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색인 농민은 시간과 재능을 바쳐서 지역 사회의 땅을 일구고 있습니다.
했지요.
과연 지구에 날 위한 자리가 있을지 회의가 들더군요. 여름 아르바이트는 엄청난 힐링을 선사하기보다는, 도시의 청소년들에게 먹거리를 손수 기르게 하고 리더십 기술을 익히게 하려는 취지의 프로그램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땅이 저에게 마법을 걸었죠. 첫째 날, 제가 맡은 역할은 고수 잎을 수확하는 일이었어요. 이 강렬한 식물과의 교감은 난생처음이었는데, 고수 잎의 향기는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손가락 주름에 남아 있다가 그날 밤 꿈에도 스며들었고, 심지어 다음날에도 저에게 손짓을 했어요. 이어진 8주간의 농장일은 제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일깨워 주었답니다.
저에게는 농사가 치유의 경험이었지만, 아프리카계 혈통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는 역사적 상처와 트라우마를 후벼 파는 일입니다. 소울 파이어 농장에 온 흑인 방문객에게 ‘농사’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물어보면, 한결같이 ‘노예’라든지 ‘플랜테이션’이라고 대답하거든요. 그 이유에 대해 산코파 커뮤니티 농장의 공동 책임자인 크리스 볼든 뉴섬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밭은 범죄의 현장이었으니까요.” 수백 년간 지속한 노예의 역사는 땅과의 신성한 연결을 끊어 놨고,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위대하고 독자적인 우리 농업의 역사를 암흑에 빠뜨렸습니다.
온갖 사회적 폭력이 흑인 농부들을 덮쳤습니다. 가구당 40에이커의 토지와 노새 한 마리를 주겠다는 거짓 약속, 흑인 지주를 향한 린치, 정부의 노골적인 차별 정책, 상속인의 부당한 자산 착취 같은 일이 빈번했지요. 그 결과 1910년에 14퍼센트였던 미국의 흑인 농부 숫자는 오늘날 2퍼센트 이하로 급감하게 됐습니다. 즉 1200만에이커 이상의 땅을 잃었다는 뜻이죠.
우리는 조상이 땅 위에서 겪은 공포를 땅 자체와 혼동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애꿎은 땅에 박해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포장도로 위를 달려가기 바빴던 겁니다. 몸을 굽혀 밭일을 하거나, 땀을 흘리거나, 추수하거나, 흙을 묻히는 것도 피했지요. 그랬다간 속박의 굴레로 다시 굴러떨어질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무엇인가 결핍했음을, 한때는 연결되었다고 느꼈으나 지금은 간극이 생겨 버렸음을 뚜렷이 감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흑인 세대는 농업으로 ‘귀환하는 세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조부모님은 조지아 주의 붉은 흙을 등졌지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땅과 화해하고 손을 잡으려 하기 시작했죠.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자유로도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거든요.
개인적인 차원에서 놓고 보자면, 아이들에게 신선한 음식을 먹게 하려고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 애쓰더라도, 영양가가 풍부한 음식에 접근하는 길은 구조적인 장애물에 가로막혔다는 뜻이었습니다. 구멍가게에는 감자칩과 탄산음료만 즐비했죠. 가까운 식료품점에 가려고 해도 차나 택시를 타야 했고, 그런다 한들 시든 채소를 바가지 씌운 가격에 살 수밖에 없었죠. 텃밭을 가꿀 수 있는 마땅한 부지도 없었어요. 저희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역 사회 지원 농업(CSA)에 가입했습니다. 갓난아이와 걸음마 뗀 아이를 배낭과 유모차에 태워 2마일 이상을 걸어갔지요. 형편에 개의치 않고 채소를 최대한 잔뜩 사서, 곤히 잠든 아이의 유모차 위에 수북이 쌓은 채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사우스엔드 이웃들은 요나와 제가 둘 다 매사추세츠 바레의 매니 핸즈 유기농 농장(Many Hands Organic Farm), 캘리포니아의 코벨로의 리브 파워 커뮤니티 농장(Live Power Community Farm)에서 다년간 일했다는 것을 알고, 지역 사회를 먹여 살릴 농장을 만들 계획이 없느냐고 묻더군요.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죠. 저는 공립학교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과학 교사에다, 요나는 생태건축 사업을 하고 있었고, 둘 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눈코 뜰 새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웃과 땅에 대한 사랑은 뿌리가 깊었고, 정의를 향한 열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얼마 되지 않는 저축을 터는 건 물론, 가족과 친구들에게 손을 벌리고, 매년 제 교사 연봉의 40퍼센트까지 끌어왔습니다. 