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양사회사상적 사회변동이론 試論 - 인간적·사회적 마음 구성체의 변동을 중심으로 -

학문/교육 - 유승무 (중앙승가대 교수) | 2021. 제30

3. 마음 구성체의 연기법적 관찰

 

사회를 시간적 차원에서 관찰할 때 발견되는 현상인 사회변동은 사회질서의 문제만큼이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핵심 연구대상이다. 그러나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불변의 진리 때문에 사회변동은 최소한의 고정성도 거부하는 자기부정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회변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설득력이 높은 하나의 방법은 시간의 자연사적 흐름을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특정한 단위로 고정함으로써 그 전후의 인과적 차이를 비교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 비교의 방법은 절대적인 무엇을 궁극적 원인으로 전제하고 다양한 변이들을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해석하는 방법과 현상의 다양성을 개개의 원인에 의한 차이로 설명하는 방법으로 나누어진다.

전자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창조론이다. 창조론은 창조주를 설정하고 모든 사회현상을 궁극적으로는 창조주에서 파생된 현상으로 관찰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창조론은 신학적 차원에서는 매우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보면 역사적 사회의 다양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진화론이 등장한 이후 창조론은 과학적으로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14).

후자의 전형적인 사례로는 사회변동을 인간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차이로 설명하는 사회변동이론을 들 수 있다. 맥클러랜드(D. McClelland)성취에 대한, 즉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 의해 일을 추진하며, ... 높은 성취 욕구를 가진 사회는 보다 정력적인 기업가들을 산출할 것이며, 이들이 다시 보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산출한”(라우어, 1992: 133 )’라고 주장함으로써 성취지향적 퍼스낼리티(동기)를 사회변동의 추진 동력으로 간주한다. 하겐(E. E. Hagen)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사회변동은 퍼스낼리티의 변동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퍼스낼리티의 구성요소를 욕구, 가치, 세계관의 인지적 요소, 지능, 에너지 수준 등으로 기술하고, 전통사회나 전체주의 사회의 권위적 위계질서에 부응하는 권위주의적 퍼스낼리티보다는 혁신적인 퍼스낼리티가 창조적 행동을 촉진함으로써 사회변동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라우어, 1992: 127-129). 그런데 이러한 사회심리학적 이론들은 심리 혹은 내 마음이 사회적 현상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맥락에 따른 차이를 사상하거나 사전에 배제해 버리는 한계를 보인다.

<그림 1>의 모형에 비추어 볼 경우, 이러한 비교의 방법은 개임의 심리나 내 마음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고기관이나 행동 기관에도 관심을 가지지만 언어학적 관심이 없어서 사회적 관계의 소통 차원을 경시하게 된다. 또한, 사회의 구동기관들(정책이나 사회운동, 매스미디어, 연구활동이나 학문) 등의 요인을 변동이론에 포함하지 못하는 한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상의 방법들은 마치 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다양한 사회현상을 특정한 원인으로 환원하여 설명함으로써 역사적 사회의 다양성을 동일한 기준으로 산뜻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역사적 해석의 다른 가능성을 선결정 방식으로 재단해버리는 단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인위적 시간 구분보다는 자연사적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특정한 실체의 변화를 그들의 환경 변화와 연동하여 설명하는 진화론적 시각에 따라 사회변동을 관찰하는 사회변동이론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15). 예컨대 맑스는 사회변동의 과학적 설명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자신의 기념비적 저서인 자본론을 찰스 다윈에게 헌정할 정도로 진화론적 시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루만은 사회적 체계의 변동과 그 과정을 환경과의 연동 속에서 진화론적 개념 도구를 사용해 설명하고 있다. 진화론적 사회변동이론은 사회적 환경, 사회적 맥락, 사회적 조건 등을 사회변동의 주요 요소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변동이론들을 극복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이러한 판단을 토대로 사회이론적 심급에서 볼 때 가장 큰 설득력을 내장한 사회변동이론, 즉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루만의 체계이론적 진화론을 관찰방법의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대체하는 동시에 독일 관념론과 결별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운동의 관찰형식인 변증법은 헤겔의 지적 유산으로 그대로 계승된다. 역사(혹은 사회의 운동)를 관찰하는 맑스의 관찰형식이 이른바 유물변증법으로 귀결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은 맑스가 유물변증법적 관찰형식으로 사회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는 전형(典型)에 해당하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문의 일부이다. 

