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8화> ‘베트남 전투적 불교 군기지 장악하다’ 제2편 -1

국제연대 -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 2017. 제12
 - 내전 속 내전

 

 1966년 불교도 항쟁 : 군정반대, 전쟁반대, 미국반대 그리고 불교도 정치세력화 목표

 

 1963111일 남베트남 응오 딘 지엠(Ngo Dihn Diem)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기까지 요동치는 시국을 주도한 건 불교도들이었다. ‘불교도 위기’(Buddhist Crisis)라 불리는 63년 소요사태불교도 운동 1.0’이라면 3년 후인 1966년 남베트남은 불교도 운동 2.0’을 목격하게 된다. (63년 사태에 대해서는 베트남 전투적 불교 1 참조)

 

 63년 운동이 소신공양 등 극단적 자기희생을 통해 내면적 전투성을 보였다면, 66년 운동은 내면적 전투성은 물론 폭력 전술을 구사했다. 이는 불교도 운동 2.0에 군세력 일부가 동참했다는 점에 상당부분 기인한다. 이들 반군과 결합한 불교도 세력은 남베트남 북방전선에 해당하는 제1군 지역(1 Corps, 베트남 중부)을 일부 장악하기도 했다. 1966310일부터 6월 중순까지 석달간 짧고 격렬하게 전개된 불교도 2.0투쟁운동’(Struggle Movement, 혹은 불교도 항쟁)이라 불린다. “투쟁운동은 첫 거리행동을 시작한 -민 합동투쟁위원회’(Military Civilian struggle committee)의 이름을 줄여 부른 말인데 시작 단계부터 군의 동참을 명료하게 담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투쟁운동의 성격은 매우 복잡하다.

 

 첫째, 우선 군내부 권력투쟁이었다. 1964-66년 남베트남에는 파벌주의(factionalism)가 만연했는데 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틈새를 불교도 운동이 파고들어 동맹을 맺은 셈이다.

 둘째, 군정 종식과 민간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을 담은 운동이다. 불교도들은 66년 그 시기 군사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응우옌 카오 키(Nyugen Cao Ky, 이하 키 총리) 총리 세력이 652월 미국의 지원으로 쿠데타를 벌였다고 믿었다. 정권이 계속 유지되는 것도 미국의 지원 탓이라 여겼다.

 셋째, 이런 시각은 자연스럽게 반미의식을 동반했고 미국의 내정간섭 반대 목소리로 이어지며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넷째, 반전운동의 성격이다. 반전운동 요구는 반군정-반미정서의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하다. 196482통킹만 사건을 기점으로 베트남전은 확전 중이었고, 196536일 린든 존슨 미대통령은 전투병 파병이라는 아주 중대한 결정을 발표했다. 이틀 후인 38일 미해병대 2개 대대 3,500명이 다낭해안에 도착한 후 병력은 계속 증가했다. 이런 확전 움직임은 남베트남 내에 반전 여론을 더더욱 부추겼다.

 마지막으로, 승려들이 정치세력화를 꾀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전투적 불교의 맥락에서 보면 이 부분이 가장 의미심장한 성격이다.

 

공산주의보다 천주교가 더 위험하다” (?)

 

 지엠정권 몰락 후 남베트남은 군인정치 전성시대를 맞았다. 19641, 9, 12, 그리고 19652 등 잇따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656월 재정비된 군정의 키 총리 응우옌 반 티우 (Nyugen Van Thieu) 대통령2년도 채 안된 기간 동안 네 번째 벌어진 쿠데타정부를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군인 정치가를 제외하고 남베트남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을 꼽으라면 틱 찌 꽝(Thich Tri Quang) 승려일 것이다. 1963112일 지엠정권이 쿠데타로 몰락한 후 쫓기다 암살에 이르는 혼란의 시간 동안 대사관 안에서 사태를 관망했던 이,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63821일 지엠정권의 최대 불교도 탄압으로 기록된 사원침탈작전시 미대사관에 피신 중이었고 그 안에서 쿠데타를 맞았다.

 

 틱 찌 꽝 승려의 영향력은 마를 날이 없었다. 특히 1964130일 무혈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응우옌 칸(Nguyen Khanh, 이하 혹은 칸 정부”)이 그해 8붕따우 헌법’(Vung Tau Charter)으로 군인 권력을 강화하려하자 틱 찌 꽝 승려는 즉각 시위로 맞섰다. 틱 찌 꽝 승려는 칸 정부가 지나치게 친 카톨릭적 성향이라고 비판하며, (가톨릭 편애적이었던) 지엠정권의 흔적을 지우라고 종용했다.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칸 정부는 지엠의 동생이자 중부지방에서 군벌마냥 군림하던 응오 딘 칸 (Ngo Dinh Can)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63년 불교위기의 시발점이 된 석가탄신일 후에(Hue) 총격사건 책임자인 마튜 당 시’(Matthew Dang Sy) 장교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며, ‘과거청산과정을 밟는 시늉을 했다. 칸 자신은 50년대까지 활발하던 반공-카톨릭-민족주의성향의 정당 다이비엣’(Dai Viet, ‘위대한 베트남이라는 뜻) 지도부를 지낸 우파 민족주의자다. 그 역시 불교세가 강한 제1군 지역에서 최고사령관을 역임한 바 있어 불교도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틱 찌 꽝 승려와 응우옌 칸은 적대적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동맹관계였다. 후자가 전자에 상당부분 의존했다는 분석이다.

