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개방 이후 시작된 불교도의 반무슬림 폭동
2012년 라카인 폭동 중에 불타고 있는 로힝자 무슬림 가옥 (출처: Thi Ha/facebook)
지난 10 년간 가장 주목할 만한 아시아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2010년 미얀마의 개혁과 개방과 함께 지난해 총선에서 승리한 야당 진영의 민간정권 창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막 출발한 미얀마 정치와 경제개혁의 여정은 전 세계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미얀마가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의 길에 들어설 것이라는 국제사회의 강한 기대와 함께 서구와 아시아 산업국의 투자가 물밀 듯이 미얀마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개방이후 군부 출신인 뗀 세인(Thein Sein)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 서부 라카인 주에 거주하는 로힝자 무슬림을 대상으로 발생한 불교도의 폭동 이후 불교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 반무슬림 운동, 반무슬림 법 제정에 대해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민간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미얀마의 민주화는 쉽게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
2012년 서부 라카인 (Rakhine, 또는 Arakan이라고도 불림)주에서 불교도에 의한 반무슬림 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은 10월까지 이어졌고, 다음해인 2013년 3월 미얀마 북부 메이크틸라(Meiktila)에서 다시 점화되었다. 그리고 2014년, 만달레이에서 불교도와 무슬림간의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2016년에도 이슬람 사원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라카인 주와 메이크틸라 폭동의 발단이 된 것은 무슬림에 의한 불교도 여성의 폭행과 살해사건이었다. 두 폭동으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미얀마 정부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가옥 4천 여 채가 불탔으며 불교도와 무슬림 양측에서 사망한 숫자만 200명이 넘었다(일부 외신은 사망자 수만 600 여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폭동이 불러온 가장 우려할만한 문제는, 폭동이후 악화된 로힝자 무슬림의 처지였다. 미얀마에는 전체 인구의 약 4%, 즉 150만 여명이 무슬림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서부 해안지역인 라카인 주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로힝자 무슬림이다. 로힝자 무슬림은 소수민족으로 분류되지 않고, 방글라데시에서 이주해온 벵갈인(Bengalis)으로서 취급을 받아왔다. 미얀마는 다민족 국가로 다양한 소수민족이 존재하며, 정부는 다수인 버마족을 비롯하여 135개 민족만을 인정해왔다. 소수민족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건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보장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로힝자 무슬림은 정부가 인정하는 135개 민족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 이동할 자유 등을 보장받지 못했다. 게다가 로힝자 남성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정부가 요구하는 노동을 강요당해왔다.
난민촌에서 부족한 식사량으로 끼니)를 때우는 로힝자 난민(출처: Jpaing/Irrawaddy
폭동 이후, 라카인 주의 주도 시퉤(Sittwe)에 거주하던 14만 여명의 로힝자 무슬림이 경찰에 의해 강제로 난민캠프로 보내졌다. 난민캠프에 강제로 보내졌지만 난민촌 밖에서 맞닥뜨릴지도 모를 라카인 불교도에 의한 폭력이 두려워 난민촌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식량부족에 따른 영양결핍, 열악한 시설과 환경에 따른 수인성 질병, 의약품 부족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난민촌의 상황에도 미얀마 정부는 유엔식량기구(WFO), 국경없는의사회 등 국제기구의 인도적 지원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시퉤에 소재한 국제구호기구들의 사무실이 불교도로부터 공격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자 난민들 가운데 난민촌을 탈출해, 일부는 태국, 방글라데시로 가거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향해 보트를 타는 이들이 늘어났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의하면 2014년 초 4개월간 보트를 탄 무슬림만 15,000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400 여명은 배가 난파되거나 전복되면서 바다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로힝자 난민이 성노예로 팔려가거나 마약운반책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림 2014년 이후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등 인접 이슬람국가로 향한 로힝자난민들의 이동경로
무슬림 혐오와 갈등 조장하는 불교민족주의
라카인과 메이크틸라 두 곳에서 일어난 불교도-무슬림 폭동 이후 로힝자 무슬림에 대한 버마인들의 감정 또한 악화되었다. 버마인들은 "무슬림이 불교도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고 불교여성들을 훔쳐갈 것“이라는 근거없는 소문에 두려워했다. 이런 소문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무슬림 상점과 모스크를 비밀리에 재정지원하고 있으며, 로힝자는 방글라데시에서 불법적으로 이주한 이주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버마인들의 이러한 반무슬림 감정과 두려움을 고조시킨 이들은 불교승려들이 주축이 된 ‘969’(붓다의 9가지 고귀한 특성을 비롯한 다르마(6가지), 상가(9가지) 등 불교의 특성을 상징함)운동이었다. 969 운동을 이끌고 있는 핵심인물은 승려 위라뚜(U Wirathu)로 969운동에 연루된 혐의로 2003년 2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2011년 사면된 인물이다. 라카인 사태 이후 SNS와 집회를 이용해서 다수민족인 버마족 불교도들의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과 반발심을 고조시켰다. 반무슬림 캠페인을 주도해온 악명 때문에 그는 2013년 6월 타임(TIME)지의 표지를 장식한 바 있다.
