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8화> ‘베트남 전투적 불교 군기지 장악하다’ 제2편 -2

세계/아시아 -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 2017. 제12

 

 헌법 기안위 시민대표 대폭 포함, “과격 불교도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티장군이 해임되자마자 즉각 시위를 조직한 건 앞서 언급한 1군 지역 군&민 합동 투쟁그룹(Military and Civilian struggle Group of 1 Corps)이다. 후에(Hue)에서는 혁명을 위한 대중 투쟁 위원회의 소리’(The Voice of the Popular Force Struggle for the Revolution)라는 라디오 방송이 시위대를 끝없이 북돋았다. 이름도 생소한 아주 다양한 그룹들이 반정부 시위에 쏟아져 나왔다. “시클로 운전자 대표단도 있었고, “마켓 세일즈 소녀들이라는 여성 노동자 그룹도 있었다. ‘구국위원회’(National Salvation Councils, NSC)이라는 좌파성향의 조직도 참여했다. 196641일자 CIA 정세분석 보고서에는 이 구국위원회’(NSC)베트공이 침투했다는 아주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적혀 있다. , 314일에서 23일까지 상황을 종합한 CIA의 인텔리전스 보고서베트공 다낭 시위원회가 다낭 해방학생협회’(Danang Liberation Students Association)에 시위 최전선에 나서서 현 소요사태를 적극 활용하라는 지령을 담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어떤 구호를 외쳐야 하는지 구호 샘플까지 베트공’(민족해방전선)이 지시했다고 적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독재 타도

 “제국주의 동맹 타도

 “베트남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원한다

 “미제국주의자들을 해체시키자. 베트남 배신자들, 티우(대통령) (총리) 종속된 무리들도 해체시키다

 

 사실 티장군 해임은 기폭제였을 뿐 1군 지역에서는 이미 군정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중이었다. 1군 지역에서는 공산게릴라들과 싸움을 멈추고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견해가 민간은 물론 군내부에서도 꽤 공감대를 얻고 있었다는 분석이다. , 3(3 Corps) 지역 수도 사이공과 달리 자신들이 최전선을 지키고 있음에도 사이공 엘리트들이 누리는 대우를 동등하게 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일종의 지역적 박탈감도 적잖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으로 말하면, 사이공 정부와 미군 입장에서는 티장군 관할 1군 지역이 친공산주의적이고 사이공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며 그들 나름의 불만이 쌓여있었다.

 

 한편, ‘불교도 반군의 요구는 312일부터 단계적으로 상승했다. 티사령관 복직을 넘어 반정부 메시지가 고조됐고, 반전 메시지까지 부가됐다. 또한 성당과 가톨릭 신자들의 가옥을 공격하는 등 커뮤널 폭력’(Communal violence, 종교 종파간 갈등을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목격됐다. 이를 진압하는 군경을 향해서는 수류탄도 날아갔다. 폭력적 소요사태가 가속화되는 동안 불교도 진영에선 정치세력 확장 노력도 진행됐는데 3월 말이래 틱 찌 꽝 승려가 응우옌 반 만 (Dr. Nguyen Van Man) 다낭 시장과 정치적 동맹을 맺은 건 그 좋은 예다. 응우옌 반 만 시장은 군정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반군과 불교도가 결합한 범 반정부진영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 즈음 키정부를 지지했던 군인들은 이미 군기지에서도 쫓겨난 후였다. 1966326일을 기점으로 투쟁운동세력은 군사시설을 포함한 다낭을 접수하고 꽝남지방(Quang Nam)불교도 자치구로 선포했다후에에서도 세력 확장 노력이 계속됐다. 328일 반군이 이미 장악한 시 라디오국은 이 지역 군인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1군 지역 불교도 보안군들은 투쟁운동(반군)을 진압하라는 정부의 어떠한 명령이나 노력에도 응하지 말기를 바란다. 당신들은 그러한 명령에 저항해야 한다.”

 

 이 시기 1군 지역 전반의 군 기능은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요 사태는 이남 사이공으로도 번져나갔다. 이런  소요사태 확산에 대해 미국은 다시 틱 찌 꽝의 역할을 주목했다. 196641일 정보 보고서를 보자.

 

 “1군 지역 반정부 시위대가 내거는 주제, 타이밍으로 보건대 이들 배후에는 분명 불교 지도자인 틱 찌 꽝 승려와 그 진영 고참 승려들이 있다. 틱 찌 꽝 승려가 키정부, 미대사관 관계자와 나눈 각각의 대화록을 보면 틱 찌 꽝 승려는 시위를 고조시킬 수도 무마시킬 수도 있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 일요일 (327) 후에에서 2만 불교도 행진을 이끈 것도 틱 찌 꽝 승려였다.”

