 갈등은 유서가 깊은 것이다. 캄보디아에 베트남계 인구가 최초로 유입된 것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1863~1953)부터였다. 프랑스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차례로 식민지로 만든 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French Indochina)을 구성했다. 그리고 특히 베트남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자, 캄보디아에도 베트남인들이 하급관리와 고무농장 노동자로 유입됐다.
하지만 이러한 이주현상이 단순히 프랑스의 식민정책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홍강 삼각주(Red River Delta) 유역에서 흥기한 베트남 민족은 11세기 이후 1천년에 걸친 "남띠엔"(Nam tiến: 南進) 정책을 통해 팽창해온 역내의 소-제국주의 국가이며, 캄보디아나 라오스로의 진출은 그 방향만 서쪽으로 바꾼 "따이 띠엔"(tây tiến: 西進)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베트남의 남진정책은 단순히 군사적 진출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자국 인구를 이주시키는 점진적이고도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를 동반한 것이었다.
(지도출처: 위키피디아 영문판) <베트남의 남진(남띠엔) 정책에 따른 베트남 영토의 변천사. 1069~1757년 사이. 각 시기별로 획득된 영토의 색깔이 다르게 표시돼 있고, 회색 부분은 1834년까지 조공국(=제후국)으로 남아 있던 지역이다. 1834년의 시암(태국)-베트남 전쟁 직후에는 오늘날의 캄보디아 영토조차 베트남과 태국이 양분했었다.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과거에 사라진 국가 '참파'(Champa: 오늘날 베트남 중남부)처럼 오늘날 캄보디아라는 국가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도)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의 위치 <오늘날 베트남 남부 곡창지대인 메콩삼각주 지역이다(분홍색). 원래 캄보디아 영토였던 이 지역을 베트남이 잠식해들어간 것은 1700년대부터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오늘날의 국경선이 확정된 것은 1949년 프랑스 식민당국이 이 지역을 베트남에 할양키로 한 결정 때문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이 지역 출신 크메르인들은 캄보디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선도적인 활약을 펼쳤는데, 특히 이 지역의 상실이 오늘날 캄보디아 국민들의 반-베트남 정서 고취에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크메르인 인구를 100여만명 정도로 공식통계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 끄롬 저항운동 단체는 최대 70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의 팽창정책과 크메르 끄롬 출신 승려들
베트남의 팽창정책은 시대와 정권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며 지속적이었다. 프랑스 식민통치기에 인도차이나 공산당(ICP)을 조직한 호찌밍(Ho Chi Minh, 胡志明: 1890~1969) 역시 국제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베트남 민족주의자였다. 호찌밍은 '인도차이나 공산당' 내의 캄보디아 및 라오스 당원들을 통해 두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두려 했다. 심지어 캄보디아 공산당 내부에도 일찍부터 크메르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캄보디아인으로 위장한 베트남인들이 포진할 정도였다.
그에 따라 베트남의 팽창정책에 대한 캄보디아인들의 공포도 만만치 않아서, 친미 크메르공화국 시대(1970~1975)와 극단적 공산주의였던 크메르루주 정권 시대(1975~1979) 모두에서 베트남계 인구의 학살이 발생했다. 특히 크메르루주 정권에서는 "베트남 첩자에 대한 강박관념"이 대량 학살의 주요 동인의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고, 과도한 숙청을 피해 베트남으로 달아났던 동부지역 크메르루주 간부들이 훗날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서 선봉을 맡았는데, 당시 20대였던 훈센도 바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에앙 속 토은 스님의 암살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캄보디아 내 반-베트남 정서에서 특히 민감한 문제는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오늘날의 베트남 남부 메콩 삼각주 곡창지대) 문제이다. 특히 베트남은 소수민족들에 대해 오랜 기간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펼쳐 많은 문제를 유발시켰다. 오늘날 캄보디아의 국적법은 크메르 끄롬인들이 캄보디아로 들어올 경우 자동적으로 국적을 부여토록 돼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박해를 피해 캄보디아로 들어온 크메르 끄롬인들을 당국이 체포해 베트남으로 강제로 송환하는 일도 빈번하며, 정치활동을 한 끄롬 출신 승려들은 캄보디아 승단에서 체탈도첩 당한 후 베트남으로 보내진다(☞ 참조기사).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에앙 속 토은 스님처럼 암살되는 경우도 더러 존재한다.
더구나 식민지 시대에 크메르 끄롬 출신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캄보디아의 근대화와 민족주의 의식 고취를 주도했던 역사가 있는 만큼(참조☞ 손웟탄), 캄보디아 국민들 사이에서 크메르 끄롬 문제는 단순한 영토 문제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현재 캄보디아 불교계에서 반정부 활동을 주도하는 승려들 중에도 크메르 끄롬 출신 스님들이 많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참조기사).
캄보디아에서 반-베트남 정서가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가는 2014년 초에 발생한 한 사건이 잘 말해주고 있다. 교통사고 이후 언쟁에 휘말린 한 베트남계 주민이 단순히 "요운"(yuon: 베트남을 비하하는 크메르어)이란 이유로 주변의 캄보디아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살해당한 청년은 캄보디아에서 나고 자랐고, 그의 아내는 곧 태어날 아기도 임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