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로힝야족 민간인에 대한 감춰진 학살, 그리고 우리 2)

세계/아시아 - 김기남 (변호사, 아디 상근활동가) | 2017. 제10

심각한 인권침해


군대의 토벌작전은 무장세력의 색출에 한정하지 않고 로힝야 민간인들 모두를 잠재적 가담자 또는 지지세력으로 간주하고 집단으로 처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을 거주지에서 내쫓고 국경 밖 방글라데시로 몰아내고 있다. 국제사회는 총기, , 방화, 강간, 구타로 인한 살해가 발생하였고, 집단 강간과 아동 살해, 그리고 자의적 구금과 강제실종, 방화와 재산 약탈이 발생하였고 이는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아디(ADI)의 인터뷰에 따르면, 첫째, 군인들은 무작위로 총기를 난사하거나 근거리 조준사격을 통해 로힝야 민간인들을 살해하였다. 심지어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공중에서 자동화기를 발포하였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마웅도우 지역 애캇차웅가손(Yae Khat Chaung Gwa Son)마을 출신의 솜술 아람(Shomsul Alam, 47)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1월 하순 어느 날 오후 2시 경에, 200~300명의 군인이 마을에 들이닥쳤어요. 마을에 도달하자마자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발견하자마자 발포하고 사살했어요. 또 녹색 헬리콥터 2대가 상공에서 자동화기를 쏘아 사람들이 죽었어요. ... 저도 헬리콥터에서 쏜 총알에 어깨와 등에 맞았어요. 방글라데시에 넘어 온 후에야 치료를 받을 수 있었죠. 지금도 그 부위에 고통이 심하고 그래서 일을 할 수 없어요.”

 

둘째, 유아를 포함한 아동도 희생되었다. 유아를 우물에 던지거나 땅에 내리쳐 죽이기도 했고, 흉기()로 죽이기도 하였다.

 

2살난 아들이 살해당한 예윈경(Ye Dwin Kyung) 마을 출신의 라미아오 베검(Ramioa Begum, 22)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2월초 어느날 오전 150여명 가량의 군인과 경찰이 무장을 하고 마을로 들이닥쳤어요. 헬리콥터가 동원되어 약 2시간동안 자동화기를 무작위로 난사했어요. 저도 그 소리를 들었어요. ... 우리 집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은 남편을 체포하고 심각하게 구타했어요. 30분정도 이어졌죠. 남편은 입에서 피를 토하고 온몸이 피로 범벅되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남편을 어디론가 데려갔죠. 그 뒤 남편을 볼 수 없었어요. ... 어느 군인이 두 손으로 2살난 아들을 거꾸로 들어 땅에 내려찍어 죽였어요.”

 

셋째, 소총 개머리판으로 구타하거나 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산채로 집안에 묶어두고 방화하여 죽이기도 했다.

 

푸앙푸차웅(Puang Pyu Chaung) 마을 출신의 라미다 카툰(Romida Khatun, 45)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1114일 경, 군인 50여명이 무장하고 마을에 들어왔어요. 제 남편, 아들, 시아버지, 시형제들 모두 산 채로 집이 불태워질 때 태워져 사망했어요. ...” 라고 증언하였고, Buthidaung지역의 Puyolet 마을 출신 Satera Begum(35, 여성)“...아버지는 95세로 너무 나이 들어 움직일 수 없는데 군인들은 기름을 적신 헝겊에 불을 붙여 집을 불태웠어요. 아버지는 산채로 태워졌어요. ...”

 

넷째, 청장년 남성은 닥치는 데로 잡아 구타하고 아무런 이유 없이 체포해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들은 대부분 행방불명되었고, 귀가한 사람들 중 일부는 구타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심각한 내외상으로 고통을 받았다.


부티다웅지역의 올라페(Olafe) 마을 출신의 하미드 호산(Hamid Hosan, 47)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지난 1112, 군인들이 집에 와서 돈을 요구했고, 100,000짜트를 빼앗아 갔어요. ... 1225일쯤 군인들이 다시 마을로 들어닥쳐 돈을 요구했어요. ... 당시 마을 사람 50여명이 마을 공터에 잡혀있었는데 그 때 집단적으로 구타당했어요. 그리고 Lawadak으로 이송되었지요. 배로 20분 거리지만 걸어서 2시간 거리에요. 그리고 또 그곳에서 숲 속 공터에 모아놓고 구타를 심하게 당했어요. 저는 의식을 잃었지요. 두 아들도 같이 체포되어 있었는데 작은 아들과 저, 그리고 다른 사람들, 15명 정도가 다음날 새벽에 근처의 마웅도우 산속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해서 살아남았지요. ... 큰 아들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증언하였다. Ye Dwin Kyung마을의 Nur Begum(25, 여성)“12월 중순경...남동생 Syedul Amin(15)는 집 앞에서 체포되어 끌려갔어요.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디로 체포되어 갔는지도 모릅니다.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모릅니다. 생사도 모르고요.”


다섯째, 여성은 집단 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군인들은 일부 여성들을 가두어두고 집단 강간하여 살해하거나 심각한 외상을 입혔다. 강간은 거의 모든 마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났다.