뉴욕 주 그래프턴에 위치한 80에이커의 토지는 노른자 땅이 아니라 1에이커당 2천 달러 남짓이었는데, 그 정도는 저희 선에서 감당할 만했지요. 하지만 필수적인 시설, 가령 전기, 정화조, 수도, 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3배나 되는 비용이 필요했어요. 수많은 후원자와 봉사자의 쇄도하는 도움의 손길로, 4년간 제반 시설을 짓고 기반을 다진 끝에, 마침내 소울 파이어 농장을 열었습니다. 먹거리 시스템 안에 만연한 인종차별과 불평등을 종식하고, 생명력이 깃든 음식을 지역 사회에 제공하며, 다음 세대의 흑인 및 유색인 농부에게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겁니다.
관련 문헌을 뒤지면서 저는 ‘유기 농업’이 천 년도 전에 아프리카에서 유래했으며, 조지 워싱턴 카버라는 흑인 농부가 1900년대 초 터스키기 대학의 교수던 시절에, 미국에서 처음 쓰이기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버는 방대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를테면 질소를 고정하는 콩과 작물과의 윤작을 성문화한다거나 토양 생태계를 재생하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고안한 재생 농업은 남부의 많은 농부로 하여금 단일 경작에서 탈피해서 다각화된 원예 영농으로 옮겨가도록 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지요.
또 다른 터스키기 대학 교수였던 부커 T. 와틀리도 지역 사회 지원 농업을 고안했는데, 그는 이를 ‘주문 회원제 클럽’이라고 불렀습니다. 소비자가 직접 농장을 방문해서 원하는 농작물을 고르게 하는 방식을 적극 주창해서, 일 년 내내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는 환경을 조성했고, 회원들이 시중 슈퍼마켓 대비 40퍼센트의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 토지 신탁은 조지아 주에서 깃발을 든 새 공동체 운동에 힘입어, 1969년 흑인 농부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흑인 농부들은 협동조합이 조합원에게 집, 농장 설비, 장학금, 대출 같은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고, 구조적인 변화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최초의 사람들이었어요. 1886에 발족한 전국 흑인 농민 동맹 및 협동조합(Colored Farmers National Alliance and Cooperative Union)과 1969년에 설립된 파니 루 해머의 자유 농장 협동조합(Freedom Farms Cooperative)은 협동조합 운동에서 흑인의 리더십을 보여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무엇보다도 울림이 컸던 건 서아프리카에 살던 우리 윗세대 할머니들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노예선에 강제로 타기 전에 수수, 오크라, 동부콩, 흑미, 에구시 멜론의 종자들을 머리카락 속에 땋아서 가져왔다는 이야기였어요. 후손인 우리가 그 어떤 혹독한 제약 속에서도 살아남아 씨앗을 물려받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혹독한 장애물을 맞닥뜨리더라도, 조상들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두고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씨앗들을 모으고 심어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차례네요.
가나의 크로보족 언어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Late ete no no da’. 불에 올린 냄비의 균형을 맞추려면 돌멩이가 세 개 필요하다는 뜻이죠. 이 지혜를 참고하여, 저희는 농장 운영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세 개의 기둥을 세웠어요. 재생하기, 기반 갖추기, 조직하기지요.
저희는 아프리카 고유의 임농업, 실보페스춰, 야생 약초 재배, 다종재배, 생태 농업의 방식으로 80에이커에 달하는 산비탈을 되살려서 과일을 재배하고, 약초를 심고, 가축을 방목하여 기르고, 꿀, 버섯, 채소, 저장 식품을 얻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수확물은 식품 아파르트헤이트로 곤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제공되지요. 전통적인 농법은 표층을 보존하고, 토양 속 탄소를 격리할뿐더러 생물 다양성을 높여주는 이점이 있습니다. 농장 안 건축물은 주변에서 구한 목재와 어도비 점토, 스트로베일, 태양열, 재활용 자재를 이용해서 손수 지은 거예요.
