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살사건 현장을 지키는 스님들
2016년 7월 10일 오전, 캄보디아의 저명 정치평론가 껨 레이(Kem Ley) 박사가 프놈펜의 한 주유소 내 편의점에서 차를 마시던 중, 괴한의 총격을 받고 백주대낮에 암살당했다. 껨 레이 박사는 야당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아 종종 정체성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던 인물이지만, 근 30년간 집권 중인 훈센(Hun Sen: 1952년생) 총리의 정부에 지속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에, 캄보디아 사회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가 훈센 정권일 것이란 믿음이 즉각적이고도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당국은 신원미상의 남성 1명을 현장에서 체포했고 "2천 달러를 꿔줬는데 받지 못해 살해했다"는 자백도 받았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국민들은 거의 없었다.
껨 레이 암살과 훈센정권 배후설
특히 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국제적인 부패감시단체 '글로벌 위트니스'(Global Witness: 지구의 증인)가 새로운 보고서(2016-7-7)를 발표해, "훈센 총리 일가와 친인척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최소 114개의 기업들에 지분을 갖고 있는 등 캄보디아 경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폭로하여 충격을 주었고, 훈센의 아들 딸들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위협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껨 레이 씨가 국제 언론과 회견 중 '글로벌 위트니스' 보고서를 인용하고 논평한 사실이 알려지자, "훈센 정권 배후설"은 더욱 무게를 얻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노조 지도자, 환경운동가, 탐사보도 언론인 등을 총격 살해한 지속적인 정치적 살인의 역사를 갖고 있다.
껨 레이 씨가 암살당한 현장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의 분노가 넘쳐났다. 그리고 일군의 스님들도 현장을 지켰다. 스님들은 껨 레이 박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찰의 시신탈취 시도를 저지한 후, 프놈펜 인근의 한 사찰로 운구했다. 운구행렬은 분노한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금새 시위행렬로 변했고, 그 선두에는 오렌지색 가사의 스님들이 앞장섰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당국과 장례위원회 사이의 발인 일정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결국 사망 2주일만인 7월24일, 껨 레이 박사의 시신은 프놈펜에서 50km 정도 떨어진 고향 따께우(Takeo)로 운구돼 모친의 집 뒷뜰에 안장됐다. 10시간이 걸린 운구행렬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차량과 오토바이를 이용해 뒤를 따랐고, 최대 길이가 10km에 달하는 거대한 사람의 바다를 이뤘다.
(동영상: VOD) 2016년 7월 24일, 껨 레이 박사의 상여가 스님들을 앞세우고 고향으로 출발하자, 프놈펜 시민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일년 동안의 정국교착은 결국 여야의 정치적 타협으로 귀결됐다. 이후 여야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지만 밀월기간은 짧았다. 훈센 정권은 서서히 본색을 다시 드러냈고, 삼 랑시 총재는 공문서 위조 등 날조된 혐의로 사법처리에 직면하자 생애 3번째 망명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껨 소카 부총재 역시 훈센 정권이 "불륜 스캔들" 공세를 펴면서, 법원의 강제구인을 피해 몇 달째 중앙당사 내에만 머물고 있다. 또한 2017년 지방선거 및 2018년 총선을 앞두고 최근 들어 인권운동가들의 체포 구금이 잦아졌고, 여론조작을 위한 공세도 가속화되고 있다.
껨 레이 박사 암살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고, '글로벌 위트니스'의 보고서 발표와 맞물리면서, 캄보디아 국민들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던 분노와 민주화 열망이 다시 한번 분출되는 계기가 됐다.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와 비교할 때, 캄보디아의 민주화 투쟁 전선은 비교적 선명하고 통일된 구도를 갖고 있다.
훈센의 발목을 잡은 세대변화와 정보통신기술
훈센을 정점으로 하는 현 집권세력은 1980년 "크메르루주 학살정권 퇴출"을 명분으로 내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및 점령기(1979.12~1991.10)에 탄생한 베트남의 위성정권(캄푸치아 민주공화국: PRK)으로 출발했다.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을 가졌던 '크메르루주'(Khmer Rouge: 집권-1975.4.7~1979.1.7, 최종 항복-1999년) 정권과는 달리, 친-베트남 성향의 훈센 정권은 외세의존 세력이긴 했지만, 하나의 공산정권이란 점에서는 '크메르루주'와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체제이념조차 정립하지 않은 채, 오로지 "크메르루주 학살정권으로부터의 해방자"란 주장만 펼치며, 지난 30여년간 오로지 사익만을 추구하는 파렴치한 '도둑정치'(kleptocracy)를 펼쳐왔다.