반무슬림 법안을 제안한 민족주의 승려 위라뚜(U Wirathu) (출처: Jpaing/Irrawaddy)
승려 위라뚜는 미얀마인들의 반무슬림 정서를 이용하는 한편, 만달레이에서 주로 활동하는 승려들을 규합하여 2014년 1월 불교민족주의 단체 ‘마바따’(Ma Ba Tha, 미안마어로 민족과 불교를 수호하는 연합이라는 뜻)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미얀마 교단의 국가최고승려조직인 State Sangha Maha Nayaka Committee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969 로고를 사용하지 말라고 선언하자, 마바따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얀마 전역에 광범위한 네트워크와 지부를 두고 있는 마바따는 “무슬림을 그냥 두면 무슬림이 불교도를 모두 개종시킬 것이고 그렇다면 불교가 미얀마에서 사라질 것”이라며 무슬림을 겨냥한 법률안을 제안하였다. 법안의 내용은 “일부다처제, 종교간 결혼과 개종 금지, 무슬림의 산아제한” 등을 주요 골자로 하였다. 한마디로 이 법안은 무슬림인구의 증가를 막아 무슬림의 씨를 말리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마바따는 불교승려들과 재가자들에게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의회에 반무슬림 관련 법안에 대한 로비를 했다. 결국, 2015년 초, 이 법안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마바따의 로비과정은 마바따가 전 집권여당과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음을 짐작케 했다.
집권여당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은 지난해 총선에서 확인되었다. 마바따가 대중들로 하여금 전 집권 여당인 '통합단결발전당(Union Solidarity for Development Party, 이하 USDP)‘ 에 투표할 것을 종용했던 것이다. 총선 이후 특정 정당에 투표를 강요한 마바따에 실망했다며 소속 승려들이 탈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한편, 마바따는 국내 활동에 국한하지 않고, 태국의 신흥 불교교단으로서 불교의 국교화를 주장하고 있는 ‘담마까야(Dhammakaya)'와 무슬림에 대한 공격을 부추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스리랑카와 Bodu Bala Sēnā (BBS) 소속 승려들을 만나, 아시아 지역의 무슬림 확산을 막기 위해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마바따는 인도의 나렌드리 모디(Narendra Modi) 총리가 속한 정당으로서 2005년 구자라트에서 행해진 무슬림 대량학살의 배후로 지목되어온 BJP와 손을 잡을 가능성도 비췄다고 한다.