푸앙표차웅(Puang Pyo Chaung) 마을 출신의 모리암 베검(Moriam Begum, 25)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2월 초 어느 날 자정 경, 군인들 30여명이 집에 쳐들어와 여성을 찾았어요. 10~15명 정도의 군인들이 여동생과 저를 한 방에 잡아두었는데, 이 중 몇 명이 여동생의 팔다리를 잡아 움직이게 못하고 하고 돌아가며 여동생을 강간했어요. 그리고 제가 보는 앞에서 죽였어요. 저도 강간당했어요. 두번이요. ... 그 날 밤 이후 마을의 여성들이 공터에 모여 함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15일여 동안 모여 생활하고 있었어요. 근데 군인들이 다시 오더니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했어요. 제가 본 것만 해도 8~10여명의 여성이 강간당했어요. 어떤 군인들은 4명을 작은 오두막에 끌고 가더니 2일 동안 강간했어요. 나중에 여성들은 죽은 채로 발견되었죠.”


또 여성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아놓고 강제적인 몸수색을 통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거나 나체로 특정 자세를 취하게 한 후 성기를 촬영하는 등의 만행도 일삼았다.


마웅도우 지역의 두당(Dudang) 마을 출신의 쉐둘 이슬람(Syedul Islam, 45)은 자신의 아내와 딸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2월초, 군인들은 남겨진 모든 여성들을 학교운동장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경까지 모아놓고, 이들에게 마치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게 하고, 옷을 벗긴 후 이들의 뒷모습을 휴대폰으로 영상 촬영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내와 딸도 거기에 있었지요. 또 이들은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했고, 그래서 당시 아내는 임신 5개월이었는데 복부를 가격당해 사산했어요.”

 

여섯째, 로힝야족 무슬림들이 사는 주거지는 불태워 없어지거나 파괴되었고, 이들이 소요한 가축, 식량, , , 장신구 등의 재산은 불법적으로 약탈되었다.

 

요욱 타웅(Myouk Taung) 마을 출신의 알리 아하메드(Ali Ahamed, 45)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1월 중순경 어느 날 아침 7시경, 무장한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어요. 두 시간이 지난 9시 경에는 1대의 헬리콥터가 날아왔고 자동화기로 무작위로 총을 쐈어요....군인들이 20,000짜트와 금 등을 탈취하고 휘발유로 집을 불태웠어요. 그 길로 마을을 도망쳐 나왔어요.


타민차웅(Thamin Chaung) 마을의 모우사나 베검(Mousana Begum, 36)“10월말 또는 11월초 경, 군인들이 집의 모든 벽을 부수었어요. 무장세력이 벽에 몸을 방어막 삼으며 교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증언하였고, 부티다웅 지역의 푸욜렛(Puyolet) 마을 출신 사테라 베검(Satera Begum, 35)“12월말, 군인들은 소 16마리, 염소 12마리, 1년간 수확한 쌀 20가마, 쌀가마니에 숨겨두었던 4,500,000짜트, 옷 등을 모두 빼앗아 갔어요.”라고 증언하였다.


미얀마 정부는 이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의혹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면서도 사실상 부인하였다. 미얀마 정부 주도로 조사위원회가 설치되고 조사활동이 진행되었으나 그 구성과 활동이 독립적이고 중립적이지 못하였고, 인권전문성도 결여되어 조사의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미얀마의 사실상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는 201747BBC와의 인터뷰에서 인종청소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직접 부인하기도 했다(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789628.html). 또 미얀마 정부는 유엔이 결의한 진상조사단(fact-finding mission) 파견도 거부하였다.


가능하다면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아디(ADI)가 인터뷰한 피해생존자들은 극심한 구타를 당해 2-3개월이 지난 지금도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고, 발을 절거나 제대로 눕지도 일어나지도 못하는 난민도 있다. 방글라데시로 넘어 온 후에야 주변의 도움으로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사례도 있다. 이들은 등록된 또는 정식으로 인정된 난민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과 국제NGO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우선은 1990년에 넘어와 등록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선배난민들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 등록된 난민들의 사정도 녹녹치는 않다. 그래서 기껏해야 10평도 안 되는 집에 10여명이 함께 살아야 하는 형편이다. 이번에 새로 넘어온 이들은 직업을 구하기 어렵다. 건강상태도 허락하지 않고, 법적으로 일할 권리도 없다. 일부는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간다. 하루에 1-3달러를 벌어 생계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인근마을에 다니며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영양상태도 염려된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의 눈은 유독 맑았다. 그러나 그 맑은 눈 아래로 크게 늘어져 있는 다크써클은 난민으로서의 삶의 고단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일생동안 가꾸어 온 모든 것을 남겨두고 국경을 넘어야 했고 이들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참혹한 장면, 지켜주지 못한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 그리고 삶에 대한 회한뿐일지도 모른다. 군인들은 매질을 해대며, “너의 알라는 지금 뭐하냐. 너를 구하지 않고.” 라고 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아마 이들에게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신에게 기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가능하다면 우리를 기억해 달라며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는 함께 울어줄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김기남 (변호사, 아디 상근활동가)
인권과 평화를 공부하고, 사단법인 평화의 친구들에서 긴급구호와 인도적 지원활동을 하였다. 이후 법무법인 집현전과 민변 국제연대위에서 활동해 왔다. 그 거창한 무엇을 하려하기 보다 그들의 어려움을 말없이 함께 견디며, 묵묵히 일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현재 변호사,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ADI)\' 상근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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