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불교/종교 개혁 - 강성식 (지지협동조합 상임이사) | 2016. 제3

 

 

불교의 가르침은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한다. 불교를 박물관의 박제화된 동물처럼 만들거나, 과거의 시공간 속에서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진 무덤 속 미이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불교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도 불교의 자기정체성에 기반하여 현재의 주어진 상황과 조건을 반영하여 이루어져야 현실성을 가질 수 있다.

 

무릇 종교의식이나 형식, 혹은 종교적 사고 판단이나 행위는 그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나 지향하는 근본정신에 입각한다. 현재 조계종단에서 삼귀의의 한글 번역으로 인해 불거진 논란 역시, 불교의 근본정신을 담아 가장 적절한 한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이해되어 왔으니까, 혹은 스스로 존경의 대상으로서 위상을 갖고 싶은 바램을 담으려고 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바는 이고득락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괴로움을 떨치고 깨어있는 행복한 사람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목표의 성취는 고타마 붓다, 신이나 절대자가 있어 가피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스스로가 주인 되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써 법에 의지하여 붓다가 되어야 한다. 불교에 있어서 귀의한다는 것, 의지한다는 것, 즉 의지처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법이다. 불교는 자기 자신과 법에 의지하여 괴로움을 떨친 행복한 사람인 붓다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다. 고타마 붓다는 열반을 앞두고 붓다 입멸 후 의지처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자기 자신과 법을 의지처로 할 뿐, 붓다 자신조차도 의지처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것이 자등명 법등명이며, 자귀의 법귀의이다.

 

불교에서의 의지처는 이와 같이 오로지 자귀의 법귀의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삼귀의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귀의한다는 것은 믿고 의지한다는 의미이니 삼귀의는 세 가지, 즉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이다. 불교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 삼보를 믿고 의지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삼보가 무엇인지,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규정하는 것은 불교도가 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삼귀의는 고타마 붓다가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조직화할 목적으로 처음 설법을 할 때부터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다. 무작위 대중들에게 자신의 법을 설하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부터 하나의 무리를 조직화해가며 질서와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정형화된 것이다. 즉 불교가 제시하는 절대적 진리를 체득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진리의 도반이며, 불교도로서 불교공동체의 일원임을 자각하는 형식이자 의식 중의 하나가 삼귀의인 것이다.

 

삼귀의는 불교가 추구하는 절대 진리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 문제가 되고,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의 하나는 삼귀의가 그러한 내적 지위를 갖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식(儀式)과 형식을 넘어 불변의 진리로서 도그마하여 절대시하거나 집착하는 것에 있다. 마치 삼귀의가 불교적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인 양 생각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삼귀의에 목메지 않아도 그것과 관계없이 우리는 각자의 삶속에서 불교정신과 가치를 실현하며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으며 붓다가 될 수 있다. 삼귀의는 다만 불교교단이라는 조직체의 구성원임을 확인하는 하나의 의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상을 갖는 삼귀의는 불교의 근본정신에 바탕하고, 불교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의식이며 형식으로서 어떻게 이해되어져야 바람직한 것인가?

 

<- Ti sarana(三歸依, 삼귀의)>

 

팔리어

팔리어 풀이

한문 번역

우리말 삼귀의

Buddham saranam gacchami.

붓당 - 사라낭 갓차미.

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귀의불양족존 歸依佛兩足尊

지혜자비 구족한 존귀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Dhammam saranam gacchami.담망 사라낭 갓차미.

가르침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귀의법이욕존 歸依法離欲尊

욕망을 멀리하는 존귀한 법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Sangham saranam gacchami.

상강 사라낭 갓차미.

상가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귀의승중중존 歸依僧衆中尊

무리 가운데 존귀한 승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귀의불 붓다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붓다는 고타마 붓다, 즉 석가모니 개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개인이나 인물이 아니라 보편성을 갖는 각자로서의 붓다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랬을 때 붓다는 26백 년 전의 역사 저편에 머물러 있는 절대적 존재로서 화석화된 부처님이 아니고 언제나 인류의 역사 속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우리 곁의 살아있는 붓다로서 자리할 수 있다. 붓다라는 용어는 고타마 붓다 당시에는 깨달은 사람, 깨어있는 사람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었다.

