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투쟁, 희생에 대하여

편집진 편지 - 윤남진 (편집위원) | 2017. 제11

 저는 한 2년 전쯤부터 그간의 도시 시민사회활동가로서의 삶을 접고 향촌으로 들어가 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마도 올 상반기에는 마음먹은 대로 귀촌을 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향촌으로 들어가 살려고 처음 마음먹었을 때는 그냥 이제까지 활동했던 저의 모습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아야 하겠다는, 그저 변화에 대한 목마름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꾸자꾸 향촌에서의 삶을 생각해 보고, 옛 사람들이 이른바 낙향혹은 귀촌의 삶을 어떻게 꾸려갔는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정약용의 글부터 촌락공동체(코뮌)까지 이것저것 책을 뒤적이다보니, ‘무언가 마음의 중심을 튼튼히 하고 새로운 인생살이에서 내가 풀고자 하는 근원적인 의문 혹은 물음을 갖고 산림으로 가야하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시민사회활동가가 수행하는 여러 일들처럼 목표나 대상이 자못 뚜렷하고,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전략적인 기획으로 삶을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은 하염없는 물음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제가 풀어냈으면 하는 숙제가 떠올랐고, 그것을 물음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자리에서 제 물음을 다른 도반들에게 던져보면서 바른 물음인가에 대해 여러 번 속셈을 해보았습니다. 제 물음은 아직 뚜렷하지는 않지만 정리해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첫째, 정의를 이룩하기 위한 길에서 투쟁은 불가피한가? 만일 그렇다면 그 투쟁은 어떤 경우에,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정당한가?

 둘째, 희생은 불가피한가?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희생이 값어치 있는 것일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신념을 지키기 위해 보편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희생(이럴 경우에는 헌신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겠지만)의 내용과 수준은 어디까지인가?

 셋째,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어떤 종류의 투쟁과 희생까지 감수할 수 있다는 의지와 열정을 영속시킬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원천을 어떻게 생성할 것인가? 하는 등의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정의라는 말은 이런 종류의 다른 무엇 자유, 평등, 우의, 공동체라고 해도 좋습니다. 뭔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 걸쳐 존립과 번영을 위한 바람직한 가치 같은 것 중에서 바탕이 되는 중요한 가치들을 뜻하는 말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투쟁이라는 말은 다툼이라고 해도 될 것이지만, 합의된 규칙에 따라 차별 없는 상태에서 말로 하는 다툼(논쟁 혹은 토의)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좀 더 나가서 사회적 수준에서 투쟁은 생존의 문제를 제외하고 서로 다름, 혹은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이라고 본다면, 그 차이를 대하는 태도나 그것을 다루는 방식의 문제에 관한 것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로 다름 혹은 차이를 차별과 억압 혹은 배제나 분리(격리)로 다룰 때, 거기서 평화로운 상태 혹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갈등과 그로인한 긴장이 조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때, 격렬한 투쟁과 그에 따른 과도한 희생, 혹은 폭력적인 상황의 싹이 트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특히, 개인과 공동체의 미래운명을 좌우할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긴장의 수준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 정도로 높아질 것입니다.

 

 또한 갈등과 긴장의 상황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자연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다반사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갈등과 긴장을 폭발시키지 않고 최대한 견뎌내면서 합의와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생각됩니다. 이에 따라 갈등과 긴장을 견뎌낼 수 있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탄력성 혹은 여유 공간을 어떻게 창출하고, 그것을 어떻게 최대화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창출된 사회적 자원이 만족스럽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 개인과 공동체에 부과된 중요한 숙제로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숙제의 해결 방법 혹은 해결 수준에 따라서 어떤 종류의 투쟁이 사회적 정당성을 갖게 되며, 또한 공동체 구성원의 어떤 희생이 고귀한 것이었다고 평가되는지가 판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특히 불교적 차원에서 본다면 긴장을 감당할 수 있는 개개인의 내적 역량을 기르는 것 즉, 마음을 다루는 것을 훈련하고 성장시키는 것에서 유용하면서도 직접적인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최상의 종교적 심성을 기르는 고유의 수행과 연결이 확보되는 조건 하에서, 건전한 시민으로서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고 풀어가는 역량을 증진한다는 취지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갈등과 긴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사회적 기틀을 만드는 데에도 불교는 충분히 종교적 입장이나 관점을 굳이 에두르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사회적 관계에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 갈등상황은 시민 개개인에게 내면의 긴장을 고조시킵니다. 이런 긴장이 준비되고 훈련된 개인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될 때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것을 풀어갈 의지를 꺾고 개인의 사적인 공간이라는 울타리나 편안해 보이는 동굴 속으로 숨거나 회피하게 됩니다.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기 싫다, 생각하기 싫다는 말이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나 책무를,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수준에서 수행하는 것으로 좁아지게 됩니다. 대체로 사회적 관계라는 것도 가족이나 친지, 동호회나 친목모임 등에 한정하게 되고 이번 촛불집회처럼 특별한 상황이 전개되지 않는 이상 그런 관계 내에서는 사회적 갈등과 긴장의 의제에 대한 논의도 회피하게 됩니다.

