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은 그 용도에 따라 법궁(法宮),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별궁(別宮)으로 나눠집니다.
정궁은 임금이 통치행위를 하였던 궁궐로 임진왜란 전까지는 경복궁이고 이후는 창덕궁이며 이궁은 임금이 머물며 쉬는 곳으로 경희궁이 이궁에 속하며 행궁은 임금이 도성 밖에 나갈 때 머물기 위한 궁궐이고 별궁은 특정 목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세 분의 대비를 위해서 성종이 수강궁을 확장하여 지은 창경궁이 이에 해당되며 법궁은 두 정궁 중에 정통성을 갖는 경복궁을 법궁이라 이릅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 경복궁과 창덕궁을 함께 축성하여 이 두 궁궐이 시기별로 정궁의 역할을 달리 하였지만 법궁(法宮)으로서 위치는 여전히 경복궁의 몫이었기에 그 축성에 있어서 당연히 중국의 전범(典範)인 주례(周禮)에 따라 많은 부분을 그 원칙에 맞게 궁궐을 지었습니다.
궁궐 구성과 배치의 원리
첫째는 대칭의 원칙입니다.
광화문(光化門)-흥례문(興禮門)-근정문(勤政門)-근정전(勤政殿)-사정문(思政門)-사정전(思政殿)-향오문(嚮五門)-강령전(康寧殿)-양의문(兩儀門)-교태전(交泰殿)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중심축의 왼쪽인 동쪽은 세자의 영역인 동궁(東宮)과 종친(宗親)들의 영역이고 오른쪽인 서쪽은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영역인 경회루, 집현전 그리고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았습니다.
둘째는 삼문삼조(三門三朝)의 원칙입니다.
삼문이라 함은 고문(皐門), 치문(治門), 노문(路門)이고 삼조라 함은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를 이름입니다.
외조는 신하들이 집무하는 공간으로 흥례문에서 근정문까지, 치조는 정전(正殿)과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편전(便殿)을 포함한 공간으로 근정문에서 향오문(嚮五門)까지, 연조는 임금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침전(寢殿)과 생활공간으로, 향오문 뒤의 임금의 침소인 강령전(康寧殿)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 그리고 대비의 생활공간인 자경전(慈慶殿) 일원입니다.
따라서 고문은 외조의 정문으로 흥례문이고 치문은 치조의 정문으로 근정문이고 노문은 연조의 정문으로 향오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외조의 정문인 흥례문 사이의 공간은 무엇일까?
이곳은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군사가 머무르는 곳입니다.
궁궐(宮闕)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가 살고 있는 궁(宮)과, 궁을 지키는 궐(闕)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궁은 외조와 치조와 연조에 있는 모든 건물들이고, 궐은 경복궁의 사대문과 궁을 둘러친 담장(宮城)과 망루(望樓)로서의 동십자각(東十字閣)과 西十字閣(서십자각) 그리고 수비 군사들이 기거하는 광화문에서 흥례문 사이의 공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궁궐의 모든 길은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도의 길 중에 가운데가 약간 높이 솟아 있는데 이곳을 특히 폐도(陛道)라 하고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동쪽의 길은 문신(文臣)이, 서쪽의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래서 가운데 길인 폐도는 임금만 다닐 수 있어 폐도를 다니는 사람을 일러 폐하(陛下)라고 부르는데 아쉽게도 황제의 나라인 중국의 황제에게만 그렇게 부를 수 있고 제후의 나라인 조선의 왕에게는 그렇게 부르면 역심을 품은 것이 됩니다.
궁월의 길과 문, 日月春秋
삼도와 마찬가지로 대문(大門)도 동쪽의 문에는 태양을 뜻하는 일(日)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문신(文臣)들이 드나들고 서쪽의 문에는 달을 뜻하는 월(月)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무신(武臣)들이 드나드는데 근정문 동쪽의 일화문(日華門),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을 말함입니다.
