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로힝야족 민간인에 대한 감춰진 학살, 그리고 우리 1)

국제연대 - 김기남 (변호사, 아디 상근활동가) | 2017. 제10

 

떠나라, 너는 이 나라 국민 아니다.” 201610, 집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누르 베검(Nur Begum, 25)씨를 구타하며 하던 말이다. 이 날 군인들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총살하였다. 납득할 만한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늙어서 괜찮을 거라던 아버지는 힘없이 끌려 나가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였다. 남동생(15)도 끌려갔다. 혐의가 무엇인지, 어디에 구금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동생은 지금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주변에서는 살해되었다고 포기하라고 한다. 아버지도 남동생도 미얀마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인데 이렇게 억울하게 떠나야 했다. 그녀도 피난처를 찾아 방글라데시로 월경해야 했다. 군인들에게 그녀와 그 가족들은 그들이 보호해야 하는 자국민이 아니었다.

 

 

 

201610월 이후부터 4개월 동안 위와 같은 인권침해로 수많은 로힝야족( Rohingya) 민간인이 고통 받고 있다. 로힝야 75,000여명이 군부의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었고 1,000여명이 살해당했으며, 1,500여 채의 가옥이 불태워졌다고 추정된다. 미얀마 정부가 해당지역으로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아서 얼마의 국내난민이 발생하였는지 파악하기 어렵고 이들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도 제한되어 있다.

 

국제사회는 인도에 반한 죄 또는 인종청소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고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부터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NLD정부는 이러한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이웃나라의 심각한 인권사안에 대해 무관심하다. 간헐적으로 소개되는 언론기사 외에는 이에 대응하는 인권단체도 드물다. 이양희 교수가 유엔의 미얀마 인권특별보고관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이 글은 지난 2월 아디(ADI)가 진행한 피해생존자 48명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사건의 배경, 경과, 인권침해의 구체적 내용, 미얀마 정부의 대응,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소개하고 우리사회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데 있다.

 

로힝야 논쟁미얀마 소수민족인가

 

로항야족은 지구상에 2백만명이 존재한다. 미얀마에 130만명, 사우디아라비아에 40, 방글라데시에 30~50, 파키스탄에 20만 가량이 주로 거주한다. 미얀마 로힝야족은 주로 방글라데시 접경지역인 라카인주 북부에 거주하고 있다. 로힝야족은 미얀마가 영국식민지가 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지금의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와 방글라데시 접경지역 등의 뱅갈만 인근에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하며 살아온 민족이다. 다만 영국으로부터 독립과 동시에 국경이 인위적으로 그어지면서 일부는 방글라데시로, 일부는 미얀마로 편입되었다. 벵갈어를 쓰고 무슬림을 믿는 미얀마 내의 로힝야족은 스스로 미얀마의 소수민족이라고 여긴다. 혹자는 라카인주를 미얀마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고 있는 라카인족(Rakhine)과 로힝야족이 공존했던 수렴의 공간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군부는 로힝야족을 미얀마 원주민 출신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군부는 이들을 1948년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 거대 토목공사의 인력으로 투입된 이주노동자들이었는데 독립하면서 자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라카인주에 터를 잡은 불법이주자라고 간주한다. 미얀마 시민권자가 아니다 라는 논리이다. 실제로 1982년 네윈 정부는 시민권법 개정을 통해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 모두는 현재 무국적자 상태이다. 실제 아디(ADI)가 인터뷰한 피해자 모두는 미얀마 시민권이 없다고 증언했다. 로힝야족이 미얀마의 소수민족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표면적으로 이들이 직면한 심각한 인권유린의 이유 중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박해는 그 역사가 길다. 로힝야족은 버마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다른 소수민족과 유사하게 자신들의 자치독립에 유리한 행보를 걸어왔다.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이들의 무장투쟁은 지속되었다. 이에 대해 불교도인 버마족 중심의 군부정권은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로힝야족 전체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또 라카인주의 또 다른 소수민족이자 불교도인 라카인족과의 분쟁을 방관 또는 조장하거나 이를 빌미로 로힝야족을 차별하였다.

 

1978, 미얀마 정부는 무슬림 반군토벌을 명분으로 내건 킹드래곤 작전으로 로힝야족 20만 명을 방글라데시로 몰아냈고, 1991년에는 25만 명을 몰아냈다. 2012년에는 라카인 소수민족과의 충돌로 최소 로힝야족 200여 명이 사망하고 10만여 명이 격리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일부 로힝야 청년이 불교도 여성을 강간한 사건으로 촉발되어 라카인 불교도들이 로힝야족을 보복 공격하면서 격화되었다. 미얀마 전역에 반무슬림 정서의 확산은 물론, 불교도 극우주의 세력 주도의 혐오 발언이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는 계기가 됐다.

 

로힝야족에 대한 억압은 사회 구조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로힝야족은 국적을 받을 수 없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인근 지역 방문도 허가를 받거나, 통행료 등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가능하다. 결혼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직업을 구하는데 제약이 있고, 공직에는 나갈 수 없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 201610월 미얀마군의 로힝야족 토벌작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수천 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인근 해역을 떠돌았다. 군부는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들이 불교도 버마족의 이익과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20171월 말, NLD 정부의 법률자문을 맡은 무슬림 우코니(U Ko Ni) 변호사의 암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암살을 사주한 범인은 이것이 버마족과 불교에 유익한(good for race and religion)” 일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로힝야족 무슬림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 되었다.