 

내가 도달한 일반적인 결론, 그리고 일단 얻어진 뒤에는 내 연구의 지침이 된 결론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식으로 만들 수 있다. 생존수단의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인간은 자신들의 의지에서 독립되어 있는 특정한 필연적 관계,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에 들어선다. 이 생산관계의 총화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진정한 토대를 이루게 된다.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가 그 위에서 발생하며 특정한 형태의 사회의식이 그에 조응한다. 물질적 생존수단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지적 삶의 과정 전체를 규정하는 조건이 된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기존의 생산관계 또는 그 관계의 법률적 표현뿐만 아니라 소유관계와 모순에 빠지는데, 생산력은 그동안 바로 그 관계 속에서 운동해 왔던 것이다. 생산력 발달의 틀이 되었던 바로 그 관계가 거꾸로 생산력을 옥죄는 족쇄로 바뀐다. 그러면 혁명의 시대가 열린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조만간 변형을 겪는다. ... 따라서 인류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하는 셈이다. ... 커다란 윤곽만 보자면, 사회의 경제적 구성체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고대적, 봉건적, 근대 부르주아적으로 발전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부르조아적 생산관계는 사회적 생산과정의 마지막 적대적 형태인데, 여기에서 적대적이라 함은 개인적인 적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삶의 조건들에서 빚어져 나오는 적대를 뜻한다. ... 따라서 이 부르주아적 사회체계와 더불어 인간사회의 전사(前史)도 막을 내리게 된다.”(Fromm, 1961: 17-18에서 재인용, 굵은 글씨는 필자 추가)

 

위의 정식(定式)은 맑스가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회구성체에 적용한 것으로서 인간사회의 운동은 근원적으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과 대립에 의해서 비롯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를 다시 사회적인 것(구체적으로는 계급관계)의 차원에서 조명하면 자연발생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억제하는 기존의 계급관계를 고수하려는 자본가계급과 이러한 생산관계를 지양하고 변화하는 생산력 수준에 조응하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수립하고자 열망하는 노동자 계급 사이의 적대적인 사회적 관계로 현상한다. 게다가 맑스는 이러한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체계뿐만 아니라 토대와 상부구조(토대로부터 규정되는 모든 것) 사이의 모순을 존재 조건과 의식의 모순 관계로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모순(혹은 역설)의 역사적 탈역설화로 시간적 사건으로서의 역사, 즉 사회적인 구성체의 변혁 가능성과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실천16)을 정당화하고 있다.

문제는 모순의 역설적 결합과 그 필연적 탈역설화, 즉 구조와 과정이 필연적인 역사법칙으로 환원됨에 따라 맑스의 관찰형식이 그 자체로 이념적으로 교조화된다는 데 있다. 물론 맑스의 사회구성체 개념 속에는 이미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상호 길항 관계가 내포되어 있고, 그 속에는 사회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 사이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도 없지 않다17). 하지만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 맑스의 사회구성체 논의에서 모든 사회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의 운동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점이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경제결정론으로 비판받게 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맑스의 유물변증법이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요소적 층위의 물질적인 것 혹은 유물론적 요소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목적(telos)을 지향하는 관찰형식, 즉 변증법의 실체론적 단위 규정과 그 목적론적(규범적) 지향성이 지니는 특성 때문이다. 맑스는 추상 수준에서 인간의 유적(類的) 본성을 실체화하고 구체 수준에서 생산양식에 의한 인간의 소외를 비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을 채택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생산양식의 전복을 통한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목적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들뢰즈는 헤겔의 관념철학을 비롯해 그 이후의 변증법도 보수반동적인 철학으로 평가한다. 들뢰즈 자신의 차이 이론에 비춰볼 때 변증법은 궁극적으로는 동일성(Einheit)으로 종합·귀결되기 때문이다(들뢰즈, 2004). 들뢰즈는 변증법은 둘 이상의 대상-항을 하나의 모순 형식 속에서 뒤섞고, 그 대립물 안에 내재하고 있다고 혹은 그들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보편자로 통일하는 과정인 바, 이렇듯 하나의 형식으로서 변증법은 결국은 다양성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변증법적 모순이란 다양체 공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조성훈, 2010: 50-55에서 재구성). 나아가 그는 차이와 다양성을 긍정하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변증법의 무거운 사고와 부정의 노동을 대체하는 새롭고 공격적이며 고양된 삶의 방식”(박찬국, 2012: 49)이라고 말한다.