 

 “후에의 2만 불교도 행진이란 건 그 며칠 전 미해병대가 반미 푯말을 제거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반미 기운과 시위를 더욱 고조시키면서 나온 시위였다. 이 시기 반정부 방송이 내보내는 강도 높은 성명은 1군 지역 불교성직자들명의로 발표되기도 했다. 성명의 대표 사인자는 틱 존 하우(Thich Don Hau) 승려, 그는 틱 찌 꽝 승려 최측근 인물이다.

 

 격동의 시간동안 사소해 보이는 사건도 쉽사리 분노로 점화됐다. 32829일 이틀 동안 잠시 소강상태였다가 30일 다시 반미감정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에와 다낭에서 운송 노동자들이 파업중이었는데 다낭에서 미군 차량이 시위 차량 400대중 하나에 살짝 접촉사고를 낸 게 소요사태를 재점화시킬 정도였다. CIA와 국방정보국(DIA) 미국무성 정보 및 리서치 국’ (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 혹은 ‘INR’) 3 주체가 공동으로 취합 발표하는 주간 보고서 3월 마지막 주 발행본에는 항쟁이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총리)-티우(대통령) 도당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반미 감정도 고조되고 있다. 정부가 제안한 협상안 즉, 헌법기안위원회에 시민의 대표를 대폭 포함시키겠다는 안이 지금 과격 불교도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중략) 소요사태의 중심지는 제1군 지역이다. 특히 틱 찌 꽝 승려를 추종하는 과격한 불교도들이다. 1군에서 쫓겨난 티사령관 측근 기회주의자 정치인들도 눈에 띈다. 사이공에서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소요사태가 이어지고 있는데 여기는 불교지도자들이 여전히 눈에 띄게 온건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2군 지역인 나짱, 달랏, 끼논 지역에서도 불교도 학생들로 인한 소요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불교도운동 학생자살군대조직, 공산주의 진영은 온건파맹공

 

 4월 들어서도 혼란은 계속됐다. 군정 최고사령관인 팜 쑤안 치우(Gen. Pham Xuan Chieu)는 후에를 방문했다가 1만명 학생 시위대에 붙들리는 바람에 사이클 릭샤에 태워진 채 여러 시간 끌려 다니다 풀려났다. 사이공 정부가 불교도 사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티장군의 협조가 필요하다 여기고 대화창구 마련을 위해 파견한 게 최고사령관 치우였다. 그가 그런 수모를 당하는 동안 경찰도 보안군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 즈음 미 라지대사는 티우대통령에게 이대로 가다간 1주일 안에 미군에게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보장이 없다는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41일 미대통령 일일 브리핑 자료에는 어설프거나 단편적 대응을 했다가는 오히려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4월 들어 키 군정의 무력진압이 본격화 되면서 상황에는 기복이 생겼다. 43일 키총리는 사이공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낭이 공산주의자들 손에 넘어갔다며 무력진압용 사전 여론전을 시작했다. 다음날(4) 남베트남 해병대 (VNMC) 3개 중대 3,500명이 다낭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낭 공군기지에 머물며 불교도+반군으로부터 다낭 탈환을 즉각 시도하진 않았다. 이 상황에서 곤란한 입장에 놓인 건 애초 티장군 해임에 비판적이었던 다낭 미해병대 왈트 중장이었다. 티장군 해임사태를 수긍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쪽을 노골적으로 편들 수도 없었다.

 

 이 시기 또 다른 주요 변수 하나는 4101군 지역사령관으로 톤 닷 딘(Ton That Dihn)이 새로 임명되어 다낭에 오면서. 키총리는 그를 1군 사령관으로 쫓겨난 티 대신 으로서 뿐 아니라 진압책임자로 앉혔다. 이는 1군 지역 민심은 고사하고 불교도 전체 민심에 매우 반하는 조치였다. 왜냐하면 톤 닷 딘은 63년 지엠 정부 당시 지엠 가문의 사조직이나 마찬가지인 특수부대대장으로서 그해 821일 불교사원 침탈작전을 주도한 악명 높은 인물이다. 앞서 언급했듯 틱 찌 꽝이 미대사관으로 피신했던 배경이 된 그 사건의 가해자다. 톤 닷 딘의 재등장은 불교도들의 분노를 더 자극했다. 그러나 키총리는 이미 강경대응으로 방향을 굳혔고, 반정부 진영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소위 자살투쟁방식이 다시 등장했다.