무슬림 자녀를 2명으로 제한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대. 라카인 주도 시퉤 (출처: Min Naing Thu/ Irrawaddy)
반무슬림 폭동에 미얀마 정부의 개입 의혹
라카인 주에서 발생한 폭동, 반무슬림 법안의 제정은 국제사회로부터 ‘대량학살’이라는 비난을 샀다. 2014년 토마스 퀸타나(Thomás Quintana) UN인권이사회의 前 미얀마 특별보고관은 반무슬림 법률제정과 더불어 오랜 기간 로힝자 무스림을 탄압해온 것이 비인도적인 범죄행위이자 조직적인 인종청소에 해당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는 또한 미얀마 정부가 불교도에 의한 무슬림 탄압, 불교도와 무슬림의 갈등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서 정부가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었다며 미얀마 정부의 진상조사와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하였다.
사실상 두 곳의 폭동사태에서 보여준 미얀마 정부의 대응방식에 대해 석연치 않은 점들이 제기되었다. 라카인 사태의 경우, 미얀마 군대가 투입된 뒤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슬림을 중심으로 체포하거나 무슬림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였다는 의혹을 샀다. 그런데 영국의 BBC방송이 입수한 동영상에 따르면 메이크틸라에서 발생한 폭력사태의 경우, 불교도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동안 경찰들이 폭력행위를 막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미얀마 정부가 불교도의 반무슬림 폭동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라카인 폭동 이후 순찰 중인 미얀마 군대 (출처: Irrawaddy)
이러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미국 뉴욕에 소재한 인권단체 Justice Trust는 미얀마의 변호사와 국제변호사가 주축이 된 현지 조사팀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정부는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군인이 아닌 사복경찰을 투입하여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폭력을 행사하였고, 소수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미얀마정부가 불교도의 반무슬림 감정을 조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988년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가 태국으로 망명하여 독립뉴스 매체 이라와디 출판그룹(Irrawaddy Publishing Group)을 설립한 아웅 쩌(Aung Zaw)는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불교도의 반무슬림 감정 조장은 개방 이후 미얀마정부 내 친 중국 성향의 강경파와 온건파 내 권력다툼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군 장성 출신이지만 비교적 온건한 뗀 세인 대통령과 달리 미얀마의 정부내각, 군대, 의회에는 여전히 50여 년간 정권을 잡고 중국의 이익을 대변해온 강경파들이 다수를 점했다. 이들은 미얀마가 개방되자 중국보다는 서구 산업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호전되면서, 중국을 통한 자원개발과 통제에서 이익을 얻어왔던 자신들의 처지가 위협당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부집권 시기 중국기업이 미얀마에서 주민들의 권리와 안전, 건강은 고려하지 않은 채 벌여온 무분별한 자원개발활동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미얀마 국민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따라서 일련의 폭동 사태와 불교의 반무슬림 감정 조장은 미얀마 국민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을 잠재우고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한편 중국과의 관계 유지를 통해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부 내 강경파가 꾀한 정치적 음모라는 것이다.
미얀마 북부 몽뉴와 지역에서 토지를 빼앗고 레파다웅 구리광산을 개발함으로써 환경과 주민들의 생계수단 파괴해온 중국기업에 항의하며 경찰과 대치중인 지역주민들. (출처: 국제앰네스티)
미얀마의 야당 지도자들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가 2012년 4월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지 한 달 여 만에 불교도의 반무슬림 폭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웅 쩌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일련의 폭력 사태가 정치적 음모에 의해 발생했다고 의심하는 이유였다.
따라서 2012년 이후, 악화되고 있는 불교도의 반 무슬림 정서는 종교적인 동기보다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발단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단순히 정치적인 의도로만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로힝자 무슬림에 대한 반감이나 그들을 소수민족이 아니라 단지 불법 이주민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2012년 이전에도 미얀마인들 사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반로힝자 폭동, 영국의 분리통치의 유산
이러한 미얀마인들의 반 무슬림 감정은 현대에 와서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로힝자 무슬림에 대해서,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미얀마로 거주해왔기 때문에 소수민족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은 무슬림 인구가 미얀마에 이주한 시기는 최근이 아니라 영국이 콘바웅 왕조(미얀마의 마지막 왕조)로부터 라카인 지역을 빼앗은 19세기 초반부터이다. 특히, 영국은 미얀마 서부, 지금의 라카인 주가 있는 이라와디 삼각주를 개발하기 위해서 미얀마의 국경을 이룬 인도 동부, 현재 방글라데시가 있는 인도인들(주로 무슬림)의 이주를 독려하였다. 1960년대 UN사무총장을 지낸 우 탄뜨(U Thant)의 손자이자 미얀마의 역사학자인 딴 민트 우(Thant Myint U)에 의하면 1920년대 연평균 25만 명 가까운 무슬림이 이라와디로 이주했다.
