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참여불교사상가 술락 시바락사박사를 초청하여 시민사회 활동가와 불교활동가를 대상으로 ‘불교, 평화를 말하다-Role of Buddhist Peace Building in Asia’를 주제로 대화마당을 열었다. 4월 21일 월드컬쳐오픈 W_스테이지 안국에서 열린 대화마당은 대불련 총동문회, 불교환경연대, 신대승네트워크, 정의평화불교연대가 공동 주최하였고, 이정규님이 통역을 담당하였다. 술락 시바락사박사의 강연과 참석자들과의 대화 내용을 풀어 게재한다. |
누가 불자인가?
이른 아침에 많은 분들이 와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요점으로 들어가면 ‘누가 불교 신자인가’ 라고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어느 누구도 ‘불교신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정견’을 갖고 있는지 여부 그것만이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불교신자’란 말은 프랑스인이 처음에 만들고, 나중에는 영국인들이 즐겨 썼는데 그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300백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서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불교신자’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명상 또는 마음의 평화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불교신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84년 전 영국에서 불교네트워크를 만든 크리스틴 험프레이는 ‘불교신자는 앉아서 명상하면 된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앉아서 명상하면서 자기가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는 것을 추구하는 데도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불교가 아니며, ‘도피주의’에 불과합니다.
왜 우리(불교)는 기독교와 무슬림처럼 조직이 없을까라는 물음에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 단체가 세계불교도연맹(WFB)입니다. WFB는 스리랑카에서 결성하고, 버마로 본부를 옮겼는데, 버마의 독재로 인해 다시 방콕으로 옮겨 40년째 그 곳에 본부가 있습니다. 회원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고, 2년 마다 정기 회의를 갖고 있습니다. WFB 회의에 오는 분들은 오성호텔에 머물면서 기름진 성찬을 즐기는데, 경비는 모두 태국 정부가 부담합니다.
그런데 WFB가 어느 해에 저를 대회의 기조 연설자로 초대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나는 기조연설에서 ‘여러분들이 불교 신자라면서 방콕이 독재하에 있는 것 몰랐느냐, 슬럼가도 많은데 그곳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봤느냐, 여기 사람들은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또 ‘여러분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는 기업인들은 상당히 위험한 일에 연루된 분들이 많은 데, 그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고 행복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의 네가지 진리(사성제)의 첫 번째가 고(苦)인데, 고(苦)를 극복하는 것이고, 이를 증명해야 한다. 고통을 제대로 증명하지 않으면 불교신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WFB에서 더 많은 얘기를 하였지만, 이것이 연설의 핵심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WFB에서 저를 초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얘기한 주제는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27년 전에 불교신자들을 모아서 수행을 통해서 닦은 내면의 평화를 사회로 가져가자는 취지로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기구 발족 당시에 버마의 저명한 스님께서는 “세상에 무슨 주의, 무슨 주의 등 너무 많기에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는 불교를 장려하기보다,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고, 이기심을 줄이고, 그리고 서로를 돌보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는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잘 돌보고 다른 사람도 잘 돌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WFB에서는 2년마다 만나면서 우리는 좋은 단체 라고 얘기하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선 말을 하지 않고, 그런 것은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있는 ‘평화의 씨앗’이라는 제 책에서 저는 ‘대문자 B’의 불교(Buddhism)와 ‘소문자 b’의 불교(buddhism)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대문자 B’의 불교는 국가주의나 미신, 자본주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싱할라 사람들(불교인)은 불자라는 신념이 없는 타밀사람이나 힌두교인, 그리스도인들이 불교신자가 아니므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스리랑카의 전 대통령은 타밀반군 소탕작전 과정에서 타밀 반군이 투항했지만 부녀자와 병원에 있는 사람을 포함해서 5만 여 명의 타밀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미얀마 불교지도자들은 소수민족인 로힝자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면서 살해하고 있습니다. 태국의 ‘담마까야’라는 불교단체는 불교는 소비주의·자본주의와 같이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는 탐•진•치를 자비•자애•지혜로 바꾸는 것
제가 이해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는 탐•진•치를 자비•자애•지혜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탐욕을 확대하고, 국가주의는 폭력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주류 교육계와 언론은 망상, 즉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서구의 교육방식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고 있고, 머리만 발달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 식의 서구 교육방식은 생각을 통해서 자신이 더 잘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머리만 좋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 심장, 호흡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일주일, 1년 내내 숨을 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잖습니까? 부처님도 그러하셨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깊은 호흡을 통해서였습니다. 깊은 명상 호흡을 통해 우리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즉, 마음을 챙기고, 마음챙김을 통해 지혜를 발달시키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기심을 버리게 되면, 지혜와 자비로움을 같이 갖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부처님을 지혜와 자비로움이 가득하신 분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불교 신자가 되길 원한다면 깊이 호흡하는 법을 배우고, 안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의 평화가 이뤄지면 자신을 비판적으로 잘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자각하게 됩니다. 