 

사건의 발단

 

2016109일 새벽, 200~400여 명의 로힝야족 남성들이 검, 새총, 30여개의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방글라데시 접경지에 위치한 라카인주 북부 마웅도우(Maungdaw) 지역의 경찰초소 세 곳을 습격했다. 한 곳은 국경경찰대(Border Guard Police, BGP)의 본부였다. 이 습격으로 경찰 9명이 사망하고 경찰 6명과 경찰관의 부인, 민간인 1명 등이 부상을 입었다. 습격에 가담한 무장세력 중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생포되었다. 또 무기고의 51개의 다양한 총기와 탄약 1만여 발이 무장세력의 수중에 넘어갔다. 지난해 1112~13일에 무장세력은 작전중인 군차량을 습격하고 교전이 발생하여 군인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얀마 대통령실에 따르면, 2016109일 최초의 교전이 발생한 이후부터 201729일 토벌작전의 종료 전까지 4개월 동안 총 20건의 교전 또는 충돌이 있었다.

 

무장세력의 정체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은 습격을 주도한 세력으로 Harakah al-Yaqin(Faith Movement)를 지목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본부가 있고 일부가 파키스탄 등지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방글라데시를 통해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 마웅도우 지역에 잠입하여 활동하였다고 알려졌다. 로힝야 거주민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며 어느 정도의 지지를 얻었다고 알려졌다. Harakah al-Yaqin의 태동과 로힝야 지역주민의 지지는 2012-3년의 사태를 겪으며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의 확산이 원인이었다. 매일 조금씩 말라 죽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할 정도였다.

 

Harakah al-Yaqin는 국제적 행위자의 개입으로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미얀마 내에서 자생한 무장세력의 성격과 다소 다르다. 그렇다고 이들이 지하드를 지향하거나 초국적 테러집단과의 직접적 또는 긴밀한 연계가 있다고 보여 지지 않는다. 이들은 스스로 로힝야의 박해를 종식하는 것을 가시적 목표로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이들이 지하디스트이며 중동의 테러집단과 연계된 국가의 주권을 훼손하는 집단으로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다.

 

미얀마 정부의 대응

 

미얀마 군대(Tatmadaw)와 국경경찰대(BGP)는 본격적인 토벌작전(area clearance operation)에 나섰다. 관련자 색출과 무기회수, 조력자 체포 등을 위해 마웅도우 지역을 완전 봉쇄했다. 라카인 북부에 위치한 대부분의 로힝야족 무슬림 거주지역은 출입이 전면 통제되었다. 때문에 인도주의 지원과 독립적 옵저버와 언론의 접근도 통제되었다. 통행금지가 확대되었다. 23:00~04:00 동안 통행이 금지되었던 것이 19:00~06:00로 확대 시행되었다. 400여 곳의 공립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5인 이상의 모임이 금지되었다.

 

군부는 네 가지 차단작전, 즉 무장세력의 식량(food), 자금(fund), 정보(intelligence), 징집(recruits)을 차단하는 작전을 펼쳤다. 여기에는 거주민의 강제이주, 작전지역 내 마을의 파괴, 식량의 회수 및 파괴 등이 포함된다. 이는 군부가 오랫동안 소수민족 무장세력을 토벌하는데 활용한 전술이다.

 

아디(ADI)가 인터뷰한 피해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작전은 자정, 새벽, 오전, 점심, 저녁 등 시간에 무관하게 2-3일에 한번 씩 또는 많게는 하루에 4번까지도 진행되었다. 나중에 마웅도우에서 부티다웅의 푸욜렛(Puyolet)마을, 울라페이(Ulapey)마을, 타웅바자르(Taung Bazar)마을까지도 확대되었다.

 

로힝야 거주 민간인들은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치면 산속으로 도주했다가 군인들이 물러가면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방식으로 생존하였다. 다른 마을로 피신하기도 했으나 군인들의 만행에 자유로운 곳은 없었다.

 

토벌작전이 시작된 후 군대와 국경경찰대에 의한 인권침해 사례가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마을 수색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용의자 현장 사살, 가옥의 방화, 재산 탈취, 식량의 압수 또는 파괴, 여성 강간 등의 보도가 있었다. 미얀마 정부는 이와 같은 인권침해 의혹에 대해 전면 부인하였다. 방화 의혹에 대해 정부는 무슬림 테러리스트의 책임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군대에 돌리고 국제적 지원을 유도하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하였다. 또 집단 강간 의혹에 대해 로힝야 여성은 더러워군인들이 강간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20172월까지 진행된 4개월간의 토벌작전을 통해 군대와 국경경찰대는 500여명을 체포하여 구금하고, 일부는 재판을 받고 있다. 정부는 토벌작전으로 인한 사망자로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나 유엔관계자는 1,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군대의 토벌작전의 잔인함과 최근 로힝야에 대한 박해의 양태를 고려하면 희생자는 사실상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미얀마 로힝야족 민간인에 대한 감춰진 학살, 그리고 우리 2)로 이어집니다. 




김기남 (변호사, 아디 상근활동가)
인권과 평화를 공부하고, 사단법인 평화의 친구들에서 긴급구호와 인도적 지원활동을 하였다. 이후 법무법인 집현전과 민변 국제연대위에서 활동해 왔다. 그 거창한 무엇을 하려하기 보다 그들의 어려움을 말없이 함께 견디며, 묵묵히 일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현재 변호사,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ADI)\' 상근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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