 

 411일 시위와 총파업 하루 앞둔 이날 후에에서는 학생 자살 군대(Student Suicide Troops) 2기 그룹이 맹세식을 겸한 졸업식이 있었다. 250명의 학생들로 구성된 이 그룹은 3일간 군사훈련도 받은 이들이다. 노선이 강경해지자 온건진영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공격도 쏟아졌다. 같은 날 민족해방전선(베트공) ‘해방 라디오’(Liberation Radio)는 틱 탐 초 승려, 노동계 지도자인 짠 꿕 부(Tran Quoc Buu), 민족주의 우파정당 다이비엣(Dai Viet) 중국 국민당을 모델로 한 민족주의 정당인 베트남 민족주의자 정당 (Vietnam Quoc Dan Dang, VNQDD)들을 싸잡아 매국노”(Country-sellers), “미국의 하수인”(America Lackeys)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해방 라디오는 또한 톤 닷 딘을 향해서는 지엠의 서자 같은 놈이라며 “63년 불교도 위기 사태 때 불교도를 탄압한 자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이날 결국 틱 탐 초 승려는 <불교연합> 직위에서 사임했다.

 

 미해병대 제트기 vs. 남베트남 공군기 상공 대치

 

 걷잡을 수 없던 사태가 투쟁운동 진영의 하향세로 이어진건 5월 중순부터다. 515일 새벽, 키총리는 미군은 물론 권력 파트너인 티우대통령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독자행동을 감행했다. 그는 육군합동참모총장인 카오 반 비엥(Lt. Gen Cao Van Vien) 중장에게 베트남 해병대와 특수부대 대규모 병력을 사이공에서 다낭으로 이동하도록 명령, 보강 투입했다. 그리고 특수부대는 즉각 다낭지역의 군본부를 공격 탈환했다.

 

 그동안 중립을 지켜온 다낭의 미사령관 왈트 중장은 사전 경고 없이 자신의 관할영토가 공격받았다는 점에 분노했다. 이후 왈트 중장의 미해병대는 키총리가 투입한 베트남 해병대 & 특수부대와 팽팽한 대치전에 들어갔다. 한달전 1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톤 닷 딘도 키총리의 군대 동원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혹시라도 체포될까 두려워 다낭 미 해병대 본부로 피신했고, 5171군 사령부에는 또 다른 사령관 가톨릭계 장군 후인 반 카오 (Huynh Van Cao)가 임명됐다. 이후 키정부는 오히려 공세를 강화했는데 21일부터는 공군력까지 동원했다. 이날 로켓포와 폭탄을 가득 실은 베트남 공군기가 출격했다는 정보를 접한 왈트 중장 역시 제1 미해병 비행단에 4개의 제트 전투기에 지대공 미사일 무장을 명령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문제는 이날 투쟁운동 총격팀이 미 해병대사령부 근처에 포지션을 잡고 공군기에 사격을 가했다. 반격으로 발사된 정부군의 로켓포는 미 해병대사령부 구역으로 날아왔고 미 해병대 8명이 부상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미 해병대는 두개의 제트기를 출격시켜 베트남 공군기 주변을 돌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왈트의 명령에 따라 언제고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한발의 로켓이라도 미군 구역에 떨어지면 공군기를 부셔버리겠다고 경고했다. 다낭 상공은 남베트남 공군기 vs. 미해병대 제트기의 상공 대치전이 전개됐다. 두어시간 후 베트남 공군기가 베이스로 돌아간 후에야 대치전은 끝이 났다.**

 이날(5/21) 오전 정부군이 다낭의 탄 닌 파고다 (Tan Ninh Pagoda) 를 공격한 이래 정부군과 투쟁운동 반군간 교전이 밤늦도록 계속됐다. 이날은 사이공 미대사관의 라지 대사가 키총리와 티장군의 대화창구를 열기 위해 키총리를 부랴부랴 찾은 날이기도 했다.

 

 여러 날의 무력 충돌에서 정부군과 투쟁운동 양측에서 총 150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700명이 넘었다. 미해병대 18명을 포함한 23명의 미군이 부상당했다. 527, 원수지간이 된 키총리와 티장군은 미국의 중재 끝에 드디어 협상 테이블에서 만났다. 사태를 정리하기 위해 티 장군이 1군 지역을 떠나는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투쟁운동은 여전히 무장을 풀지 않았다. 528일 키총리가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 (6/3)에는 종교의 자유 보장 차원에서 축하행사를 정부가 지원하겠다발표한 건 반군진영 무장 해제를 위해 달래 보려는 노력으로 해석됐다. 불교도들은 여전히 분노를 폭발시킬 준비가 돼 있었다. 그걸 잘 보여주는 사건이 526일 장례식 사건이다. 앞서 517일 톤 닷 딘을 대체한 1군 사령부 카오장군이 후에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반군쪽 젊은 장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사망 장교의 장례식이 치러진 26일 분노한 군중은 미정보도서관(U.S. Information Services Library)를 방화했다. 이후 며칠 상간에 세 명의 승려들이 분신했고 틱 찌 꽝 승려는 미국이 사이공 정권을 지지한다며 내정간섭 항의의 뜻으로 단식에 들어갔다.

