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을 마치고 난뒤 아침 밝은 햇살이 방안가득 비춘다. 녹음이 짙은 오월과 따사로운 봄 햇살이 찬란한 오월임을 일깨우게 한다. 나에게 오월은 언제쯤부터 일까 기억해 본다. 1980년 5월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산과 들을 벗삼아 뛰놀던 시절, 그해 5월 광주에서 온갖 비보가 날라들었지만 어린 시절이라 무슨 난리가 났다는 정도의 소식만 들었다. 학교가 휴교령을 내려 학교 가지 않는다는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은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두 명의 아들 걱정이다. 큰형님은 전남대학교 법대에 다니는 학생이었고, 둘째형님은 화순에서 벽돌을 찍어내는 노동자였다. 광주에서 자취하는 큰형님, 그리고 광주를 지척에 둔 화순에서 벽돌노동자로 생활해가는 둘째형님의 생사 때문에 화순동면 시골마을에서 광주까지 버스도 다니지 않는 그 길을 그해 오월 이후 수없이 오고가고 했다. 두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큰형님은 자취방 벽장 속에서 우리집 가장으로서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일체 외부활동을 접고 고시공부에 매진했다. 밥 하는 시간까지도 아껴가면서 공부하기 위해 사나흘씩의 밥을 전기밥솥에 해놓고 먹을 정도로 세상난리에 무관하게 공부만 집중했다. 둘째형님은 5월 이후 연락이 끊겨서 부모님들은 둘째형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온갖 수소문하고 찾아다녔다. 그렇지만 전혀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우리 부모님들은 둘째형님이 5.18과 연관되어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수없이 찾아다녔다. 아무 소식을 찾을 수 없었던 둘째형님은 몇 달 뒤에야 초췌한 모습으로 시골집에 나타났다. 술을 잔뜩 먹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무도 무서웠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움을 하고 물건을 부수고 다 죽이겠다고 설치며 아버지랑 대판 싸우고 나면 상황이 종료되었다.
며칠에 한 번씩 집에 오는 형님은 늘 술에 잔뜩 찌들어 그렇게 싸움을 반복했다. 형님이 집에 오는 날, 어머니는 형님의 모습에 안쓰러운 모습에 눈물을 훔치시고 아버지는 형님과 대판 싸움을 하시고 술을 폭음하시며, 난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모르며 숨을 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하더니 83년 겨울, 둘째형님은 학동 전남대병원 맞은편 여인숙에서 무겁고도 힘겨운 세상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 즈음에 큰형님은 대학 4학년때 꿈에도 그리던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집안에 경사와 애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난 그 당시 중학생이라 겉으로 드러나는 슬픔과 아픔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 상황들이 5월과 연관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스무살이 넘어서이다. 어렵게 입수한 군사재판 기록을 살펴보니 우리 형님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을 접수할 때 총을 들고 시민군으로 참여했다.
총탄이 난무하고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며 온갖 선무방송이 새벽 찬 공기를 가를 때 전일빌딩 앞을 총을 들고 지키면서 느껴야했을 그 공포감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날 새벽 둘째형님은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수많은 군인들이 착검을 하고 길거리에 널브러져 쓰러진 자들을 총칼로 생사를 확인하고, 살아있는 자는 옷을 다 벗기고 포승줄로 꽁꽁 묶어 군화발로 짓이기고, 총으로 내려치고, 상무대 영창으로 수감했다.
온갖 고문과 구타, 갖은 협박으로 상무대 영창에서의 8개월 정도를 살다 나오니 몸과 마음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있었으리라.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을 정도였기에 술에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폭도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놓았기에 그 분하고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을 하소연할 곳도 없었을 것이고, 감옥에서 살다 나왔으니 범죄자의 딱지가 따라붙어있으니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으리라.
거기에 고문 후유증으로 20대 젊은 나이에 삭신은 만신창이가 되고, 누구 하나 마음 터놓고 얘기 나눌 이 없는 형님은 얼마나 고독하고 절망스럽고 외로웠을까. 그렇게 술로 의지해 온 집안을 뒤흔들어놓고 엉엉 울다가 술이 깨면 어느 샌가 집에서 사라져버린 둘째형님. 결국 형님은 3년간의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뒤로한 채 세상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 뒤 형님은 5.18유공자로 등록이 되고 망월동 신묘역에 안장되었다.
형님의 묘비글귀는 내가 직접 썼다. 김남주 시인의 싯구를 붙여 다음과 같이 새겨 넣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자유를 위하여 사람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역사와 민족 앞에 온 몸을 바친 시민군, 당신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자 자랑입니다.” 둘째형님은 지금 망월묘역의 햇살아래 잠들어있다. 이렇게 오월을 어느새 37년째 맞이하고 있다. 둘째형님과 함께 나에게 오월을 일깨워준 또 한 분은 대불련 선배이신 지광 김동수 열사다.
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이 계엄군의 총탄에 의해 접수될 때 당시 대학생불자였던 김동수 열사는 그곳에서 산화했다. 대불련 뺏지와 단주를 손목에 차고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생명을 다한 것이다. 대불련 활동을 할 때 김동수 열사를 처음 알았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라며 평소의 소신과 의지와 보살의 삶으로 살다 가신 지광 김동수 열사. 세상에 눈뜨게 하고, 진리에 눈뜨는 길로 이끌어주었다.
자기 자신의 일신을 위한 삶이 아닌 우리 이웃과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 부처님께서 원하는 삶이라는 걸, 진정 부처님께서 평생을 두고 살아가셨던 삶이라는 걸 지광 김동수 열사를 통해 배웠다. 5.18기간 중, 목포로 피신해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삶, 그리고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지광 김동수 열사는 죽음으로써 삶을 선택했다.
군사독재에 맞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온몸으로 맞선 수많은 오월 열사들, 그리고 이 땅의 자유와 민주와 통일의 새길을 열어가기 위해 애쓰다 죽임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고문과 구타를 당해야 했던 그 아픔과 통곡과 눈물의 역사 위에 우리는 지금 발 딛고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자유와 해방을 위해 온 몸을 던져 지키자 했던 가치와 신념과 의지와 열정은 고스란히 우리 모두가 받아 안아야 한다.
이 오월, 광주전남불교NGO연대 주관으로 오는 5월 18일(목) 오후 7시 원각사에서 <5.18민중항쟁 제37주년 추모법회>를 진행한다. 그리고 5월 20일(토) 12시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망월동구묘역에서 ‘꽃진자리 피어나는 희망’이라는 주제로 <제10회 망월동구묘역 작은 음악회> 를 연다. 이팝나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오월 오늘, 망월동을 찾아야겠다. 둘째형님도 뵙고 지광 김동수 열사도 뵙고 정의행 법사님도 만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