또한 매년 수백 명의 성인 및 청소년이 각자 지역 사회로 돌아가 농부와 조직가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의 장을 마련합니다. 그리하여 지구와의 관계를 치유하고, 용감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말이죠. 저희가 땅이라는 도구로 인종차별의 트라우마를 회복하기 위하여 집중하는 지점은 농장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사람의 비율 중 유색인은 한줌도 안 되는 지금의 판을 뒤집어서, 먹거리 정의 운동에서 활약하는 유색인의 비중을 높이는 겁니다. 졸업생들은 졸업 이후에도 멘토 상담을 통해 계속해서 자원, 토지, 교육을 제공받고, 먹거리 시스템 안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도록 강연자 단체에도 초대되지요.
저희는 어느 인종도 배제하지 않는 정의로운 먹거리 시스템을 만들고자 대중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먹거리 정의 네트워크들과도 협력하여 국가 배상금을 올리고, 행동 플랫폼을 개설하고, 농부의 생존과 존엄을 보장하라는 캠페인도 진행하고요.
해마다 저희는 컨퍼런스에서 발언하고, 신문에 기고하고, 책을 내고, 먹거리 시스템 안의 인종차별을 허물고, 지역 사회의 먹거리 자립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을 나누는 워크숍을 열어서, 많은 이에게 변화의 힘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소소한 호응이 돌아왔습니다. 저희 목소리는 전국 각지를 향하기 때문에 몇몇 프로그램은 대기자 명단이 2,3년씩 길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땅으로 돌아오려는 ‘흑인, 원주민, 유색인(BIPOC)’ 농부들의 열정이 그만큼 엄청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저희는 몸집을 불리기보다는 외연을 확장하는 모델을 추구하고자, 비슷한 프로그램을 다른 지역에도 만들거나 늘리도록 매년 여러 명을 교육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좋은 사례로, 우리 졸업생들이 만든 일리노이 주 시카고의 카타툼보 협동농장, 뉴욕 주 밀러턴의 와일드시드 커뮤니티 농장 겸 치유 마을, 조지아 주 그레이슨의 하이 호그 농장과 우분투 프로그램이 있지요.
2002년만 해도 미국 농지의 98퍼센트는 백인이 운영하는, 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역사이지요. 미국은 원주민을 내쫓은 땅과 유색인에게서 빼앗은 토지라는 토대 위에 건국한 나라이니까요. 남부 협동조합 연합의 랠프 페이지 말을 빌자면, “이 나라의 진정한 자산은 오직 땅뿐이니, 한 뼘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배제될 것이다.”
2017년부터 북동부 지역의 소울 파이어 농장 졸업생과 다른 유색인 농부들은 겨우내 포트락 모임을 열고 슬슬 교류의 물꼬를 터서, 시골 생활의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서로 도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작은 흐름들은 북동부 유색인 농부 토지 신탁(NEFOC)이라는 보다 큰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토지 관리인의 거주권 문제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NEFOC의 현재 회원 수는 250명에 달하고, 소울 파이어 농장 교육기관에서 인큐베이팅 과정을 거친 뒤 재정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NEFOC는 조직을 키워가는 초기 단계로서, 이사회 구성, 자금 조달, 비영리단체 등록, 전략 수립, 거버넌스, 현행 토지 신탁을 통한 네트워크 구축, 원주민 상담에 초점을 맞춥니다. 땅과 관련된 일인 이상 그곳에 거주하는 원주민의 동의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NEFOC는 적어도 10개 이상의 원주민 자치 정부와 신뢰 관계를 쌓으며 이 원칙을 지키려고 하지요. 조직의 기반을 닦는 한편, 자본과 토지가 필요한 유색인 농부들에게 배상금을 안내하여, 그들이 재산을 확보하는 데 다리를 놓기도 합니다. 여태껏 30명 넘는 농부에게 농장과 토지 마련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지요. 2020년이 가기 전에는 토지 신탁이 닻을 올려서, 2021년 초에는 첫 신탁 증서의 이전과 지역권 취득이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어요.
