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에 일화문을 서쪽에 월화문을 거느리며 회랑으로 둘러쳐진 근정문을 들어서니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전(正殿)이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습니다.
근정전 앞 넓은 뜰에는 삼도(三道)의 양 옆으로 품계석(品階石)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주위로는 다듬지 않은 돌인 박석(薄石)이 깔려 있는데 가공하지 않은 박석을 사용한 것은 햇빛의 반사를 막고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섭니다.
박석이 깔린 마당을 조정(朝廷)이라 부르는데 내각(內閣)이나 정부(政府)를 뜻하는 권력기관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이곳에서는 매달 5일, 11일, 21일, 25일에 열리는 조회(朝會)인 조참(朝參)의식과 삼명절(三名節)인 정월초하루, 임금 및 왕비의 생신날 그리고 동짓날에 하례(賀禮)를 드리는 조하(朝賀)의식이 열렸던 곳입니다.
그리고 임금의 즉위식도 거행되어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 등 여덟 분이 이곳에서 등극하였습니다.
<사진:필자제공> 근정전
자세히 살펴보면 조정은 북쪽보다 남쪽이 1미터 정도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형태로 경사(傾斜)져 있는데 이는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근정전과 조정
근정전 구역은 조정은 박석과 품계석으로 월대는 이중의 화강암 기단으로 모두 석물로 이루어졌는데 딱 세 종류의 쇠붙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박석에 박힌 쇠로 만든 고리인데 이것은 차일을 칠 때 사용하던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근정전의 이중월대 상단에 놓여 있는 청동항아리로서 이는 향로가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정(鼎)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중월대 하단 동쪽 귀퉁이에 있는 가마솥 같은 커다란 철물로 순우리말인 ‘드므’라고 하며 이곳에 물을 담아 놓아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기 형상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주술적인 소박한 바람이 담겨져 있는 기물입니다.
그래서 왕권의 상징인 정(鼎)은 조선시대의 법궁,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법궁, 경운궁의 정전 중화전(中和殿)에만 비치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근정전 뒤편에 사정문과 사정전(思政殿)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편전(便殿)으로서 임금이 집무를 보던 곳입니다.
사람이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쓰고 부리는 일의 극치(極致)이며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는 뜻으로 사정전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사정전 양쪽에는 사정전을 보좌하는 소편전(小便殿)으로 동쪽에는 주로 봄에 사용했던 만춘전(萬春殿)이, 서쪽에는 가을과 겨울에 사용했던 천추전(千秋殿)이 있어 계절에 따라 집무를 보는 장소를 달리 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정전은 온돌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에 거처하기엔 불편함이 많아서 온돌로 되어 있는 두 개의 부속 건물을 배치하였습니다.
사정전 뒤에는 향오문(嚮五門)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는 왕의 침전(寢殿)인 강령전(康寧殿)이 있습니다.
향오는 오복(五福)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으로 오복이라 함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일컫는 것입니다.
수는 오래오래 천수(天壽)를 다해 사는 것이고 부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고 강령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유호덕은 덕을 쌓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항상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고 고종명은 마지막 죽음에 임해 고통 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오복 중에서 세 번째 강령을 따와서 침전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용마루가 없는 강령전
그런데 강령전 건물은 용마루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잠을 자는 사람이 바로 용인데 또 다른 용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령전은 전각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월대(月臺)가 무척 높고 넓습니다.
임금의 침소 앞뜰에서도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증좌일 것입니다.
왕비와 세자가 석고대죄를 청하던 곳이기도 하고 임금의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조정대신들이 그 부당함을 목숨을 내놓고 바로잡기 위해 읍소하던 곳도 바로 강령전 월대였습니다.
