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론장 생태계 형성의 조건

미디어/공론장 - 윤남진 (편집위원) | 2016. 제2




 글머리에
  이 글은 <불교포커스> 정성운 주간이 ‘대한불교조계종의 언론 탄압과 해결방안 공청회’에서 발표한 <불교 생태계와 현황>이라는 발제문에서 제기한 논제를 발전적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좁게는 불교언론 넓게는 불교공론장이 생동하려면 그 밑바탕이 되는 필수요건들은 무엇일까, 역으로 말하자면 불교 공론장의 발전을 저해하는 좀 더 근원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던지면서, 이를 풀어가는 데 협동지성이 발휘되기를 기대하면서 공론의 장에 던지는 숙성되지 않은 제안이다.
         
  더불어 대불청,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신대승네트워크가 제안하고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이를 받아 진행하고 있는, <조계종 해종언론특위>와 <조계종 언론탄압공동대책위원회>(해종언론으로 규정된 두 언론 포함) 등 당사자와 이해관계자가 함께하는 초보적 공론장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노력이 난항을 겪고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에서 쓴 글이기도 하다. 

  이 글을 통해 주되게 생각해보고자하는 것은 우리는 왜 언론 그리고 공론장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언론의 대표성과 책임성이 왜 중요하며 그 조건은 무엇인가, (정성운 주간의 주장으로 말하자면) 이런 언론의 공공성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지기 위해 불교 언론이 현재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1.
 공론장에서 약자에게 합의를 강제하지 말아야
  필자가 생각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최고 덕성은 ‘서로 섞여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사회정치적구조로 체계화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성운 주간이 글머리에서 칠불퇴법을 예로 들며 펼친, 공화주의(共和主義)에 대한 믿음의 바탕에도 이런 생각이 전제된 것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우리는 섞여서 산다. 연기의 이법처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섞임을 유지하고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것의 요체는 말을 섞는 것, 의견이 섞이는 것이 핵심이 되는 섞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의견이 섞이는 과정 또는 형식을 토론/의논이라고 하기도 하고 숙의/의사소통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숙의민주주의, 의사소통민주주의가 오늘날 우리 사회정치적 체계에서 이룩되어야 할 숙제라고 본다. 

  이런 숙의, 의사소통민주주의가 현장에서 활발히 벌어지는 곳을 공론장, 공적 담론의 장이라고 부른다. 다음의 글을 보자.    
  ‘하버마스는 현실적으로 공적 담론의 결과보다는 지향성에 관심을 둔다. 그 모델은 참여자들이 공적 담론에 굳은 신념을 갖고 참여하며, 남에 의해 설득되어 처음 가졌던 생각을 적어도 수정하거나 심지어 아예 버릴 수 있다는 전제(항상 그렇게 가정될 수는 없지만)에서만 힘을 발휘한다.
  하버마스적 사고에서 공론장은 이해와 일치의 가능성을 시험 받는 곳이다. ‘합리적-비판적’토론의 시험은 결코 합의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시험은 절차가, 강제 없는 합의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허용하느냐다’(민주주의와 공론장, 위르겐 하버마스/루크 쿠드)

  이 인용문에서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을 고른다면, ‘남에 의해 설득되어’하는 말과 ‘결코 합의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공적 담론의 장에 참여하는 사람 길동이와 영희는 논의의 과정에서로 자신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참여할 때, 그들의 의견이 ‘공적’, ‘담론’으로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바뀔 수도 있다는 전제가 없이 내놓은 의견은 말을 통한 선전선동이나 세뇌행위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의견들이 특정한 세력 혹은 진영논리로 되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논의의 진화를 달성하지 못하는 한 화쟁은 불가능한 것이다.
   
  공론장에서의 토론은 항상 그 결과물로 반드시 어떤 합의를 달성해야 하는가? 근시안적인 경제효용성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합의의 달성을 의논의 필수적 결과물로 전제하려든다면, 공론장은 활발발하게 생동하지 못하고 화석화 될 것으로 짐작된다. 대체적인 세상사는 합의의 달성을 위해 자신의 견해를 바꾸어야 하는 -이 경우는 희생해야 하는- 쪽은 약자나 소수자였다고 알려주고 있다. 강자나 다수자라고 생각하는 쪽은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론장에서의 토론은 합의를 강제하지 않는 평등한 절차가 핵심일 것으로 생각된다. 공론장에서의 의견들은 다른 방식, 즉 공중(시민)의 여론 형성 그리고 투표 등을 통한 공중의 의사결정과정 등을 통해 현실적인 합의가 달성될 것이다. 이 길이 막히면 폭압과 혁명만이 선택 가능한 남은 수단이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조계종 해종언론대책위의 태도는 폭압에 가깝다. 두 개(불교포커스/불교닷컴)의 언론매체에 대해 취재를 금지하고 후원을 가로막는 조치는 지엽적인 것이다. 이 폭압은 공론장을 궤멸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불온한 것이다. 이 폭압은 두 개의 언론사에 대한 조치라기보다 ‘깨어있는 대중’을 향한 암전(暗箭_어두운 곳에서 몰래 날아오는 화살)이다. 

  의도적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어떤 의견을 네 편 내 편의 논리에 가두고, 마침내 공론장에서 논의되는 모든 의견들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림으로서, 공론장은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광장이 아니라 비효율과 억지와 마타도어가 횡행하는 난장판에 불과하다는 심리를 바이러스처럼 전파시킨다. 여기서 득을 보는 것은 전시적( 展示的) 공론장 -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자신의 행위가 칭찬받아야 할 타당한 행위라는 주장 혹은 의견들 만이 판치기를 바라는 어떤 A와 B들일 것이다.                                 

