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사회에서 불교의 위상과 역할

불교/종교 개혁 -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 2016. 제1


시민사회는 시민이 주체가 되어 이루는 사회이다. 
이 시민은 일차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공공성을 기반으로 사적인 삶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정치경제적인 의미가 중심이 된다. 
우리 역사 속에서 시민사회는 4·19와 5·18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실천적 노력과 계기를 통해 정착했고, 그 결과 저항적 성격을 지니는 시민사회로서의 특성을 주로 지니게 되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지속적인 민란과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상징되는 백성 또는 민중들의 자의식 확장과 그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시도가 끊임없이 있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현대 한국의 시민사회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광복 이후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함께 수입된 서구 시민사회론이 그 이론적 기반이 되었고,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동안 현실 속에 시민사회가 뿌리내리는 과정은 독재와의 치열한 투쟁 과정으로 이어져야만 했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이제 외적으로는 물론 내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시민사회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사유재산권의 보장과 민주적인 절차의 확립, 평등의식의 정착 등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런 변화는 산업화의 일정한 성공으로 인한 경제력 규모 확보 등과 연결되면서 20세기 세계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점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이러한 성과는 주로 외형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보다 온전한 시민사회와 시민을 향한 기대와 열망이 갈수록 커져가는 21세기 초반을 우리는 함께 건너고 있는 중이다.

한국 시민사회와 불교의 만남

개화기 이후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사회변혁을 이끈 것은 주로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와 개신교 중심의 그리스도교였다. 일본 침략자들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이끈 주체들이 바로 그종교의 지도자들이었고, 불교의 경우는 용성과 만해 이외의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의 척불정책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한국불교에 일제의 지배는 현실적으로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대처승단을 중심으로 재편된 왜색불교는 비구승들을 소수로 내몰면서 깊은 뿌리를 내렸고, 광복 이후 길고 처절한 ‘정화’의 과정을 감내하는 것으로 그 댓가의 최소한을 치러야만 했다.
만해와 용성, 만공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선학원’의 청정 수행정신을 바탕으로 대처승단에 빼앗긴 절집 뺏어오기로 진행된 정화 과정은 그러나 철저한 개신교도였던 이승만의 유시가 주된 힘으로 작동함으로써, 이후 불교계는 특정 정권과의 유착과 그로 인한 비판정신의 실종이라는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한국현대사의 가장 폭압적인 정권이었던 전두환정권과의 유착과 그것을 이끈 서의현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의심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동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경우라고 해서 특별히 나을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산업화 과정의 민주화 투쟁을 도시산업선교회와 같은 진보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어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정의구현사제단이 중심이 되어 성취한 군사정권의 퇴진이라는 성과와 비교해볼 때 불교의 경우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민중불교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사람들의 저항과 그에 동참했던 일부 스님들의 실천이 그나마 약간의 위안이 되는 정도이다,
한국 시민사회는 이처럼 수입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그 이념이 현실화되는 지난한 저항과 투쟁을 동반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었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이제 최소한 외형적으로뿐만 아니라, 시민의 자유와 권리, 평등 같은 내면적 가치의 영역에서도 일정한 성취를 거두면서 우리 삶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부각된 한국 시민사회의 질적 전환 과제를 제대로 달성해내지 못한 채, 정부 주도의 독재적 경제개발을 여전히 미래 방향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시대착오적인 정권을 만들어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물론 지난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의 국회를 출범시킨 시민적 역량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미래를 무조건 낙관하는 일 또한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 못하기도 하다. 
특히 우리가 유념할 필요가 있는 과제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신적 건강성 문제이다. 
사회를 소통 기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계로 보고자 하는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 시민사회는 소통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거대한 괴물 크기의 그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데 바쁘고, 그 이익 확보라는 기능 말고는 다른 기능을 제대로 설정조차 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데 우리 종교는 부정적인 의미의 적극적 기여를 했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개신교의 영적 전쟁 프레임을 근간으로 삼는 성장지상주의와 불교의 어설픈 모방이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영적 전쟁 프레임을 모든 다른 종교와 비종교인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개신교는 이미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불교 또한 온갖 추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침몰해가고 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정권과의 지속적인 유착과 비판정신의 실종이고, 끝없는 대형 불사(佛事)를 통한 외형적인 성장의 추구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위기 극복을 위한 불교의 역할과 과제