 

불교 경전에서도 삼보의 성립과정과 관련하여 붓다를 단수가 아닌 복수를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선각자로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귀의불의 붓다는 고타마 붓다 개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고타마 붓다를 포함하여 역사속에서 깨침을 이루고 실천했던 많은 선각자들을 의미하며 그들의 삶을 공경하고 본받아 나도 그와 같은 길을 걷는 붓다가 되겠다는 강력한 자기다짐을 내포하는 뜻이 담겨진 표현이다.

 

귀의법 - 가르침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다르마)은 무상, 무아, 연기의 가르침과 같이 세상과 삶에 대한 이치로서 보편적, 절대적 진리이며, 깨달음의 내용으로서의 법이다. 이는 괴로움을 벗고 행복을 얻는 법이다. 괴로움은 무엇이고, 그 원인은 무엇이며, 그 원인으로부터 벗어나 괴로움을 소멸해 가는 길에 대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다르마는 불교가 목표로 하는 내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무상, 무아, 연기의 이치를 깨달아 욕망과 집착을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고,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한 삶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귀의승 - 상가(Sangha)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상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승(), 승가(僧伽)라는 용어의 원형으로서 중국의 역경승들이 상가를 음차하여 승가라고 한 것이다. 상가는 모임, 단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불교교단, 즉 불교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현재의 불교교단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교단이 출재가의 사부대중으로 구성되는 체계를 확립하기 이전에는 느슨한 형태의 모임, 즉 붓다와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의 모임으로 인식되어 출가수행자 중심의 공동체를 의미한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는 불교교단이 사부대중으로 구성되는 조직체계를 갖추기 이전의 모습을 반영한 표현인 것이다.

 

붓다가 깨침을 얻고 가르침을 펼쳐가는 초창기에는 가르침을 펴는데 있어서 출재가의 구분 없이 법을 설하였다. 와서 듣고 사유하여 깨침을 얻으면 족하였다. 그러나 교단이 점차 확대되어 가면서 조직으로서의 체계와 형식을 잡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출재가에 대한 구분이 명확해졌고, 조직체로서 조직 구성원들의 역할과 책임 등이 부여됐다. 따라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 즉 불교공동체, 불교교단을 뜻하는 상가는 스님들’, 혹은 출가공동체가 아니라 사부대중으로 구성되는 불교공동체로 이해되어져야 그 본래적 의미를 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몇 가지 제기된 문제들에 대하여

 

상가 승가 스님들로 풀이한 것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상가는 모임, 단체를 의미하는 조직공동체를 뜻하는 것이기에 스님으로 지칭되는 출가수행자 개인이나 복수적 표현으로서 스님들이 될 수 없다. ‘스님들이라는 복수적 표현이기에 단체와 동일시 될 수 있다는 생각이라면 이는 개체와 단체의 차이를 몰이해하는데서 발생한 문제이므로 더 논할 가치가 없다. 교단이라는 공동체가 이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개개인들과 등치될 수는 없음이다.

 

또한 상가가 스님들 개인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굳이 상가라는 표현을 쓸 이유도 없다. 걸식하는 수행자를 말하는비구에게 귀의하라고 한다거나, 혹은 당시 출가수행자를 가르키는 보편적 용어인사문(沙門, śramana)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해야 적절하다. 그러나비구’, 혹은사문에게 귀의한다고 되어 있지 않고,‘상가에 귀의한다고 표현되어 있다.‘상가승가라는 용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었기에 이를 다시스님들로 풀어썼지만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없는 것이기에 바로잡아야 한다.