또한 중심축의 건물들 좌우로 배치된 부속건물들도 동쪽에 있는 건물과 대문들은 봄 춘(春)자가 들어 있고 서쪽에 있는 부속건물과 대문에는 가을 추(秋)자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萬春殿)이 서쪽에는 천추전(千秋殿)이 경복궁의 동쪽 문을 건춘문(建春文)이라 하고 서쪽 문을 영추문(迎秋門)이라 합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궁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돌아서서 바라보면 세종로와 태평로가 숭례문까지 시원스럽게 뚫려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조선일보사 앞에 황토현(黃土峴)이라는 언덕이 있어 한양도성의 정문(正門)인 숭례문(崇禮門)에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세종로인 육조(六曹)거리를 지나 광화문네거리에서 동쪽으로 지금의 종로거리인 운종가(雲從街)를 따라 지금 종각(鐘閣)이라 부르는 종루(鐘樓)까지 가서 다시 남쪽으로 지금의 남대문로인 숭례문로(崇禮門路)를 따라 숭례문에 이릅니다.
세종로 길을 조선시대에는 주작대로(朱雀大路) 또는 육조(六曹)거리 라고 불렀습니다.
궁궐의 좌향(坐向)이 남향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 궁궐 앞 도로는 오행(五行)에 따라서 남쪽은 주작(朱雀)이니 주작대로(朱雀大路)라 하고 또한 그곳에 조선시대의 관청인 육조(六曹)가 자리 잡고 있어 육조거리라 했는데 제후7궤(諸侯七軌)의 원칙에 따라 제후국가에서는 칠궤, 즉 마차 일곱 대의 넓이를 넘어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육조거리에는 경복궁의 정문(正門)인 광화문 앞 왼쪽, 즉 동쪽으로는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한성부(漢城府), 호조(戶曹), 기로소(耆老所), 포도청(捕盜廳)이 차례로 자리 잡았고 광화문의 오른쪽, 즉 서쪽으로는 예조(禮曹), 사헌부(司憲府),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이 차례로 배치되었습니다.
이들 육조거리의 관아(官衙)를 통칭하여 궐외각사(闕外各司)라고도 불렀습니다.
해태가 아니라 해치, 그것이 사헌부 앞에 놓인 이유
돌아서서 광화문으로 들어서려고 하니 커다란 해태 두 마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속설(俗說)에 의하면 관악산이 화산(火山)이어서 그 화기(火氣)가 경복궁에 미치어 화재를 발생시킬 염려가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을 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광화문 앞에 세웠다는 것인데 그럴듯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이름부터 해태가 아니라 해치로 최근에는 서울시의 상징동물로 해치라고 올바르게 부르고 있어 다행입니다.
해치는 중국 요(堯) 임금 때 출현한 상상의 영물(靈物)로서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정수리엔 외뿔이 있고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고 몸은 비늘로 덮여 있으며 매우 영리하여 선악(善惡)을 구별하는 능력과 사람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단하는 신령(神靈)서러운 재주가 있다고 하는데 중국의 <이물지(異物志)>에는 해치에 대해 “성정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툴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치의 상징성 때문에 해치는 인간의 죄를 다스리는 사헌부(司憲府)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헌부 수장(首長)인 대사헌(大司憲)의 흉배(胸背)에는 해치를 수놓았고 문반(文班)의 흉배에는 학(鶴)이, 무반(武班)의 흉배에는 호랑이가, 당상관(堂上官)인 정삼품(正三品) 이상은 두 마리, 당하관(堂下官)인 종삼품(從三品) 이하는 한 마리를 수놓았습니다.
사헌부가 있었던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었던 해치는 없어졌고 지금 광화문 앞에 있는 두 마리의 해치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당시 최고의 석수장이 이세욱(李世旭)이 조각한 걸작입니다.
광화문(光化門)이란 이름은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따왔는데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만방에 보여준다.” 라는 뜻입니다.
