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살펴보았듯이, 캄보디아에는 소장파를 중심으로 강력한 현실참여 의식을 가진 일군의 조직화된 승려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캄보디아 불교계 전체로 보면 이러한 움직임은 비주류에 속한다.
캄보디아 역시 태국과 동일하게 "국가-종교(=불교)-국왕"을 국가 구호로 내세우고 있고(캄보디아 헌법 제4조), 양대 종단 내부의 결정을 우선시한다는 형식적 조건을 두긴 하지만, 세속 정부가 '종교부'(Ministry of Cults and Religions)를 통해 승단과 사찰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태국의 경우 일원화된 승왕(쌍까랏)을 의장으로 하는 '승가 최고위원회'(Sangha Supreme Council: SSC)와 '태국 불교청'(Thai National Office for Buddhism: NOB)을 통해 승려와 사찰을 관리하는데, 크게 보면 양국의 불교가 결국 일원화된 국가적 관리체제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불교의 국가적 관리체계뿐만 아니라 종교적 양상 면에서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양국의 불교 모두 토착종교의 정령신앙이나 주술적 요소들을 포용하고 있고, 상좌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번성했던 대승불교(특히 밀교)와 힌두교의 전통 역시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특히 힌두교의 '신왕'(deva-rāja, 神王) 사상은 동아시아의 '성군'(聖君) 사상만큼이나 동남아시아 군주들에겐 최고의 정치적 이상이었다.
불교는 국민들의 기초교육을 전담하면서 국가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해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 역시 그러한 문화를 암묵적으로 수용하면서 '법왕'(dhamma-raja, 法王)이나 '전륜성왕'(chakravartin, 轉輪聖王) 같은 이념을 내세우기도 했다. 또한 양국 불교는 화교들을 통해 유입된 중국의 종교문화(도교, 포대화상 등)까지 융합시켰다. 이러한 공통점은 비단 불교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용이나 음악 같은 전통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유타야는 크메르 제국의 도성 앙코르(Angkor)를 철저히 파괴하고 수만명에 달하는 승려, 학자, 장인, 무용수, 예술가, 무술인 등을 포로로 잡아가, 자국의 문화는 강화하면서 크메르 제국의 국가적 존립기반은 완벽히 붕괴시켰다. 하지만 아유타야 왕국 역시 16~18세기 사이에 서쪽의 버마 왕국들과 여러 차례 오랜 전쟁을 치뤄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적 기반을 상실했다.
이후 태국에서 안정된 왕조가 출현하면서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했고, 조공국이 된 캄보디아 왕실은 태국 왕실로부터 여러 가지 전통문화를 역수입해 자국 문화를 복원시켰다. 프랑스 식민지 이전의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의 공동 조공국이었고, 왕자는 태국 왕실에서 볼모 생활을 하면서 성장했다. 오늘날 고전무용이나 전통 킥복싱 등 일부 분야에서 양국이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는 현상은 이러한 문화사적 복잡성에서 기인한다.
여타 전통문화와 마찬가지로, 대륙부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남방상좌부 문화권 국가 4개국 중에서도, 태국과 캄보디아의 불교는 특별히 더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양국 불교 사이에 약간의 차이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발견되는 소소한 지엽적 차이와, 과거 프랑스 식민당국이 캄보디아에 실시했던 종교정책의 잔재 정도 뿐이다.
라오스 불교 역시 태국, 캄보디아 불교와 매우 유사하지만, 1975년 공산화된 이후 라오스 불교는 공산당의 하부조직이자 국가적 선전선동의 도구로 사용됐기 때문에, 양국 상황과 직접적인 비교대상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라오스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당국이 진행했던 "탈-태국화 상좌부불교"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의 태국 불교 단절 정책
당시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불교를 태국 불교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해 승려들의 현대적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캄보디아 프놈펜에는 빨리어 학교 '에꼴 드 빨리'(Ecole de Pali: 설립-1914년)와 '불교학 연구소'(Buddhist Institute: 설립-1921년)가 설립됐고, 라오스의 '불교학 연구소'도 1931년에 설립됐다.
그리고 이곳을 거친 승려들을 총독부가 위치한 베트남 하노이의 '프랑스 극동학원'(遠東博古院, EFEO: 설립-1900년)에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프랑스의 정책은 사실상 실패에 가까왔다. 고등교육을 받은 승려들이 도리어 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의 인적 토대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EFEO는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1957년에 파리로 옮겨갔다.