그러나 인구학적 변화와 정보통신기술의 보급이 훈센의 발목을 잡았다. 2009년에 캄보디아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인구는 2%에 불과했지만, 이후 급속도로 통신망이 확충되고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환경이 조성됐다. 대규모 청년층 인구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고, 정권교체의 열망이 통합야당 CNRP로 응집됐다. 내전 경험이 없는 청년층이 여론을 주도하면서, 훈센 정권이 지난 30년간 사용해온 "크메르루주 학살정권의 공포" 선전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상황이 도래했다. 이제 제대로 된 선거 민주주의만 작동한다면, 캄보디아는 언제든 정권교체가 가능한 상태에 도달했다.
그렇지만 수십 년 간 권력을 누리던 기득권 세력이 쉽사리 포기할 리 만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훈센은 더욱 강도 높은 위협과 더욱 교묘해진 회유책을 제시하며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암살사건과 장례정국을 전후로 민심의 동향이 심상치 않자, 훈센 정권은 기갑부대의 수도권 배치라는 "대국민 무력시위"로 화답했다. (사진 출처: Buddhism for Peace Organization) <2016년 6월, '불교평화기구' 소속 스님들이 공장 건설로 강제철거 위기에 놓인 오지 마을 주민들을 위해, 생필품 보급 활동을 벌이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환경운동과 철거민 운동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주요한 반정부 운동 중 하나이다. 부패한 집권층과 연줄이 있는 난개발 사업들은 "법률적 소유권" 의식이 희박한 전통적 생활양식의 공동체를 하루 아침에 살던 곳에서 내쫒곤 한다.>
인권운동 승려들에 대한 탄압
껨 레이 박사의 장례식이 끝난 지 며칠 후, 붓 분뗀(But Buntenh) 스님을 비롯한 장례위원 몇 명이 암살위협 속에 이웃국가로 피신했다. 붓 분뗀 스님은 민주진영 승려 단체인 '사회정의를 위한 독립 승가 네트워크'(IMNSJ)의 창설자이고, '불교평화기구'(Buddhism for Peace Organization)의 소장을 맡아 캄보디아의 인권운동 및 환경운동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해외로 피신한 장례위원 중 특히 붓 분뗀 스님에게는 군 장성이 직접 전화를 걸어 "살해 협박"을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붓 분뗀 스님에 앞서 불교계에서 인권운동으로 유명한 인물로는 루온 소봣(Luon Sovath) 스님이 있다. 루온 소봣 스님은 2010년대 초반에 각종 IT기기로 무장한 채 철거민 시위현장 등 각종 정치사회적 현장을 함께 하면서 기록을 남겨 "멀티미디어 승려"(multimedia monk)란 별명을 갖고 있고, "인권운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마틴 엔널스 인권수호자상>(Martin Ennals Award for Human Rights Defenders: MEA)을 수상하기도 했다. 루온 소봣 스님 역시 "선동죄" 혐의로 지속적인 사법처리 위협을 받는 한편, 직접적인 신변위협 때문에 해외로 일시 피신하기도 했다.
캄보디아에서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운동을 벌이던 승려에 대한 암살협박은 드물지 않은 일이며, 실제로 암살이 자행되기도 한다. 루온 소봣 스님의 스승이자 주요 사찰 주지였던 삼 분토은(Sam Bunthoeun) 스님은 캄보디아 위빠사나 명상의 저명 지도자인 동시에 열렬한 인권운동가였다. 그는 2003년 2월 승왕이 내린 "승려들의 투표금지령"에 반발한 후, 47세의 나이에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이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았지만, 삼 분토은 스님의 시신은 방부처리 후 지금도 보존 전시되고 있고, 그의 죽음은 세상물정 모르고 불화만 그리던 루온 소봣 스님을 인권운동가로 거듭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2007년 2월 20일에 발생한 에앙 속 토은(Eang Sok Thoeun: 1975~2007) 스님의 암살의혹 사건도 이러한 흐름의 정점에 있는 사건이다. 에앙 속 토은 스님은 오늘날 베트남 남부지방인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Khmer Kampuchea Krom) 출신 승려들의 지도급 인사로서, 당시 베트남 남부에서 자행된 인권운동 승려들의 체탈도첩(강제환속) 결정을 항의하기 위해, 살해당하기 전날 프놈펜의 '주캄보디아 베트남 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주도했었다. 그의 목에는 날카로운 흉기에 의한 자상 흔적이 역력했지만, 캄보디아 당국은 자살사건으로 매듭지었다.