 

상가는 출가공동체라는 것에 대하여

상가는 스님이나 복수로서의스님들이 아닌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이 공동체가 출가공동체만을 의미하는 것이냐, 사부대중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오히려 상가를 스님들이냐, ‘공동체냐 하고 따지는 것보다 논의의 중심에 서는 것이 타당하다. 상가가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이때의 공동체를 출가공동체만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부대중공동체로서의 교단개념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상가가 출가수행자 공동체인 교단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단 발달과정상에 있어서의 쓰임이다. 교단이 사부대중공동체로서의 개념이 확립되는 시점에서의 상가는 함께 불도를 닦아가는 사부대중의 공동체로서 불교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법 내에서는 빈부귀천을 떠나 모든 사람이 평등할진대 하물며 불법을 닦는 사람을 차별하여 사부대중공동체가 아닌 출가공동체로 한정한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비불교적인 생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교는 출·재가에 차별성을 갖는가? 차별성을 갖지 않는다면 상가를 사부대중공동체가 아닌 스님들또는 출가공동체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에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인가? 출가자를 다른 특별한 존재, 존경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출가수행자로서, 특히 비구들만이 다른 사부대중과 달리 무언가 소명을 받은 특별한 존재이고 싶어 하거나, 마치 사성계급에서의 바라문과 같은 계급의식적 권위를 의식적으로든 부지불식이든 간에 환경적 영향으로 습기로서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재가자와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이 한 톨만치라도 있다면 이러한 생각은 출·재가를 구분하여 차별화하고 마치 출가자가 우월한 존재인 양 생각하는 망집에서 나온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출가는 세속적 명리와 욕망을 놓고 떠남인데, 놓고 떠난 가운데 그 무슨 권위와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함이 있겠는가? 출가와 재가는 삶의 형식과 모습이 다를 뿐이지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다른 것은 아니다. 또한 출가는 높고 귀하며 수승하고, 재가는 낮고 천하며 별 볼일 없는 것이 아니다. ·재가는 불법을 배우고, 익히며, 전하고, 지켜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평등하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정신에 바탕을 둔다면 상가사부대중으로 구성되는 불교공동체이어야만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불교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불교교단을 지켜가고 발전시켜 나가야하는 책무가 수반될 것이고, 이렇게 구성된 사부대중공동체는 불자 누구나의 의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삼귀의는 깨침과 행복을 찾아가고자 하는 다짐

불교는 깨침을 지향한다. 늘 깨어있음을 지향한다. 무지, 무명에 대한 깨침, 지금 현재의 상황에 대한 깨침, 이러한 깨침은 깨침으로서 완성되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나를 규정한다. 깨침은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전제조건이 된다. 불교는 깨침을 통한 존재와 실상을 여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현실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 그저 단순히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을 믿고, 스님들을 믿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해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러한 깨침과 행복의 길을 열어 가는데 있어서 의지할 곳은 오로지 자기 자신 스스로이며, 법이다. 고타마 붓다조차도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삼귀의를 통해 대상을 특정 짓고, 믿고 의지할 것을 강요하고, 그것이 불변의 종교적 진리인 양 한다면 이는 불교 가르침과 상통될 수 없다. 불교의 가르침은 종속적 개념이 없으며 누구나가 다 각자의 삶의 주관자로서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진리를 깨우쳐 붓다가 되고 행복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귀의는 다만 이러한 길을 가는데 있어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도반이며, 공동체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도반들로 이루어진 불교교단이라는 조직을 유지 발전시켜 가기 위해 필요한 의식으로서, 스승으로서의 붓다와 가르침으로서의 법과, 가르침을 구현해가는 사부대중공동체로서의 교단을 의지하여 깨침과 행복을 찾아가고자 하는 다짐이다.


강성식 (지지협동조합 상임이사)
돌이켜 보면 지난 세월은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일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더욱 나락으로 떨어진 작금의 불교모습을 보면서는 삶이 처량해 지기까지 합니다. 이제 새로이 신대승불교운동을 통하여 이생의 마지막 인연의 불씨를 지펴보려 합니다.
현직 : 지지협동조합 상무이사
역임 : 대불련지도위원, 봉은사사무장, 사)불교아카데미/참여불교 사무처장, 달마사종무실장
편집진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