태국과 캄보디아 불교는 주요 종단의 구성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하니까야 종단'(Maha Nikāya, 大派: 태국어-'마하니까이', 크메르어-'머하니꺼이')과 '담마유띠까 종단'(Dhammayuttika Nikāya, 法集派: 태국어-'탐마윳', 크메르어-'텀마윳')은 양국에서 공통적으로 양대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한자명은 필자의 첨가). 라오스 불교도 1975년 단일 종단으로 통합됐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이들 양대 종단이 병존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태국의 경우에는 신흥종단인 '왓 프라 탐마까이'(Wat Phra Dhammakaya, 法身派: 담마까야)와 군소 대승불교 종단 등이 추가로 존재하지만, 양대 종단이라는 구분 면에서 태국과 캄보디아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최대 불교국가이자 동남아 상좌부불교의 맏형에 해당하는 미얀마에는 이들 두 종단과 다른 별개의 종단들이 존재한다.
양대 종단 중 소수파인 '담마유띠까 종단'은 1833년 태국에서 개창됐다. 개창자는 훗날 라마 4세(Rama IV: [재위] 1851~1868) 국왕으로 즉위하는 몽꿋(Mongkut: 1804~1868) 왕자였다. 몽꿋 왕자는 왕위에 오르기 전 27년간 승려생활을 했고, 당시 태국 불교가 처한 법맥 계승의 불완전성과 계율 및 수행법의 불일치에 불만족하여 불교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상좌부불교를 일찍 전수받아 보다 엄격한 수행전통을 갖고 있던 태국 내 거주 몬족(Mon people: 버마 및 태국에 거주) 불교계에서 법맥을 이어받고 '담마유띠까 종단'(탐마윳 니까이)을 창종했다. '담마유띠까 종단'은 그 수는 적지만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보다 엄격한 수행을 하는 종단"이란 대중적 인식을 갖고 있다. 반면 승려나 사찰의 수 면에서 거의 압도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는 '마하니까야 종단'은 특별한 교리적 특색을 보여주지 않으며, "담마유띠까 종단을 제외한 모든 승려들과 사찰들"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개창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담마유띠까 종단'은 일정 부분 왕실 친화적 성격을 갖고 있다. 캄보디아의 경우 그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캄보디아의 '담마유띠까 종단'(텀마윳 니꺼이)을 도입한 사람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1863~1953)에도 왕위를 유지했던 노로돔(Norodom: 1834~1904, [재위] 1860~1904) 국왕이었다.
노로돔 국왕은 1855년 당시 태국의 몽꿋 국왕의 종단에서 수행하고 있던 크메르인(=캄보디아인) 승려 쁘레아 소꼰 빤(Preah Saukonn Pan 혹은 Maha Pan) 스님을 초청 "담마유띠까 종단의 승왕"으로 임명해 양대 종단 승왕의 병존시대를 열었다. 당시 캄보디아 '마하니까야 종단'의 승왕은 "크메르어의 아버지"로 불리는 쭈언 낫(Chuon Nath: 1883~1969) 스님이었다. 캄보디아의 '담마유띠까 종단'은 왕실의 후원에서 이익도 보았지만, 태국 왕실과의 유착 의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내전과 캄보디아 불교의 붕괴
크메르루주 정권 시대(1975~1979) 및 이어진 베트남 점령기(1979~1991)의 새로운 내전상황은 캄보디아 불교를 체계적으로 붕괴시켰다. 적법한 소양을 갖춘 승려들은 생존자의 수도 적었지만, 그나마도 거의 대부분 해외에 망명 중이었다. 그러나 국내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친-베트남 훈센 정권은 1981년부터 독자적인 통합 승왕을 임명해두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 "대승왕"의 지위를 갖고 있는 뗍봉(Tep Vong, 텝봉, 뗍붱, 뗍웡: 1932년생) 승려이다.
하지만 1991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유엔평화유지군 시대가 시작되자, 해외 각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정치지도자들과 인재들이 귀국하기 시작했다. 각 정파들의 합의 속에 왕실도 새롭게 복원됐다.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도 1991년 전국민의 대대적 환영 속에 귀국했고, 끊어졌던 '담마유띠까 종단'의 승왕도 새롭게 임명했다. 담마유띠까 승왕으로 추대된 보우 끄리(Bour Kry: 1945년생)스님은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포교활동과 난민지원 사업을 했던 인물이다.