한국 시민사회와 한국 불교는 서로 얽혀있는 연기적 관계망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악화시키기도 하지만, 거꾸로 서로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점에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으면 그 안에서 대안도 찾아낼 수 있다는 불교철학의 핵심 테제를 상기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한 바람직한 미래를 지금 이 순간의 찰나의 미학에 주목하며 모색해볼 수 있다.
한국 시민사회가 직면한 위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차원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의(正義) 같은 가치들의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니클라스 루만이 주목한 기능으로서의 소통의 위기이다. 물론 이 두 위기는 같은 문제의 다른 모습과도 같은 긴밀한 연계성 속에서 존재한다.

시민적 가치들의 위기가 시민사회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외형적 성장과 기능 분화라는 측면에서 세계사적으로 성공한 사례로 평가받는 한국 시민사회는 그 각각의 하위 조직들이 본래적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점점 더 비대해지기만 하는 거대한 교회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맹목적 성장지상주의 외에 다른 것들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내집단 속으로 숨어들면서 배타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본래 무엇을 하는 곳인지 조차 잊어버린 듯한 모습들을 추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끔 그 기능에 대한 인식이 뚜렷한 조직이 보이는 경우에도, 대체로 무조건적 성장을 통한 외형의 확대라는 목표 말고는 다른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위기는 급속하게 진행된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공격적인 선교나 치명적인 원자핵발전소 수출 같은 행태로 그 적용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어디선가 그 고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미세먼지와 핵발전소 파괴, 핵전쟁 같은 인류 종말의 시간을 향해 속도를 높이는 일 말고 우리에게 남은 미래란 없음이 확실한 데도, 그런 문제들에 대한 무감각과 의도적인 회피만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에게 어떤 대안이 남아 있는 것일까?

다행히도 우리 논의의 맥락에 근거해 대안을 모색하고자 할 때 비교적 분명한 방향을 잡아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시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정신적 가치들의 회복과 그것에 근거한 소통 기능의 확보이다. 시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가치들 중에서도 특히 우리는 정의와 연대(連帶)라는 가치를 회복할 필요성과 마주하고 있고, 이 두 가치의 회복 과정 자체가 소통 기능의 확보라는 다른 목표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풍부하게 열려 있다.

한국 시민사회는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의 민주(民主)를 주로 자유민주주의로 해석해내면서 현실 속에 구현하는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다. 우리에게 민주화는 주로 자유민주주의의 정착을 의미했고, 우리는 이 과제를 수많은 희생과 참여를 통해 달성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동시에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로의 급속한 편입과정으로 연결되면서 국민소득증가라는 목표 달성과 함께 의도치 않게 각 시민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상당 부분 상실되거나 훼손되는 결과와 직면해야만 했다. 그것은 곧 공화(共和)의 상실임과 동시에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으로서의 연기성(緣起性) 또는 관계성의 훼손이기도 하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한국 시민사회를 위해 할 수 있고 또 해주어야만 하는 역할은 바로 이러한 시민들 사이의 연기성 또는 관계성 회복이다. 헌법적 가치 중에서 공화정신(共和精神)의 회복임과 동시에 각 시민들의 삶의 의미 물음에 관한 근원적인 답변 제시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승가(僧伽)를 중심으로 제도종교의 개인화 현상 속으로 흡수되면서 이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고, 개신교의 경우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안 관계망 형성을 통해 시민사회 자체의 분열을 조장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러한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망 훼손은 곧바로 다른 시민들, 특히 현대 윤리학자 존 롤즈의 개념인 최소 수혜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방치를 낳음으로써 사회정의라는 가치의 심각한 훼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갈수록 악화되는 빈부격차와 대물림으로 ‘흙수저론’과 ‘헬조선(hell朝鮮)’이라는 상징어를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 한국불교가 우리 시민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 지점에 자리한다. 그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하는 자비의 눈길과 손길을 바탕으로, 사회정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소하는 실천적 통로라는 역할 회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불교가 불교답게 서야 하고, 그 출발점은 사부대중공동체의 온전한 성립과 작동이다.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전주교육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있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현직 : 한국교원대 교수, 신대승네트워크 공동대표,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편집진 편지
카드뉴스

2025년 2월 소모임 활동 소식

- 신대승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