땅으로 돌아가는 일은 물리적인 이전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땅과의 고유한 관계를 회복하여, 우리를 억압하던 식민지적 방식을 따라하지 않는 일이지요. 땅이 주는 고귀하고 존엄한 유산과 선조의 지혜를 되살리고, 땅을 해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조상들이 해왔듯, 공동체를 위하는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땅과 새롭게 관계 맺는 일을 뜻합니다.
우리 모두 흙과 씨앗과 맺은 관계를 치유할 수 있기를, 책임에 바탕을 둔 사랑으로 서로의 관계를 치유할 수 있기를, 이 병과 아픔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부디 진심으로 바랍니다. 신성한 힘에게 기도를 드리며.
북미 서부 절바의 지역에서 산불은 진작부터 큰 근심거리인데, 기후 변화가 심해지면서 더 많은 지역에서 산불 위협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시골 지역에서, 사용할 물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소방수에게 큰 이점입니다. 저장해둔 빗물은 산불을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삼림을 복원할 때 어떤 식으로든 상당한 양의 나무를 없애야하는데, 보통은 나무더미를 불태우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아주 작은 불씨도 철저하게 제거하는 것이 현명한데, 간절히 피하고 싶은 산불로까지 번지지 않게 하려면 적당히 끄면 안됩니다.
많은 곳에서, 물은 희소한 자원입니다. 도시처럼 인구가 급증하고 수도 시설이 낙후되어 물 공급에 어려움이 있는 곳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평소에는 수도꼭지를 열 때 물이 낭비되는 것을 괘념치 않지만, 빗물통에서 나오는 물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물한방울도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물, 음식, 그리고 집(쉼터)은 생존의 필수 요소입니다. 물이 목록에서 가장 먼저 나온다는 것을 잊지마세요. 빗물을 모으는 것은 지속가능성을 위한 중요한 활동입니다. 이 활동은 물의 순환과 생명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자원을 관리하는데에 우리가 온전히 개입되도록 합니다.
이렇게 시작해 봅시다.
2,000 제곱피트의 지붕에 20인치의 강우 = 24,920 갤론
플라스틱, 금속, 콘크리트 등 다양한 재료의 제품이 있는데,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제품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커다란 빈 통을 먼곳에서 이동하는 것은 경제적이지도 않고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통의 크기가 커질수록, 갤론당 비용은 줄어듭니다. 재활용 플라스틱 드럼통을 이용할 경우, 가급적 화학약품이 아니라 커다란 식품운반용 용기를 사용하세요. 저는 뚜껑을 완전히 열수 있는 드럼통을 좋아하는데, 안으로 들어가 칸막이 설치도 할 수 있고 , 주기적으로 세척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홈통에 낙엽방지망을 그리고 저수 탱크의 입구에 저렴한 싱크 거름망을 설치하였습니다. 싱크 거름망은 찌꺼기들을 대부분 걸러내고 모기와 여러 곤충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줍니다.
만약 저장한 빗물을 음용수로 사용하고 싶으면, 다음을 먼저 고려하세요:
이 장치는 지붕에 쌓인 먼지나 퇴적물이 물 저장고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줍니다.
50 마이크로미터 침전 여과 필터부터 시작하여 0.5마이크로미터 여과 필터까지, 2~4개의 필터를 거쳐 편모충낭을 제거합니다. 활성탄 필터는 다른 오염물질을 제거해 줍니다.
압력 펌프
빗물은 모으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간단할수도 복잡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걱정된다면, 작게 시작하세요. 일단 시작하면, 빗물 모으기의 여러 잇점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살살 흐르는 소리, 콸콸 쏟아지는 소리 등 다양한 물의 소리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물통의 물이 돈통의 돈처럼 느껴질테니까요.
American Rainwater Catchment Systems Association: www.ARC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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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마더어스뉴스5호 - 다섯번째 웹진]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