광화문은 달리 정문(正門)과 오문(午門)으로도 불렸는데 정문(正門)이란 “닫아서 이상한 말과 사특한 백성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현인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모든 바른 것 중에서도 큰 것입니다.” 라고 정도전이 그 뜻하는 바를 태조께 아뢰었고 오문(午門)이란 궁궐의 좌향(坐向)이 배북남면(背北南面)이니까 그 정문은 오행(五行)으로 봐서 남쪽인 오시(午時) 방향임으로 오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闕門)의 형식을 갖추었는데 돌로 육축(陸築)을 높이 쌓고 가운데 칸이 양쪽 옆 칸 보다 조금 더 높고 넓은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을 내는 고설삼문(高設三門)형식으로 가운데 칸은 임금과 왕비만이 드나드는 어칸(御間)이고 동쪽 칸으로는 문신(文臣)이, 서쪽 칸으로는 무신(武臣)이 드나들었습니다.
광화문의 현판 글씨는 고종 때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서 영건도감(營建都監) 제조(提調)를 맡았던 임태영(任太瑛)이라는 무인(武人)이 쓴 것입니다.
광화문은 남문이라서 천정에 주작(南朱雀)이 그려져 있고 북문인 신무문에는 현무(北玄武)가, 동문인 건춘문에는 청룡(左靑龍)이, 서문인 영추문에는 백호(右白虎)가 그려져 있습니다.
광화문에서 흥례문에 이르는 구간은 궁이 아니라 궐에 해당되는 곳이기에 삼도(三道)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거처하는 궐로서 병사들이 훈련할 수 있도록 평평한 광장(廣場)으로 되어 있으며 군사들이 숙직할 수 있는 건물들도 있습니다.
흥례문(興禮門)은 회랑을 좌우로 둘러치고 위엄 있게 서 있습니다만 흥례문의 원래 이름은 홍례문(弘禮門)이었으나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이 홍력(弘歷)임으로 그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홍(弘)을 흥(興)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사진:필자제공> 경회루
흥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근정문이 보이고 좌우로 행랑(行廊)이 둘러쳐 있으며 바로 앞에는 영제교(永濟橋) 라는 돌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로는 명당수(明堂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궁궐의 최북단인 열상진원(列上眞原)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향원정(香遠亭)에서 연못을 이루고 전각들의 밑을 흘러 경회루 연못에 잠시 쉬었다가 영제교 아래로 흘러 동십자각 못 미친 곳에 있는 궁궐담장 아래 이간수문(二間水門)을 통해 궁궐을 빠져나가 중학천(中學川)을 거쳐 청계천(淸溪川)으로 흘러갑니다.
이 물길은 서류동입(西流東入) 또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명당수로서 금천(禁川)이라고 하는데 임금의 공간과 바깥공간을 구분 짓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천록(天祿)이라는 뿔 하나 달린 서수(瑞獸) 네 마리가 매서운 눈초리로 모든 사악(邪惡)한 것들이 금천을 건너지 못하도록 납작 엎드려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금천(禁川) 위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 하고 조선의 모든 궁궐에 놓여 있으며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敎)가 그것입니다.
흥례문에서 바라볼 때 동쪽인 오른쪽 행랑에는 덕양문(德陽門)을 냈고 서쪽인 왼쪽 행랑에는 유화문(維和門)을 내고 그 옆에 기별청(奇別廳)을 두었습니다.
유화문은 신하들이 집무를 보던 장소인 빈청(賓廳)으로 통하는 문(門)으로 궁 밖의 관료들은 광화문, 흥례문, 유화문을 거쳐 빈청을 드나들었으며 유화문 옆에 자그마하게 붙어 있는 기별청은 아침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일들을 기별지(奇別紙)로 작성하여 배포하던 곳으로 관청으로 부터 좋은 소식이 있을 때 기별(奇別)이 왔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경복궁이야기-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