뗍봉 대승왕 : 캄보디아 종교권력의 정점
캄보디아 불교계에서 제도화된 모든 권력의 정점에는 뗍봉 대승왕이 있다. 그는 1981~1991년 사이에 통합종단 승왕이었지만, 보우 끄리 승왕이 '담마유띠까 종단'을 이끌면서부터 '마하니까이 종단'의 승왕으로 지위가 재조정됐다. 하지만 훈센 세력이 왕당파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제압하고 시하누크 국왕이 퇴위를 한 이후인 2006년, 훈센 총리는 뗍봉 승왕을 "대승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마하니까이 종단' 승왕 자리는 논 응웻(Non Nget) 승려가 이어받았다. 뗍봉 대승왕은 주요한 국가행사들에서 여전히 보우 끄리 담마유띠까 종단 승왕과 나란히 의전을 받곤 하지만, "대승왕"이란 칭호를 보유하게 됨으로써 명목상으로는 5만3천여명에 달하는 캄보디아 승가의 최고 권위자로 올라선 것이다.
(사진출처: AP Photo/Heng Sinith) <2016년 5월 20일, 3년 동안 도난당했던 성보를 원래의 산상 사찰에 다시 봉안하는 행사에서 양대 종단 승왕들이 함께 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좌측이 '머하니꺼이 종단'의 뗍봉 대승왕이고, 우측이 '텀마윳 종단'의 보우 끄리 승왕이다. (☞ 참조 기사)>
뗍봉 승왕이 제도권 캄보디아 불교계에서 갖고 있는 형식적 권위와는 달리, 현실참여적 승려들과 국내의 시민사회, 그리고 해외에 거주하는 크메르인 교포들의 평가는 싸늘한 편이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1970년대 내전 및 베트남전쟁 상황에서 많은 난민들을 배출했기 때문에, 현재도 미국, 유럽, 호주 등지에 대규모 교민사회가 형성돼 있다.
2013년 11월 29일 미국 플로리다 주, 잭슨빌(Jacksonville)에서는 캄보디아계 미국인들이 모여서 뗍봉 승왕의 이 지역 사찰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교민들이 주장한 반대 이유는 "승왕이 인권유린을 행한 인물이므로 성스러운 행사를 집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위성정권 시대의 일을 제외하더라도, 뗍봉 승왕이 최근에 저질렀다고 비난받는 "인권유린 행위"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자주 거론되곤 한다.
- 2007년 6월 30일 당시 따께우(Takeo) 도에 위치한 '북-프놈덴 사원'(North Phnom-Denh temple)의 주지였던 띰 사콘(Tim Sakhorn) 스님에게 그릇된 혐의를 뒤집어 씌워 그의 체포를 명령하고, 이후 띰 사콘 스님을 베트남으로 강제송환시키도록 협조함으로써 불교의 계율 및 서원을 어긴 점. 당시 띰 사콘 스님은 베트남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크메르 끄롬 난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베트남은 이를 자국의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베트남의 요청이 있자, 뗍봉은 띰 사콘 스님을 체탈도첩(=강제환속)시킨 후, 그의 신병을 베트남에 인계토록 했다. 이후 띰 사콘 스님은 베트남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고, 반복적인 고문을 당하면서 적절한 생필품도 지급받지 못하다, 22개월간 수감생활 후 해외로 도피했다.
- 2007년 2월 20일 발생한 에앙 속 토은 스님의 살해사건에 사실상 공모하여, 캄보디아 내 모든 사찰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일을 금지시킨 행위.