내면의 평화를 세상의 변화로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성제의 중요한 것은 ‘고’입니다. ‘고’는 개인적인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고도 있고, 환경적인 고도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의 평화를 건설하면, 사회 안에서도 평화를 만들어가야 하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의 간극을 없애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사회구조는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도록,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이 이러한 사회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그냥 사회복지 차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회복지 차원에서 힘든 사람을 돕는 것은 좋지만 사회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사회변화는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아힘사 ‘비폭력’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이 이러한 실천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40년 전 제가 미국에 갔을 때 그곳의 불자들이 좌선하면서 마음속의 고요한 평화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서구사회의 불자들 대부분은 중상층 출신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 때문에 하층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미국 불자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위험 요소가 되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좌선과 고요만 찾는 행위는 불교가 아니고, 도피주의라고 대놓고 얘기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일본의 도반들에게도 말했습니다. ‘일본의 스님들을 보면 그들은 장례식을 통해 다음 생을 준비하는 데는 정말 뛰어나고, 돈도 많이 번다. 하지만 도반에게 일본이 오염을 전 세계적으로 장려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 또 값싼 노동력을 전 세계로부터 들여오고, 매춘까지도 들여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도반은 ‘일본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종교’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그렇게 애기했지만 지금은 일본 불자들이 점점 더 사회적 실천에 참여하고 있어 기쁩니다. 이들이 저희와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함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불자가 되려면 내면의 평화를 함양하고, 그 평화를 세상과 사회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미얀마에서 보수 극우 스님들은 소수민족 로힝자를 공격하지만, 많은 분들이 그들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미얀마의 한 스님은 자신의 절에 무슬림 600명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보수 극우 지도자들이 그들(무슬림)을 내보내라고 하였지만 그 스님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나를 먼저 죽여라. 이들을 보호하는 게 나의 일이다‘라면서 그들을 보호하였습니다. 결국 이 스님의 입장이 확고하였기 때문에 무슬림들을 내놓으라던 사람들이 물러났습니다. 이 사례는 자비와 지혜가 도덕적 용기와 결합될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로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불자란 모두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사람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는 미얀마에서 20년간 활동해 왔습니다. 미얀마에서 타종교에 대해 차별하는 성향이 강하여 조심스럽게 일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기독교인과도 같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라벨에 불과하기에 그들도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도 손잡고 일해야 합니다.
몇 년전 미얀마가 문호를 개방하였을 당시 양곤에서 열린 큰 회의에 연사로 초대됐습니다. 당시 무슬림과 불교도 사이에 긴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내가 제안한 것은 불교 신자들 중에도 호전적인 사람들이 있기에 이들에게 먼저 이야기를 건네고 자비심을 갖도록 변화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슬림들도 자비심이 많고 지혜롭지만 호전적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 종교가 자기들 안에서 중도적이 되도록 내부에서 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타종교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이런 대화를 버마에서 조직했고, 무슬림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도 조직하였습니다. 이러한 대화가 잘되었기에 세계에서 가장 무슬림이 많은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자란 모두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적으로 간주하진 않습니다. 달라이라마 존자가 가장 훌륭한 예가 되고 있습니다.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해서 점령한 지 50년이 넘었는데, 6,000개의 티베트 사원을 중국이 태웠습니다. 그 사원마다 2~3천 명의 승려가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승려를 고문하고 비구니를 강간하는 등 티베트인들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달라이라마 존자께서는 ‘그래도 중국인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증오와 폭력이 가득하지만 사랑과 이해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중국 정부에 의해 18년 동안 매일 밤 고문을 당한 티베트 스님이 있습니다. 달라이마라 존자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인도 다람살라에서 이분을 만났는데 보이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그에게 어떻게 고통을 참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고문당하는 중에도 깊이 호흡하면서 마음챙김을 하려 노력했고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에게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려고 했다고 답했습니다.
불교의 기본적 가르침은 ‘보시’
우리가 평화를 이루려면 상대를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적은 사실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탐진치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국가주의는 엄청난 자아를 강조하기에 국가주의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우리가 불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적이 되는 데 그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기본적 가르침이 ‘보시’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화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우리는 나에게 소중한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몸을 내놓아야 합니다. 베트남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소신공양한 스님의 이야기를 알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재보시(아마사 다나)라고 합니다.
다음은 법보시(담마 다나)를 부처님께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법보시는 경전과 그 말씀을 나누는 것이지만, 책도 여전히 물질입니다. 진정한 법보시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배우는 것’ 입니다. 독재정권 하에서 진리·진실을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억압받는 사람을 위해 힘 있는 사람에게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무외시(아바야 다나)인데, 아바야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바야(무외)는 ‘용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누구나 용서하게 됩니다. (무외시를 알면) 적은 우리 안에 있어 우리 내부의 적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바로는 세상의 평화를 진작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제가 제한적이지만 경험을 갖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의 깊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