루만도 다르지 않다. 그는 정체성과 차이의 차이를 목표로 삼지 않고 정체성과 차이의 정체성(혹은 동일성)을 목표로 삼을 때 변증법에 이른다고 주장한(Luhmann, 1995). 결국 루만에 따르면 변증법은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럴 것으로 추정된 정체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유토피아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하버마스의 소통이론이 현실적으로는 존재 불가능한 규범적 목적의 지향, 즉 합의된 담론이나 숙의민주주의를 선험적으로 전제한다는 루만의 비판이 바로 이 대목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루만의 사회변동이론은 무엇이고, 또 어떤 특성이 있는가? 루만은 자신의 저서 [사회이론입문]의 제3장에서 진화를 논의하면서 자신이 진화론을 선택하는 동시에 창조론과 역사의 단계분할구도(맑시즘을 시사함)를 자신의 논의에서 배제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또한, 역사이론 즉 사회변동이론은 사회유형들의 규정 작업으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체계이론적 수단으로 작업되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이처럼 루만은 자신의 시회변동이론이 체계이론적 진화이론이며, 창조론이나 단계적 역사발전론과는 차별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18)

루만이 진화이론을 채택하여 사회변동을 설명한다는 것은 곧 진화이론의 주요 개념을 설명 도구로 활용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첫째, 변이, 즉 어떤 것이 달라짐과 둘째, 선택 즉 변이된 사태들을 긍정적으로 붙잡거나 부정적으로 붙잡음이 있음, 그리고 셋째, 오늘날 덧붙일 수 있는 것처럼 안정화, 즉 선택이 성공적으로 보전될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인지의 여부가 그 후속의 계속 나타남들 사이의 원칙적인 구별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덕 등을 다윈에게 빚지고 있습니다”(루만, 2015; 265).

 