 

 529일 사이공으로 돌아온 틱 탐 초 승려는 티우대통령과 끼총리가 정권을 민간으로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로 정권을 압박했다. 동시에 그는 불교도를 향해 “(저항으로서의) 분신과 자기 신체 훼손 등을 멈춰달라호소했다. 그즈음 분신정국이 이어졌다. 달랏에서는 어린 소녀가 손목을 자해하면서 죽을 때까지 피를 흘려 그 피로 혈서를 작성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소녀의 의지가 워낙 강해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는 게 CIA 기록이다. 사이공에서는 시장 상인들은 530일 파업에 돌입하는가 하면 후에 학생들은 시 라디오 방송국을 재점령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다음날 (531) 미영사관을 공격하겠다고 엄포도 놓았다. 그리고 31일 사이공에서는 17살 소녀가 분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그 시기 틱 탐 초 승려와 정권간에 타협 움직임이 보이자 이에 항의한 젊은 승려 5명도 분신하겠다고 협박했다. 66일에도 두 명의 비구니와 한명의 비구 승려들이 소신공양을 택했다.

 

 6월 초 제1군 지역 투쟁운동병력은 후에 중심으로 850-1,000명 정도로 추정됐다. 이들은 일단 후에의 디유 데(Dieu De)와 투 담(Tu Dam) 파고다로 후퇴한 채였다. 후퇴 지역 역시 틱 찌 꽝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후퇴지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619일에서야 후에 전역도 정부 통제로 들어갔고 라지 미 대사는 정치적 승리를 이뤘다며 키총리를 칭송했다.

 

 투쟁운동이 완전히 제압된 후 티장군은 결국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틱 찌 꽝은 가택연금됐고 불교도 운동은 와해됐다. 불교도 운동 3.0은 없었다.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와 함께 들썩이던 베트남 불교 운동은 짧은기간동안 정치군인들과의 협치를 통해 불교의 정치 세력화에 발동을 걸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사이공 주재 미대사관의 정치자문을 맡았던 필립 하비브(Philip C.Habib)는 그해 513일 남베트남 정세에 대한 본국 보고에서 틱 찌 꽝 승려를 사이프러스 초대 대통령이자 대주교인 마카리오스 3’ (Makarios)와 비교했다.

 

 “틱 찌 꽝은 결국 마카리오스 타입의 정치인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향해서는 군을 향해서도 순진했던 것 같다. 아마 남베트남 젊은 장교들 사이 벌어질 폭력의 수위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략) 틱 찌 꽝의 불교운동은 정치적 운동이었지 시위나 항의차원이 아니다

 

 실제로 틱 찌 꽝 진영은 정치적 목표를 구체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는 과도 의회 (Interim assembly)를 구성하고 헌법을 새로 쓰자고 늘 주장해왔다. 그가 그리는 불교도 정치의 그림속엔 군인 정치가를 배제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불교도가 권력에서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것이었고 그래서 불교의 정치세력화를 염원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승려들이 선거에 출마도 하고 의회로 진출도 하고 그리하여 승려 정당’, ‘승려 국회의원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쥘 수도 있으리라 여겼다. 엄밀히 말해 정교분리원칙에는 위배되는 신념이었다.

 

 오늘날 승려 정당이 존재하고 제도정치권에 참여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딱 한 곳밖에 없다. 극우민족주의와 불교가 적극 결합한 승려정당 자띠카 헬라 우루마야’(JHU, 민족유산당)가 있는 스리랑카다. 그런데 민족유산당이 창당된 건 2004년이다. 베트남 승려들은 스리랑카 불교 정당 창립 기준으로 보자면 40년은 앞서 불교정당과 의회진출을 꿈꿨던 셈이다.

 

**미 제트기와 남베트남 공군기 대치의 자세한 정황은 다음의 기사 참조

(http://www.historynet.com/the-1966-buddhist-crisis-in-south-vietnam.htm)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9>에서는 전투적 불교의 대부, 승려들의 정치 - 스리랑카 편이 이어집니다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이유경 기자는 태국 방콕에 베이스를 두고 아시아의 분쟁과 인권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2004년 이래 아프칸, 버마, 인도, 라오스, 태국 등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집중탐사취재를 했다. 그동안 <한겨레21>, 독일 등에 기사를 게재하였다. 2014년부터 KBS 라디오 방콕 통신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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