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산(天藏山 140m)과 배봉산(拜峰山 108m)은 도심의 빌딩 사이로 비죽이 고개를 내민 녹지대의 섬처럼 보인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두 산을 자세히 살펴보면, 빌딩 사이로 야트막히 길게 이어진 산줄기의 봉우리임을 알 수 있다. 북한산성의 대동문과 보국문 사이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칼바위능선은 화계사의 주봉을 이루고 수유리 고개를 넘어 ‘북서울 꿈의 숲’이 있는 오패산(123m)을 이룬다. 이 능선은 다시 동남쪽으로 장위동 고개를 넘어 천장산에 이르러 동쪽으로 의릉을 품고 서쪽으로는 경희대 의료원이 들어 선 ‘회묘터’를 감싼다. 다시 뻗어서 회기동 고개인 안화현(安禾峴)을 넘어 청량사가 기대고 있는 바리봉을 지나 떡전고개를 넘어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110m)을 이루고 구 촬영소 뒷산에서 중랑천과 청계천을 만나 그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한다.
천장산은 이 산줄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회기동, 청량리동, 석관동에 걸쳐서 있다. 회기동(回基洞)은 ‘회묘터’에서 유래됐고, 석관동(石串洞)은 천장산의 한 지맥이 돌을 꽂아 놓은 듯이 보여 ‘돌곶이 마을’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옮긴 것이다. 청량리동은 청량사(淸凉寺)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연화사(蓮華寺)의 삼성각 상량문에 “진여불보(眞如佛寶)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시방삼세에 두루 하지만 드러나 보이지 않으므로 절의 뒷산을 천장산이라 부른다”고 하였듯이 천장산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의 명당 터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천장산 일대는 조선 왕족의 묘지가 많이 조성되었다. 경종(景宗)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쌍릉(雙陵)인 의릉(懿陵)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묘도 이곳에 조성하였는데 훗날 연산군이 왕릉의 규모를 갖추고 회릉(懷陵)으로 격상시켰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이후 연산군의 왕비였던 신씨의 묘까지 이곳에 조성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이장되어 ‘회묘 터’라는 한자 이름만 전해오는데 그것도 ‘회묘 터(懷基)’가 아니라 ‘돌아온 터(回基)’로 바뀌어 동네 이름으로 남아 있다. 또한 주변에는 천안 전씨(天安 全氏)의 시조인 전섭(全聶)을 향사한 제단이 남아 있는데 1925년에 의친왕 이강(李堈)이 전씨 종가의 세 공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전섭은 온조왕이 처음 백제를 세울 때 공을 세운 십제공신(十濟功臣) 중 한 명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으며 천안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천안 삼태리에 단소(壇所)가 있다.
의릉(懿陵)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앞뒤로 배치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으로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여주의 영릉(寧陵)이 같은 구조이며, 이때 왕은 위쪽, 왕비는 아래쪽에 모시게 된다. 능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으며 난간 석주에는 12지를 넣어 방위를 표시하였다. 위쪽에 놓인 왕의 능에만 곡장(曲墻)을 두르고 있는데 이것은 부부의 예로서 한 곡장 안에 두 봉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경종은 숙종(肅宗)의 장남으로 계비인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에게는 희빈 장씨 외에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가 있었으나 이들에게는 후사를 이어줄 아들이 없었다. 경종은 태어난 지 두 달여 만에 원자로 봉해지면서 당쟁이 격화되었는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기에 후궁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펴다가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사건으로 서인은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며 경종은 3세의 나이로 다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런데 경종의 나이 14세 때,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하기 위해 취선당 서쪽에 마련해놓은 신당이 발각되어 ‘무고의 옥’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경종을 만나면서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기절시키는 이해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게 된다. 이 때문인지 경종은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임금이 된 후에도 병치레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후사 또한 없어 즉위년(1720)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이로 인해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어 신축, 임인옥사가 일어났다. 경종은 1724년(경종 4)에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니 춘추 37세였고 재위 4년이었다.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718년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 심씨가 병으로 죽자 같은 해 15세로 세자빈으로 책봉 되었다가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으나 소생 없이 26세에 승하하였다.
의릉은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가 자리 잡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 되기도 하였다. 능 주변에 중앙정보부의 축구장을 만드는 바람에 많이 훼손되었으나 ‘중앙정보부’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곡동 대모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다시 원상 복구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 왔다. 한쪽 귀퉁이에 그 당시 중앙정보부 강당 건물을 보존하고 있다. 홍릉(洪陵)은 원래 고종 비(高宗妃)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으로 1895년 시해(弑害) 당한 후 일제의 간섭으로 능을 조성하지 못하고 있다가 1897년에 비로소 이곳에 모셔 홍릉이라 하였다. 고종이 승하한 1919년 금곡으로 이장해 고종과 합장하였으며 순종(純宗)과 그의 비 순명황후(純明孝皇后) 그리고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능인 유릉(裕陵)이 그곳에 들어서면서 지금은 홍유릉(洪裕陵)이라 부르고 있다.