- 1997년에 발생한 스님 27명의 살해사건 및 그 이후 캄보디아 전역에서 발생한 승려들의 살인, 행방불명, 구타 사건들에 대처하지 않은 점. (☞ 참조기사)
훈센정권의 인권운동 승려 탄압에 협조한 뗍봉 승왕
뗍봉 승왕의 이러한 정치적 행적은 최근까지도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 근년의 대표적인 사건은 앞서도 언급한 "멀티미디어 승려" 루온 소봣 스님에게 가해진 일들이다. 루온 소봣 스님이 철거민들의 투쟁에 활발히 동참하자, 뗍봉은 전국의 사찰에 루온 소봣 스님의 사찰출입 금지령, 모든 스님들에게 루온 소봣 스님과의 접촉금지령, 루온 소왓 스님의 재적사찰 퇴거령을 차례차례 내려서, 훈센 정권의 인권운동 탄압에 협조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명령들은 그의 뒤를 이어 '마하니까야 종단' 승왕을 맡고 있는 논 응웻 승왕의 명령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뗍봉 대승왕의 뜻이라고 봐야만 할 것이다. 한편 <프놈펜 포스트>(The Phnom Penh Post)는 지난 2013년 총선을 앞두고 공개한 심층기사를 통해, 뗍봉 승왕과 캄보디아 승단이 "여당 친화적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면서 승려들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통제하는 모습을 구조적으로 보여줬다 .
뗍봉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가 단순한 친여 보수 인사라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자신이 "훈센 체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의 캄보디아에 관한 사료는 매우 제한적이긴 하지만, 당시 뗍봉의 행적에 관한 중요한 보고들은 존재한다.
이안 해리스(Ian Harris)는 2001년에 발표한 논문 <캄보디아의 승단 조직>(Sangha Groupings in Cambodia)에서, 1979년 9월 베트남인 승려가 집전한 수계식에서 새롭게 법맥을 이어받은 "7인의 고위 승려 중 뗍봉이 최연소자"였다고 기록했다(p.93). 해리스는 또한 젊은 승려들이 당시 수계를 받은 승려 7인을 "캄보디아식 가사를 걸친 베트남인 승려들"로 표현하며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고 적었다(p.94).
뗍봉은 당시 통합승단의 승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국가위원회) 부의장과 기층 사회조직 '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UFNS) 부의장을 겸하는 정치인이자 고위관료이기도 했다(Harris 2001 p.94 및 미국 의회 도서관 발행 : 국가연구 - 캄보디아편 참조). 한편, 미국 외교관 출신 동남아 연구자 마이클 벤지(Michael Benge)는 2013년의 기고문에서, "뗍봉이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베트남계 크메르루주 세력'(일명: 동부구역)을 위한 정보 및 종교 담당 작전장교였다"고 적었다. 마이클 벤지는 외교관 출신이기도 하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포로 출신으로, 베트남어는 물론이고 여러 소수민족의 방언들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그의 발언은 무게감을 지닌다.
결론적으로 뗍봉은 단순한 친여 보수 승려가 아니라, 캄보디아 불교 승단을 제도적으로 통제하면서 훈센의 독재체제와 명운을 같이하고 있고, 그 자신이 곧 캄보디아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대는 '도둑정치' 시스템의 일부라고 봐야만 할 것이다.
(사진: VNA/VNS Photo, Nguyen Khang) 2014년 12월, 베트남의 쯔엉 떤 상 국가주석이 캄보디아 국빈방문 중에 뗍봉 승왕을 예방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베트남의 최고위 3대 요인들은 캄보디아를 방문할 때마다 불교 승왕을 예방하는 관행을 유지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양대 종단 승왕들을 각각 예방하지만, 특히 뗍봉 대승왕과의 만남이 더욱 반가울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뗍봉 승왕과 한국 불교
뗍봉 승왕은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97년(국왕특사 자격), 1998년(제등행렬), 2010년, 2015년(세계 간화선 무차대회 및 제등행렬), 2016년(민영교도소 건설 지원) 등 확인된 것만도 최소 다섯 차례에 달한다. 이 중 "한국 내 민영교도소 설립 지원"이라는모호한 방문목적을 내건 가장 최근의 방한을 제외하면, 나머지 방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과 관련된 것이다.
(사진출처:불교신문) <간화선무차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텝봉 승왕>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뗍봉은 인권유린 및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태도 때문에, 심지어 자신의 동포들로부터도 반대시위에 봉착하곤 하는 논란의 인물이다. 한국 불교계가 그런 인물을 마치 대단한 성자라도 되는 냥 극진히 대접하는 일은 그냥 웃고만 넘기기엔 그 정도가 지나친 것이다.
이러한 일은 한국 불교계가 국제 정세에 대해 무지하거나, 아니면 진실을 외면하는데서 발생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수많은 캄보디아 국민들에 대한 모욕이란 점을 깊이 인식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