굴곡진 캄보디아 현대사와 승려들의 현실참여
현실에 참여하는 승려들이 캄보디아 불교 전체로 보면 결코 주류가 아니지만,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내전 및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사회에서 양심적인 승려들의 현실참여는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하지만 구시대 봉건문화의 상징적 아이콘 시하누크가 직전까지 자신의 적이었던 '크메르루주'와 동맹을 맺고, 중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반군 참여를 독려하자, 론 놀 정권의 부정부패에 신물난 농민들이 대거 공산반군에 합류하면서 캄보디아 내전은 본격적인 전면전의 양상으로 확대됐다. 훈센 총리도 당시 시하누크 국왕의 연설방송을 듣고 크메르루주 반군에 합류했던 농민 소년병 중 한 명이었다.
이후 크메르루주 정권 시기(1975~1979, 최종항복-1999), 베트남의 침략 및 위성정권 시기(훈센 정권: 1979~1991), 파리평화협정(1991), 유엔 평화유지군 시대(1992~1993), 그리고 현재의 캄보디아 왕국(입헌군주국, 1993년 출범)으로 이어진 캄보디아 현대사는 최소 4개의 정치세력이 각자의 군사력을 보유한 채 이합집산하면서, 내전 당사자들 및 그들을 지원하던 외세들까지 지칠대로 지쳐서야 평화체제로 이행한 지난한 과정이었다.
승려들 역시 캄보디아의 굴곡진 역사를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에 대응해야만 했다. 크메르루주 정권(1975~1979) 치하에서는 전통문화의 광범위한 말살과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승려들도 해외로 도피해야만 했다. 예비승려를 포함하여 6만~8만명에 달하던 승려들의 수는 크메르루주 정권기를 거치면서 3천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생존자는 대부분 해외 망명자들이었고, 국내에는 살아 있는 승려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1980년대 베트남 점령기에는 태국 국경지대의 난민촌들이 각종 반군 세력의 군사적 거점 역할도 겸했다. 살아남은 승려들 중 일부는 이러한 난민촌들에서 구호활동과 종교활동을 통해 동포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내전의 말기에 주요 승려들이 "평화 운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참여불교 운동가는 마하 고사난다(Maha Ghosananda: 1929~2007) 스님이었다. "캄보디아의 간디"로 불리기도 한 그는 1988년 해외 망명 승려들로부터 '승왕'(Sangharaja, 썽까리엇)에 추대됐고, 유엔 평화유지군 시대인 1992년에는 평화를 위한 국토행진에도 나섰다. "텀마 위어뜨라"(Dhamma-yatra, 진리의 순례)라 불린 이 행진은 여전히 국경지대 반군세력으로 잔존하던 크메르루주 세력 점령지까지도 이어졌고, 많은 승려들과 일반 국민들의 참여도 이끌어냈다. 하지만 당시 국내를 실효적으로 지배하던 훈센의 친-베트남 정권은 독자적인 승왕을 이미 임명해둔 상태였고, 고사난다 스님은 평화체제 정착 후 남은 여생을 미국에서 마쳐야만 했다.
1993년, 역사적인 첫번째 총선을 거쳐 현재의 입헌군주국 '캄보디아 왕국'(RGC)이 탄생했지만, 1980년대부터 국내를 장악하고 있던 훈센 세력은 최초 선거결과에 불복하면서 연립정권에 참여했고, 결국 1997년의 유혈 쿠테타를 통해 독자적인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대와 21세기의 캄보디아 참여불교 운동은 주로 권력형 부정부패 반대, 반-베트남 민족주의, 환경보호 및 철거민 문제에 집중돼왔다. 그리고 2013년 총선을 앞두고 통합야당 '캄보디아 구국당'(CNRP)이 탄생하자, 불교계의 정치적 참여도 통합야당과의 공조를 통해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