강령전을 에워싸듯이 사방에 소침전(小寢殿)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동소침인 연생전(延生殿)은 서쪽을 향하고, 서소침인 경성전(慶成殿)은 동쪽을 향하고, 연생전의 북쪽에는 연길당(延吉堂)이, 경성전의 북쪽에는 응지당(膺祉堂)이 자리 잡고 남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 다섯 전각이 모두 회랑(回廊)을 통해 이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강녕전을 지나 양의문(兩儀門)을 들어서면 교태전(交泰殿)이 나타나는데 내명부(內命婦)를 총괄하던 왕비가 일을 보는 전각(殿閣)과 침전(寢殿)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고도 하며 이런 연유로 왕비를 중전이라고도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양의(兩儀)’와 ‘교태(交泰)’는 음양(陰陽)의 조화와 남녀의 교합(交合)을 의미하며 음양이 잘 조화를 이루어 순조로운 생산(生産)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특히 ‘태(泰)’는 <주역(周易)>의 64괘(掛) 중에서 하늘, 남자, 상승(上昇)을 의미하는 건(乾)괘 셋이 아래에 있고 땅, 여자, 하강(下降)을 의미하는 곤(坤)괘 셋이 위에 있는 모양으로 앞으로 땅의 기운이 하강하고 하늘의 기운이 상승하여 비로소 천지음양(天地陰陽)의 기운이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生成), 번영(繁榮)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태전은 원길헌(元吉軒), 함홍각(含弘閣), 건순각(健順閣) 등 부속 건물을 지붕을 낮게 달아낸 익각구조(翼閣構造)로 만들어 거느리고 있으며 뒤편에는 후원(後園)을 만들고 그곳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으로 가산(假山)인 아미산(蛾眉山)을 쌓고 위쪽에는 큰 나무들을 심었고 아래에는 화계(花階)를 만들어 ‘노을이 드리운 연못(落霞潭)’과 ‘달을 품은 연못(函月池)’을 돌에 새겨 두었고 육각형의 굴뚝 4개를 두고 각 면마다 십장생(十長生), 사군자(四君子), 만자문(卍字紋), 봉황(鳳凰), 귀면(鬼面), 학, 박쥐, 불가사리, 당초문(唐草紋) 등의 아름다운 문양을 소조편(塑造片)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백두대간 정기 받으려 만든 왕비 침전 뒤의 가산假山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뒤에 굳이 가산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전통적인 풍수인식에 의하면 백두산의 정기가 산줄기를 따라 방방곡곡으로 뻗어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따라 남향한 산줄기가 분수치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한북정맥(漢北正脈)을 일구고 도봉산과 삼각산 사이의 영봉을 지나면서 정맥의 본줄기는 서쪽으로 노고산, 장명산을 지나 서해로 숨어들고 다른 한줄기는 남쪽으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세봉우리인 삼각산(三角山)으로 솟구쳤다가 시단봉 지나 보현봉에서 형제봉으로 이어져 구준봉 지나 백악에서 경복궁으로 내려앉았는데, 백두산에서부터 이어져온 이 정기를 왕비가 받아 안아 왕자(王子)를 순산(順産)하여 왕실을 번영케 하라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근정전 동쪽에는 앞으로 왕과 왕비가 될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듯 동궁(東宮)이라 하고 달리 세자궁(世子宮), 춘궁(春宮)이라고도 부르는데 아마도 동쪽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의미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 같습니다.
동궁은 세자와 세자비의 생활공간인 자선당(資善堂), 세자가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던 비현각(丕顯閣), 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졌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의 경호업무를 맡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로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세자시강원을 춘방(春坊), 세자익위사를 계방(桂坊)이라 달리 불렀고 동궁의 정문은 중광문(重光門)입니다.
동궁 일원은 지금은 복원되어 있습니다만 1915년 일제가 경복궁을 훼멸(毁滅)시킬 때 자선당의 재목들을 오쿠라(大倉)라는 일본인에게 팔려나가 일본 도쿄에서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사설박물관으로 존재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모두 소실되고 검게 그을린 주춧돌만 오쿠라 호텔 정원에 있던 것을 1995년 경복궁으로 돌아와 지금은 자경전 밖 한쪽에 놓여 있습니다.
동궁 북쪽에는 궁궐에 필요한 음식을 장만하던 소주방(燒廚房)이 최근 복원되었는데 ‘불을 때서(燒) 조리하는 주방(廚)’이라고 붙여진 이름으로 왕과 왕비의 수라를 장만하는 내소주방인 수라간, 궁궐의 크고 작은 잔치상과 차례상을 준비하는 외소주방인 난지당, 다과와 간식을 마련하는 생물방(生物房)인 복희당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경복궁에는 소주방 건물이 여러 곳에 있었으며, 복원된 건물은 대전(大殿)에 속한 소주방입니다.
조선의 왕은 보통 하루에 다섯 끼를 먹었는데 오전 10시에 12첩 반상의 아침수라와 오후 5시에 저녁수라를 주식으로 삼고, 오전 7시에는 흰 쌀죽과 반찬이 놓인 죽수라상을, 오후 1시와 밤 9시에는 국수를 위주로 한 반과상(飯果床)을 차렸습니다.