명성황후는 개국정책을 주도하는 등 왕실정치에 간여하며 대원군의 친명, 친일정책 등에 반대하고 정치의 실권을 잡기 위하여 정쟁을 벌이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충주, 장호원 등으로 피신하였다가 후에 청나라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밀어내고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민씨 일파가 실각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1894년 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자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다가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고로가 보낸 자객에 의하여 건청궁 곤녕각 옥호루에서 시해당하였다.
이후 명성황후는 일제의 사주로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복호(復號)되어 1897년 명성(明成)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그해 11월 국장을 치른 후 25년간 이 곳에 묻혔다. 홍릉이라 불리며 관리되어 오다가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남양주 금곡으로 천장(遷葬)하여 고종과 합장하였으며 지금은 홍릉 수목원 안에 능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남아있다. 홍릉 터 남쪽에는 고종의 계비 엄비의 묘소가 있는 영휘원과 영친왕의 맏아들 진의 묘소인 숭인원이 있다. 영휘원 북쪽으로는 세종대왕기념관이 있으며 홍릉 터 나머지에는 1960년대부터 과학연구기관이 들어섰는데, 한국 유일의 식물표본지구인 임업연구원을 비롯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있다.
영휘원(永徽園)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친(私親)인 순헌 귀비 엄씨의 원소(園所)이다. 엄귀비는 1854년 11월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 민씨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시며 후궁(後宮)이 되어 1897년 영친왕 이은을 출산하여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1901년 비(妃)에 진봉되고, 1903년에는 황비(皇妃)에 책봉되었다.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 여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1년 7월에 사망하자 8월에 안장하고 원호(園號)를 영휘라고 하였으며, 위패는 덕수궁 영복당(永福堂)에 봉안되었다가 칠궁(七宮)으로 이안(移安) 하였다.
숭인원(崇仁園)은 영친왕과 이방자(李方子)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원손(元孫) 이진(李晉)의 원소(園所)이다. 진은 1921년 8월에 태어나 그 이듬해 5월에 1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었다.
두 원의 묘역시설로는 곡장(曲牆), 상설(象設),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ㆍ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홍살문(紅箭門),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제실(祭室), 우물(靈泉), 사초지(莎草地)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북쪽 언덕에 자리 잡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관 마당에는 구영릉(舊英陵, 內谷洞)에서 수습해온 세종대왕신도비(神道碑)와 능호석(陵護石)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연화사(蓮華寺)는 1499년(연산군 5)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다.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연화사삼성각상량문>에 따르면,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여서 연화사라 하기도 하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으므로 연화사(蓮花寺)라 했다고 한다. 1504년(연산군 10)에 윤씨의 회묘(懷墓)를 회릉(懷陵)으로 승격시켜 석물을 조성하였고, 1724년 경종이 죽자 그 이듬해에 회릉 근처에 의릉(懿陵)을 만들고 연화사를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회릉은 1969년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장하였다.
청량사(淸凉寺)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1117년(고려 예종 12) 예종이 불교 거사(居士)였던 이자현(李資賢)을 불러 이 절에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에 있었는데, 1897년 홍릉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만해선사가 잠시 머물렀다. 같은 시기에 불교계 학자인 박한영(朴漢永)스님도 이 절에서 기거했으며 극락전(極樂殿)의 현판과 주련(柱聯)은 모두 박한영(朴漢永) 스님의 글씨이다.
떡전고개는 서울시립대학교가 있는 전농동에서 청량리 정신병원이 있는 청량리 쪽으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예전에는 이 부근에 떡을 만들어 파는 떡집이 많아 사람들이 그곳을 떡점(餠店)거리, 또는 떡전고개라 불렀다. 떡전고개는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경기북부, 강원도, 그리고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올 때 도성(都城)에서 약 시오리 거리에 있는 이곳에서 허기도 달래고 옷매무새도 고치면서 잠시 쉬었다 가거나 하루 밤을 묵어가기도 했던 곳이다.
배봉산(拜峰山) 자락에는 영우원((永祐園)과 휘경원(徽慶園) 터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영우원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이며,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 박씨의 묘소이다. 배봉산의 이름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정조가 날마다 부친의 묘소를 향해 배례하게 되면서 산 이름을 ‘배봉산‘으로 불렸다는 설과, 이곳 산기슭에 영우원과 휘경원 등 왕실의 묘원이 마련되면서 길손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기 때문에 배봉(拜峰)으로 불렸다는 설과, 산의 형상이 도성(都城)을 향하여 절하는 형세를 띄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영우원((永祐園)은 원래는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나 정조가 임금에 오르고 영우원이라 고쳐 부르다가 1789년(정조 13)에 화성(華城)으로 이장한 후에는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99년(광무 3)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追尊)되면서 ‘융릉(隆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휘경원(徽慶園)은 1855년(철종 6)에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을 천장(遷葬)하면서 같은 진접읍의 내각리(內閣里)에 있는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순강원(順康園) 옆으로 옮겼다가 풍수지리상 적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시 진접읍의 부평리로 이장하였다. 위패는 칠궁 안에 있는 경우궁(景祐宮)에 봉안되었다. 현재 휘경원 터는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고 휘경동이라는 지명으로만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