 

 이른바 세상살이, 사회적 관계를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인간 더 넓히자면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중생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힘들고 고통이 항상 동반됩니다. 더욱이 인간은 그 고통을 고통이라고 알고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첫 번째 토론을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첫 토론의 마당인 자기 마음속에서 회피와 체념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어떤 갈등과 긴장 즉, 고통을 붙들고 대화하는 역량을 갖춘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에서 마주치는 유사한 갈등과 긴장에 대해서도 인내심과 용기를 가지고 다룰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즉 개인의 마음속의 토론과 사회적 토론이 서로 결합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상호 촉진되는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즉 자신의 마음속을 잘 다루는 사람이 훌륭한 시민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고되고 험난한 투쟁,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은 매우 줄어들 것입니다. 그 대신 평화로움과 우의, 상호지지와 지원, 협동의 공동체적 삶에서 오는 즐거움과 행복은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평화와 행복의 상황이 영속적인 상태 즉 궁극적 해탈에 이르도록 향상시켜 나가는 것은 불교라는 종교 고유한 몫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사찰이나 모든 불교 결사체의 모임(법회)가 불자들을 어엿한 시민으로 훈련시키는 탁마의 장 즉, ‘시민학교혹은 시민보살 육성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과거 불교시민사회 영역의 주된 개념이었던 여러 가지들 민중불교, 민족불교, 참여불교 등등이 내내 가지고 있던 왠지 모를 허전함 즉, 개인의 깨달음과 그것의 사회적 전개의 상호관계에 대한 통일성, 개인의 마음을 조련하는 것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와 성숙을 도모하는 것의 분리될 수 없는 상호성 등에 대해 현실 실천 속에서의 온전한 결합을 지향해온 지난 역사적 실천들을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즉 불자 개개인의 실제적인 삶의 현장, 실제적인 종교행위의 현장,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 살아 움직이는 불교, 생동하는 불교시민사회활동의 장이 개척되기 위해서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나마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불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 불자마다 서로 다른 불교가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 불교들 중에서 불교시민사회가 지향하는 혹은 불교시민사회로 수렴될 수 있는 불교는 어떤 불교이며,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향상의 동력을 만들어 가며, 개인과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켜가는 것인가?

 앞서 열거한 세 가지 질문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때, 이와 같은 질문으로 바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많은 불교시민사회활동가 그리고 그들의 단체에 소속되어 있거나 그들의 의견이나 활동에 대해 마음으로 지지하는 많은 시민보살들에게 법정스님이 번역한 <법구경>의 한 구절로 위로를 드리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얼굴이 두터워 수치를 모르고

뻔뻔스럽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마음이 때 묻은 사람에게

인생은 살아가기 쉽다.

 

수치를 알고 항상 깨끗함을 생각하고

집착을 떠나 조심성이 많고

진리를 보고 조촐히 지내는 사람에게

인생은 살아가기 힘들다’ (법구경 244, 245) 

윤남진 (편집위원)
1993년 첫 사회생활을 불교시민사회단체에서 시작한 이래 이쪽 바닥을 벗어나본 적 없이 20여년을 보냈습니다.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하여 공부하며 책 쓰며 은거하고자 준비하던 중, 이제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으로 신대승의 창립에 함께 했습니다.
현직 : NGO리서치 소장, 불교사회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조계종 신도교재편찬위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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