  
2. 
 언론매체의 공공성, 책임성을 지키는 '엄정한 직업윤리' 확립 필요
  이제 화제를 돌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루소와 하버마스 등을 원용한 바넷(Barnett, 1997)은 (민주주의 체제가 미디어에 부과하는 기능은) 정보와 이해,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토론, 시민사회의 여러 결사를 포함한 각종 민주주의제도에 대한 참여, 그리고 대의제에서의 대표와 책임 기능의 활성화 등을 들고 있다’(민주주의와 미디어의 권력화: 이론적 성찰, 조항제/부산대신문방송학과 교수)
 
  미디어, 좁혀서 말하자면 언론매체는 정보제공과 교육기능,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는 대표기능, 국가권력 등 특권적 집단의 권력을 감시하는 감시기능들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A언론매체 든 B언론매체든 이런 기능들 중의 어떤 것들을 반드시 수행한다. 다만 각 언론매체 마다 비판이나 비리 캐기의 비중을 중하게 두느냐, 아니면 정보제공과 교육기능을 중하게 두느냐 하는 선택 혹은 특성은 다양할 수 있다. 
  따라서 통금조치 된 두 개의 언론사가 종단권력에 대해 비판적 정보를 캐내고 이를 대서특필하거나, 종단권력이든 시민사회권력이든 그들이 내보내는 메시지를 다양한 각도(삐딱하게 보는 것을 포함하여)에서 다루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그들 언론매체의 본연의 사명이다.    

  그러나 미디어, 언론매체는 또한 그 자신이 권력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미디어는 ‘아젠다 설정’ 기능을 하며, 생각이나 논리의 ‘틀 짓기’(framing)를 하고, 다중에 전파된다는 점에서 ‘점화’(priming) 효과 등을 발휘한다. 이로 인해 언론은 ‘언론권력’으로서 시민사회의 감시와 견제의 대상이 된다. 입법, 행정, 사법을 권력의 3부라고 한다면, 제4부는 언론이며, 제5부는 시민사회조직이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권력이 어떻게 그 권력을 행사하는가, 그 권력의 수준은 적정한가, 그 권력은 어느 지점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등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비판적으로 편집방향은 어떤지, 같은 사실을 어떤 틀(프레임)에 담아 전달하는지, 어떤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지 않는 경우는 없는지, 언론사의 운영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인지, 기사의 이해당사자나 비판 대상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통로는 열려있는 것인지 등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평범한 생각들을 어렵게 정리하자면 다음의 인용문과 같다.
  ‘미디어는 정치인과 정치 제도에 대한 공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를 부추기며, 정치적 지식을 삽화화시키거나 지식의 수준을 낮추고 정보 부자와 빈자간 격차를 키우며, 사회적 신뢰를 감소시킨다. 특권화된 사적 권력에 대한 용인 또는 공모, 제도 이상의 제도 즉 초-제도로 표현되는 정치와 미디어간 복합체가 형성되는 현상 역시 이러한 병폐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 이 원인의 일단은 미디어가 권력의 행사에 요구되는 책임과 대표성의 기준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언론매체는 공공성, 대표성, 책임성이 요구된다. 
  언론매체가 공공성 등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 행하는 조치의 대표적인 것이 사내 <윤리강령>일 것이다. 또 취재와 기사작성 등의 과정과 절차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어 어떤 행동의 규칙을 전사적으로 공유하는 방법도 일반적이다. 더불어 특권화된 권력과 유착하거나 그것에 의존하는 병폐를 구조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언론사의 소유구조, 운영구조 등을 공공화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프레시안>이라는 언론매체가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것이나 주주독자운동을 하는 것도 그런 일환일 것이다.
  이런 유형의 다양한 조치들은 언론매체가 언론매체로서의 본원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생존해 갈 수 있는 , 이를테면 지속가능한 언론이 되기 위한 불가피한 자구적 노력일 것이다. 

  정성운 주간이 발제문에서 ‘일정한 공적 영역으로서의 언론을 자리매김하면서 공공성을 획득할 때에야 비로소 신뢰받는 언론으로서 위치하게 된다. 언론은 공적 영역인 만큼 편집의 자의성은 배제되어야 하며,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있다. 이는 언론의 존재가치와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어떠한 불이익을 받을지라도 지켜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엄정한 직업윤리이다’ 라고 언급한 대목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맺으며 
  이제 넓게는 불교계 공론장, 좁게는 언론이 스스로 지속가능한 발전의 틀, 즉 드넓은 생태계를 형성하기 위한 좀 더 세부적인 의논으로 한 걸음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를 위해 먼저 언론매체와 시민사회가 함께 매우 진지하게 언론의 공공성과 대표성, 책임성을 어떻게 구현해 갈 것인가를 숙고하는 일을 시작하기를 희망해본다. 그동안 시민사회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조계종의 공론장 궤멸 조치에 대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조치라고 수차에 걸쳐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말을 해온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물론 불교언론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안들도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인 기조가 그러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조계종의 언론탄압에 대한 지금까지와 같은 대응은, 그런 조치를 취한 A나 B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 아닐까? 공론장(과 언론)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냉소, 편 가르기가  더욱 공고하게 고착되고, 공론장이 무시되며, 숙의와 의사소통적인 ‘민주주의’가 고사하였을 때, 판치는 것은 특권적 권력과 그들의 과시적 홍보전단 뿐이지 않을까?   

윤남진 (편집위원)
1993년 첫 사회생활을 불교시민사회단체에서 시작한 이래 이쪽 바닥을 벗어나본 적 없이 20여년을 보냈습니다.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하여 공부하며 책 쓰며 은거하고자 준비하던 중, 이제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으로 신대승의 창립에 함께 했습니다.
현직 : NGO리서치 소장, 불교사회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조계종 신도교재편찬위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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