 

 한편, 63불교도 위기사태를 지나며 막강한 영향력을 입증한 승려들은 해가 바뀌면서 통합적 불교조직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1964베트남불교승려연합’(Unified Buddhist Sangha of Vietnam, 이하 “UBSV” 혹은 불교연합” / United Buddhist Association - UBA라고도 함)이 출범했다. <불교연합>은 베트남 불교의 주류인 대승불교는 물론 상좌부 소승불교 등 십여개의 소수종파를 모두 아우르는 범불교 조직이다. 기존에 존재했던 불교도 총연합’ (General Association of Buddhist, 이하 “GAB”)이 대승불교만의 조직이었던 것에 비하면 <불교연합>(UBSV)은 종파를 초월한 세력화를 보여줬다.

 

 <불교연합>의 정신적 지도자는 80대 노승 틱 틴 키엣’(Thich Tinh Khiet)이었다. 그는 63응오 딘 지엠 정부가 불교도를 억압한다유엔에 진정까지 냈던 인물이다. 틱 찌 꽝 승려는 <불교연합>고위성직자위원회사무총장이었다. 실질적 권한행사가 가능한 직책이다. 실제로 다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한 그는 불교운동내 강경파 목소리를 대변했다. 틱 찌 꽝 노선과 대비 온건진영을 대변한 틱 탐 초(Thich Tam Chau)가 있다. 틱 탐 초 승려는 GAB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그 자신 북베트남 실향민이어서인지 실향민이 많이 모여든 사이공 중심으로 활동했다. 틱 찌 꽝 승려가 일반 신도들 사이에 추종자를 거느린 정치인의 면모가 있다면, 틱 탐 초 승려는 성직자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는 평이다.

 

 틱 찌 꽝 진영과 틱 탐 초 진영은 1964년만해도 군정에 대한 입장이 갈렸고 각기 다른 장군들을 선호하며 정치적 입지가 달랐다. 뿐만 아니라 색깔론역 색깔론에서도 두 승려는 선명히 갈렸다. 당시 베트남 상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프레임으로 분석할 수 있겠으나 냉전시대 최전선에서 이데올로기 내전중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색깔론역색깔론은 곳곳에서 악용됐다. 예컨대 북베트남 피난민 출신 틱 탐 초 승려는 (공산주의자) 민족해방전선 (National Liberation Front, 혹은 베트공”)으로부터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공격을 자주 받았다. 역 색깔론이었다. 남베트남 정부를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승려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온건한 입장이면 공산주의자들의 가차 없는 비판대상이 됐다. 예일대 출신으로 유명한 승려 틱 꾸앙 리엔(Thich Quang Lien)처럼 평화운동을 내건 이들도 공산주의자들의 역 색깔론을 비껴가지 못했다. 그런데 틱 찌 꽝 승려는 이런 비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가 베트남 전쟁 특히 미국의 남베트남 정치 개입을 두고 워낙 강경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틱 찌 꽝은 공산주의자라도 된단 말인가?’ 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었던 것도 그가 공산주의자들의 비판을 피해갔기 때문에 종종 제기된 물음이었다.

 

 놀랍지 않게도 베트남전의 늪에 서서히 빠져들던 미국은 틱 찌 꽝 승려와 불교도운동에 대한 정보 수집에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미국의 기밀해제 문서들에는 틱 찌 꽝 승려의 개인 성향까지 파악하려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예컨대, 1964911일자 CIA 보고서는 틱 찌 꽝 승려를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 수준의 광적인 민족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틱 찌 꽝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북 베트남이 침투시킨) 공산당 간첩도 아니다. 그는 단지 광적인 민족주의자이며 반 천주교성향이 강해 공산주의보다 천주교가 더 위험하다고 보는 인물이다. 베트남 정치판에서 쉽게 사라질 인물은 아니다

 

 CIA예상은 대체로 빗나가지 않았다. 틱 찌 꽝은 2년 후 투쟁운동의 핵심인물로 더욱 부상했다. 3월부터 시작된 소요사태가 한달 남짓 흐른 시점에 작성된 420일치 CIA 인텔리전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틱 찌 꽝이 이끄는 불교도 세력은 공산주의자들 다음으로 가장 잘 정돈된 조직이다. 어느 정부라도 안정을 원한다면, 이 불교도 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불교도들은 이제 협의해야 할 정치세력이 됐다

 

 미국은 불교도 소요사태로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진다면 (틱 찌 꽝 승려)가 남베트남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였다.

 

 불교도 정치인 대중운동 4자 연대

 

 한편, 틱 찌 꽝 강경진영과 팀 탁 초 온건진영은 과거 안티 응오 딘 지엠전선에서 만큼은 큰 이견이 없었듯 정권의 불교도 차별 반대 입장에는 공통의 이해가 있었다. 66년 발생한 한 사건은 이런 공통 관심사를 다시 상기시켰다. 물론 대응방식이 시종일관 일치한 건 아니다.