그런데 루만은 변이, 선택, ()안정화 등의 차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발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목적론적 진화나 인과론적 진화의 논리를 배제하고 있다. 오히려 루만은 계획되지 않은 구조변동을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진화이론적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계획되지 않은 구조변동을 설명하고자 하는 진화이론은 진화의 방향을 전제하고 있는 일체의 진보 모델을 배격하고 그 대신에 파국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루만의 주장이다. 실제로 루만은 사회변동을 분절적 분화, 계층적 분화, 기능적 분화라는 분화유형의 교체로 설명하는데, 바로 이 때 파국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는 다른 분화 유형이 수립되기에 이릅니다. 이 경우에는 체계이론적 용어로는 파국이라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국은 안정화 체계를 다른 체계로 바꾸는 것이나, 안정화 토대를 다른 안정화 토대로 바꾸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루만, 2015; 360). 보다 구체적으로 루만은 파국 혹은 돌발성은 점증적인 증대 효과들, 즉 자원들, 성취들, 혁신들을 갖고 작업하지 않고, 그러나 변혁을 가능케 하는 비약들, 불연속성들, 불균형 상태 등이 있다고 전제하는 이론이 필요하다”(루만, 2015: 36-361)고 말한다. 결국, 루만에 따르면 사회변동은 요소적 차원의 변이에 의해 구조적 차원 즉 환경과 체계 사이의 구조적 연동에서의 불균형, 비약, 불연속 상태가 생겨나면서 체계적 차원에서의 파국과 대체가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때문에 루만의 체계이론적 사회변동이론에는 요소적 차원, 구조적 차원, 체계적 차원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설명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이는 루만의 체계이론적 진화이론은 환경으로서 인간적 요인이나, 환경과 사회적 체계의 사이 즉 인간과 사회의 사이에 존재한 교집합 영역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고 궁극적으로는 체계만의 파국적 변화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게다가 체계는 오로지 자기준거적 자기생산을 통해 작동한다는 루만의 주장까지 더하면 그의 사회변동이론은 결국 체계의 내적 작동과 체계 자체의 대체를 종합한 체계론적 진화이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종합적인 논의를 시도해 보자. 우선 사회적인 것에 대한 맑스의 관찰형식은 생산력 혹은 토대와 그 외부, 즉 생산관계나 의식을 포함한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에 방점이 있는 반면에, 루만의 관찰형식은 환경과 체계의 관계를 이중의 우연성 개념으로 설정하고 변이, 선택, 재안정화 과정을 체계 내부의 소통(혹은 작동적 구성)으로 수렴하여 처리하는 바, 자기준거적 자기재생산(autopoieses) 개념은 이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바로 여기가 연기법의 가능성과 강점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붓다의 관찰형식인 연기법은 중중무진의 요소들 사이의 중()인과적 연기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사건으로 관찰할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연기법은 체계 내부와 외부의 것을 모두 연기적인 것으로 관찰하고, 체계들 사이의 관계도 연기로 관찰할 것으로 요구한다. 이러한 관찰형식의 강점은 그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 포괄하여 설명하는 동시에 결정론을 넘어 변화와 운동 자체를 실재에 부합하도록 포착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적어도 설명의 대상과 범위 면에서 붓다의 관찰형식인 연기법은 맑스와 루만의 그것들을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연기적 관찰은 그 발생 현상을 경계 내부의 자기준거적 작동과 외적 조건의 작동도 함께 고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사건(event)으로서 제사(際事)19)까지도 포착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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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다윈의 진화론을 열렬하게 지지하던 헉슬리와 당시 영국 성공회 주교였던 윌버포스 사이에서 오고 간 가시 돋은 설전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다윈주의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건으로서 1860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있었던 영국과학진흥협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의 모임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윌버포스 주교가 헉슬리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중 어느 쪽의 조상이 원숭이인지 묻자 헉슬리는 거짓말하는 인간보다는 정직한 원숭이가 자신의 할아버지이기를 바란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발언은 통상 신학으로부터 과학의 독립선언으로 간주되고 있다. 

15) 이븐 할둔이나 소로킨 등이 제시하는 순환론적 사회변동이론도 자연사적 시간을 전제하고, 생노병사나 성주괴공처럼 사회변동을 내적 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생존의 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사회변동의 단계들이 언제, 어떤 요인들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어 여기에서는 논의에서 배제하였다.

16) 프롬(2007), 이진경(2014) 등을 참고할 수 있다.

17)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의 서두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하지만 자기 생각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환경 하에서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는, 주어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환경 하에서 만드는 것이다.” 이 인용문은 고쿠분 고이치로(2019)에서 재인용한 것인데, 그는 이를 중동태로 해석한다.

18) 루만은 나는 우리가 체계이론과 같은 추상성을 가진 일반적인 진화이론에서 출발할 것을 제안합니다라고 적고 있다(루만, 2015; 264).

19)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일찍이 하이데거는 이러한 제사들이 실체론적 관점이나 이분법적 틀에서는 배제되어 왔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복원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동규(2009)를 참고하기 바란다.



유승무 (중앙승가대 교수)
신대승네트워크 <트렌드&리서치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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