교태전을 나서면 동궁 북쪽으로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趙大妃)를 위해 청련루 터에 건립한 자경전(慈慶殿)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경복궁에서 연침(燕寢)에 해당되는 강령전, 교태전, 자경전 중에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로서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나자 일제는 경복궁의 전각들의 재목을 창덕궁 복원에 사용하였는데 강녕전을 헐어 희정당(熙政堂)을, 교태전을 헐어 대조전(大造殿)을 복원하였고 지금의 강녕전과 교태전은 1990년대에 중건한 것입니다.
궁궐에서 자경전은 임금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 등 여성들이 주거하는 공간을 일컫는데 정조(正祖)가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洪)씨를 위해 창경궁(昌慶宮)에 자경전을 짓는데서 비롯되었으며 자경(慈慶)은 임금의 어머니와 할머니 등 여자 쪽 어른들에게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여성들의 주거공간, 자경전
자경전은 조선 초 경복궁 창건 때에는 없었던 건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 조대비를 위해 특별히 지은 것으로 정문을 만세문(萬歲門)으로 이름 짓고 담장은 아름다운 꽃담으로 장식하였으며 뒤뜰에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굴뚝과 불가사리와 같은 벽사(辟邪)를 상징하는 동물들도 벽돌로 구워 새겨 넣었습니다.
교태전 뒤편에는 조대비가 승하한 흥복전(興福殿) 구역은 상궁들의 침전영역으로 흥복전 주변에 광원당(廣元堂), 영훈각(永薰閣), 다경각(多慶閣), 집경당(緝敬堂), 함화당(咸和堂) 등의 건물들로 둘러 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집경당과 함화당만 세 칸의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쓸쓸히 남아 있고 흥복전은 지금 한창 복원공사 중입니다.
건청궁(乾淸宮)은 고종이 아버지인 대원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내탕금(內帑金)으로 지은 궁궐안의 궁궐로 경복궁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종이 머물렀던 사랑채인 장안당(長安堂), 명성왕후가 머물렀던 안채인 곤녕합(坤寧閤) 그리고 행랑채로 구성된 일반 사대부 집과 같이 지어졌으며 특히 곤녕합의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왕후를 일본 낭인들이 시해(弑害)하고 옆에 있는 녹산(鹿山)에서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경복궁에는 연못이 둘 있는데 하나는 강녕전과 근정전 곁에서 정면 7칸 측면 5칸의 35칸 규모의 팔작지붕 중층건물(重層建物)인 경회루(慶會樓)를 품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건청궁 앞에서 정육각형 정자로 모지붕을 한 중층건물인 향원정(香遠亭)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경회루는 웅장하며 남성적이며 향원정은 아담하며 여성적인 분위기가 풍기며 ‘경회(慶會)’는 ‘임금과 신하가 덕(德)으로서 만난다.’는 뜻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의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던 공적(公的)인 공간이고 ‘향원(香遠)’은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라는 뜻으로 임금이 휴식을 취하며 거닐던 사적(私的)인 공간입니다.
<사진:필자제공> 향원정
건청궁의 서쪽에는 집옥재(集玉齋), 협길당(協吉堂), 팔우정(八隅亭)이 있는데 이 세 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으로 고종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사신 접견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경회루와 그 주변의 건물과 기능
이 3채의 건물은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집옥재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米連, 字 元章)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경복궁의 서북쪽 일대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복원된 태원전(泰元殿)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로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습니다.
경회루 남쪽에 있는 수정전은 세종 때는 신하들과 만나 학문도 논하며 한글도 창제한 집현전(集賢殿)으로, 세조 때는 정례행사와 모든 중대회의에 참석하여 회의록과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편찬하여 실록편찬(實錄編纂)의 자료로 삼았던 예문관(藝文館)으로, 고종 때는 잠시 침전(寢殿)과 생활공간으로 사용한 연거지소(燕居之所)로, 갑오경장(甲午更張) 때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로, 그 이후에는 내각(內閣)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경복궁의 네 개의 문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달랐는데 정문인 광화문은 임금의 행차나 사신들이 주로 드나들었고, 세자의 공간인 동궁이 동쪽에 있어 건춘문으로는 왕실의 종친들이 주로 드나들었고, 궐내각사가 근정전 서쪽에 있어 영추문으로는 문무백관이 주로 드나들었으며, 북문은 특별한 일이 없는 동안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종친부(宗親府)는 건춘문 밖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