 

 1966310, 그 시점 군정의 실세였던 응우옌 카오 키(Nguyen Cao Ky, 이하 키 중장혹은 키 총리”) 총리는 제1군 지역 사령관 응우옌 찬 티(Nguyen Chanh Thi, 이하 티 장군”)가 건강 문제로 치료차 미국에 가길 원한다며 티 장군의 병가휴가 신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티장군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발표였고, 사실상 티장군을 해임한 거였다. 티장군은 카톨릭계 주류의 군엘리트 사회에서 마이너리티 불교도 출신이다. 그러나 불교세가 강한 1군 지역에서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티장군 해임 사건은 결국 투쟁운동의 직접적 기폭제가 됐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키총리의 티장군 해임 당시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는 헨리 캐봇 라지 주니어(Henry Cabot Lodge Jr.)라는 점이다. 라지 대사는 63년 불교도 위기 사태 때도 남베트남 미대사로서 지엠의 몰락과 쿠데타를 목격했고 또 관여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19646월 대사를 사임하고 본국으로 철수했다가 1년만인 19658월 남베트남으로 재부임했다. 그리고 이듬해 불교도 항쟁이 일어난 게다. 그는 남베트남 불교도 운동1.02.0을 모두 현장에서 지켜본 미국 대사가 됐다.

 

 키총리가 티장군 해임에 앞서 라지 대사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을 때 라지대사는 반대하지 않았 것으로 알려졌다. 라지대사 역시 티장군의 야망이 지나치다판단했고 무엇보다도 티장군이 공산주의자들과 어떤 연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CIA나 미대사관 모두 대사에게 그렇게 보고하고 조언해왔다. 라지대사 뿐 아니라 남베트남 주둔 미총사령관인 윌리암 웨스트모랜드’(William Childs Westmoreland)와 미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총리)-티우(대통령) 정권티 장군 해임을 지지했다. 그렇다고 해서 티장군이 남베트남 주둔 미군 중에 편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제1군 지역 담당 사령관이자 3 미해병상륙작전사단장’(3rd Marine Division in Vietnam)이었던 르위스 윌리암 왈트(Lt.Gen Lewis William Walt) 해병중장은 티장군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티장군을 해임하고 불교도 민심에 기름을 부은 키총리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공군중장(air marshal)출신으로 1965619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군정 총리가 됐다. 그를 총리로 끌어들인 파트너는 응우옌 반 티우(Nguyen Van Thieu, 이하 티우)장군이다. 티우를 대통령으로, 키를 총리로 재편된 군정은 불교도들의 세력 확장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키총리는 불교도 세력이 너무 커져서 권력을 넘보지 않을까 과도하게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1군 사령부불교도 사령관으로 불교도들의 지지를 받는 티장군과의 경쟁관계도 의식한 듯하다. 과도한 우려는 마침내 1966310일 티장군 해임으로 이어졌다. 키는 훗날 미국 망명 생활 중 한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63년 지엠정권 몰락후) 불교도들은 정치 세력이 됐다. 강력했고 조직도 잘 정비되었는데 내가 보기엔 그들은 자기들만 진짜 권력이라 생각한 거 같다. 요구사항도 너무 많아졌다. 응우옌 칸(바로 직전 군정의 대통령)은 나름 현명하게 정치 좀 해보겠다고 온갖 파벌들을 아우르려는 노력했는데. 그게 결국 칸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너무 많은 정파들이 각기 입장차가 컸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키고 지지를 끌어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키의 말대로 그 시기 정치와 결탁한 군과 불교계에도 분파주의가 만연했다. 1군 지역 총 사령관 티장군은 이 지역 정치적 불교세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군정통치 전성시대였으므로 군사령관은 지역정치까지 관할하는 상당한 자치권도 누렸던 시절이다. 그 시기 <타임지>는 티장군은 1군 지역의 군벌 같은모습이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키총리의 해임 이면에도 그런 과도한 자치를 제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동시에 티장군이 남베트남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던 공산주의 세력과의 협상론에 호의적이었던 점도 갈등의 요인이 됐다. 여하튼, 티장군이 느닷없는 해임을 받아드릴리 만무했다. 티장군은 해임도 거부했고 미국에 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불교도들은 티장군 해임발표를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받아들여 분노했다. 그들은 불교도를 차별했던 지엠정권 몰락 후 여전히 불교도를 차별하는 정권이 존재한다는 현실에 분노했다. 이런 기류에 동의하는 일부 군인들은 반군화되어 불교도들과 합세했다. 남베트남 제1군 지역은 또 다시 요동쳤다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8 ‘베트남 전투적 불교 군기지 장악하다’ 제2편 -2이 이어집니다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이유경 기자는 태국 방콕에 베이스를 두고 아시아의 분쟁과 인권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2004년 이래 아프칸, 버마, 인도, 라오스, 태국 등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집중탐사취재를 했다. 그동안 <한겨레21>, 독일 등에 기사를 게재하였다. 2014년부터 KBS 라디오 방콕 통신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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