그런데 라카인 지역이 영국의 통치하에 놓이기 이전에도 소수지만 미얀마에 무슬림이 거주했다. 13세기 이후 상인과 용병으로서 미얀마에 이주한 무슬림은 미얀마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15세기 라카인 지역에는 벵갈의 술탄에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고 벵갈인과 함께 정착촌을 만든 군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라카인 지역에는 무슬림 정착촌이 존재했고, 이 지역의 왕은 콘바웅 왕조에 복속되는 1785년까지 술탄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미얀마 콘바웅 왕조의 마지막 왕, 띠보(Thibaw)의 선왕인 민돈(Mindon)왕은 모스크를 주요 도시에 건립하고 메카로 성지순례 가는 무슬림을 위해서 메카에 숙소를 지어줄 정도로 무슬림을 배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관계가 영국의 식민통치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라카인 주도 시퉤에서 무슬림을 반대하며 시위하는 버마족 여성들 (출처: Rakhine Straight Views)
식민지배 이후, 영국은 미얀마를 하나의 국가로 보지 않고, 인도의 한 지방 정부로 인식했고 미얀마 내 소수민족이 많다는 점을 이용해 분리통치를 실시했다. 영국식민정부는 다수민족인 버마족보다는 인도 무슬림과 친(Chin), 카친(Kachin), 카렌(Karen) 등 소수민족을 정부 공직과 군대, 경찰에 배치하였다. 숙련, 미숙련 분야를 막론하고 벵갈출신의 무슬림과 소수민족이 일자리를 차지했다. 결국, 1938년 무슬림과 일자리 경쟁을 했던 버마족 불교도들이 미숙련과 대부업에 종사했던 무슬림을 겨냥한 폭동을 일으켜 불교도와 무슬림 수 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도 작가 아미타브 고시(Amitav Gosh)가 띠보왕 일가의 인도유배를 중심으로 미얀마의 근현대사를 그린 소설 『유리궁전』을 보면 버마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미얀마인들의 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미얀마 불교인들의 무슬림에 대한 반감은 영국 식민정부의 분리통치로부터 생겨났으며, 경제적인 측면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라카인 주에서 다수를 점한 불교도들이 로힝자에 반감을 갖는 이유 또한 라카인 주의 경제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라카인은 미얀마에서도 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 가운데 하나임에도 일자리가 부족하며 가장 가난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불교도들은 부족한 일자리와 비즈니스를 중심으로 로힝자와 오랫동안 경쟁해왔다. 권력은 이러한 두 집 단간의 경쟁적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왔으며, 민족과 종교적 정체성 유지라는 목적은 이러한 집단갈등을 부추기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비슷한 갈등의 유형이 인도 북부 라다크에서 발생한 불교-무슬림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라다크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온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라다크에서 기존에 평화롭게 공존해왔던 불교도와 무슬림이 20세기 말 들어 일자리를 중심으로 경쟁하면서 충돌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구의 산업자본이 들어오기 전 라다크의 주요 산업은 농업과 상업이었고, 이를 불교도와 무슬림이 사이좋게 역할분담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서구 산업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이전에 없었던 “빈곤”, “고용(employment)‘과 ’실업(unemployment)‘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불교도와 무슬림이 경쟁하고 반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로힝자 무슬림을 향한 폭동과 반감은 개방이후 미얀마가 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 그리고 영국식민통치라는 역사적 경험에 기반한 집단인식이 복잡하게 얽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