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길을 걷다-23> 안산(鞍山)에서 용산(龍山)까지 산줄기를 따라서

인문/기행 - 최연 (사단법인 해아라 이사장) | 2017. 제11

 안산(鞍山)은 한양도성(漢陽都城)을 이루는 내사산(內四山)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 산세와 위치적인 조건으로 인해 한양도성에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내사산 중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인왕산(仁王山)이 그 산줄기를 서쪽으로 뻗치면서 무악재(毋岳峴)에서 낮아졌다가 안산에서 솟구쳐 한줄기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화산을 일구고 아현(阿峴)으로 이어져 약현(藥峴)과 만리재(萬里峴)를 지나 용산(龍山)에서 한강(漢江)에 숨어든다. 다른 한줄기는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연세대학교의 서쪽을 감싸 안고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계당치(鷄堂峙)를 지나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臥牛山)을 일으키고 양화진(楊花津)의 잠두봉(蠶頭峰)에서 한강으로 숨어든다.

 수지리적으로 서울의 종조산(宗祖山)인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負兒岳)이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아이가 어미 등을 뛰쳐나가면 위험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 인수봉이 마주 바라보이는 안산에서 목멱산에 이르는 산줄기에 지명(地名)으로 비보책(裨補策)을 썼다. 안산을 무악(毋岳)이라 하여 뛰쳐나가지 말라()하고, 안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개를 떡전고개(餠市峴)라 하여 떡으로 아이를 달래고, 목멱산 동쪽에 있는 고개를 벌아령(伐兒嶺)이라 하여 아이가 달아나면 혼내준다고 얼렀던 것이 그것이다.

 

 안산은 동, 서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그래서 현저동에서 홍제동을 넘는 고개를 예전에는 길마재, 즉 안현(鞍峴)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공식적으로 무악재(毋岳峴)라고 부른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 있는 무악재는 중국을 사대(事大)했던 조선으로서는 황제의 사신(使臣)이 드나들던 길목으로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 중국 사신들은 조선 관리로부터 홍제원(弘濟院)에서 접대를 받고 무악재를 넘어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조선의 국왕과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은 후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崇禮門)으로 도성에 들어와 궁궐 가까이에 있는 태평관(太平館)에서 유숙(留宿)하였다.

 그래서 안산의 동쪽 자락에는 중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모화관과 그 입구에 영은문(迎恩門), 모화관에 딸린 연못인 서지(西池)가 있었다. 모화관은 원래는 누각형식으로 지어져 모화루(慕華樓)라 불렀으나 세종 때에 모화관으로 바꿔 불렀다. 모화관 입구의 문은 원래 홍살문이었으나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의 건의에 따라 두 개의 기둥에 청기와를 덮어 격식 있는 문으로 거듭나서 영조문(迎詔門)이라 하였고, 3년 뒤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제안으로 영은문(迎恩門)이라 개칭하였다. 서지에는 개성의 숭교사(崇敎寺)의 연못에서 가져온 연꽃이 가득하였다. 지금의 영천시장과 금화초등학교 일대이다.

 

 안산의 두 봉우리는 각각 동봉수(東烽燧)와 서봉수(西烽燧)가 설치되어 있어 평안도와 황해도 길의 통신 임무를 맡았다. 동봉수는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육로(陸路)를 따라 고양시 봉현을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 셋째 봉수로 전해졌고, 서봉수는 평안도 의주(義州)에서 시작하여 해안(海岸)을 따라 파주 교하를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의 넷째 봉수로 전달되었다. 지금은 동봉수대만 복원이 되어 있고 서봉수대는 통신회사의 철탑이 서 있다.

 

 안산의 남쪽 자락은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천도(遷都)를 단행할 때 도읍지로 추천된 세 곳 중의 하나이다. 고려 말 천도예정지(遷都豫定地)는 계룡산(鷄龍山), 한양(漢陽), 그리고 안산(鞍山)의 세 곳으로 경기도 관찰사 하륜(河崙)은 안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계룡산은 정감록(鄭鑑錄)에도 나와 있는 길지(吉地)로서 제일 먼저 천도 후보지에 올라 도성 축성을 일정부분 진행하였다. 하지만 그 위치가 나라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남서쪽에 치우쳐 있고 도참사상(圖讖思想)에 의하면 계룡산 일대는 정씨(鄭氏)가 도읍을 세우는 곳이라는 주장 때문에 10개월 만에 공사가 중단되어 기단 일부의 석축물만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의 지명이 새로운 도읍예정지라는 뜻으로 신도안(新都案)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계룡대라 부르며 육, , 공군의 참모부가 들어서있다.

 다음으로 하륜(河崙)이 주장한 안산 주산론(主山論)은 이곳의 지형이 앞이 확 트여 한강(漢江)으로 접근하기가 쉽고, 또 한강은 바로 서해(西海)와 맞닿아 있어 해양진출이 용이하기에 도성으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풍수지리적으로는 주산(主山) 앞에 안산(案山)이 있어 내룡(來龍)한 기운이 어느 정도 맺혀야 그 기운을 받을 수가 있는데, 이곳 지형은 막힘이 없기에 맺힘도 없어 풍수지리적으로는 길지(吉地)가 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성리학(性理學)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운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나라였기에 해상무역(海上貿易)은 바로 가장 낮은 층인 상()에 해당함으로 그 직업을 천하게 여겼던 당시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안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터는 연희동 입체교차로 어름일 것이고, 좌청룡(左靑龍)은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老姑山), 우백호(右白虎)는 서대문 구청 건너편 백련산(白蓮山)이 된다. 그러나 풍수 지리적으로 터가 옹색하고 한강까지 훤히 터여 있어 산의 정기를 담아내지 못한다고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여 아쉽게도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또한 안산은 한양도성을 쌓을 때 논란이 많았던 곳으로 지금의 한양도성은 우백호인 인왕산에서 바로 안산(案山)인 목멱산(木覓山)으로 이어져 있지만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인왕산에서 무악재를 가로질러 안산으로 와서 금화산 지나 약현(藥峴)에서 목멱산과 이어지는 도성을 쌓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불교가 부흥하기를 바라지 않는 정도전(鄭道傳)이 인왕산 자락에 있는 장삼 입은 승려 형상의 선바위가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여 반대하는 바람에 성사되지는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무학은 한양의 좌청룡 산줄기의 허약함을 비보하기 위해 궁궐을 동향(東向)으로 하는 인왕주산론(仁王主山論)을 주장하였으나 주례(周禮)에 따라 군왕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를 해야 함으로 궁궐의 좌향(坐向)은 반드시 남향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정도전의 주장에 힘을 잃고 말았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太祖) 때 계획을 세워 세종(世宗) 때 준공을 본 이궁(離宮)이 세 곳에 있었는데 동쪽에는 진접면의 풍양궁(豊壤宮), 서쪽에는 연세대학교 부근의 연희궁(衍禧宮), 남쪽에는 한양대 앞 살곶이 다리 근처의 대산이궁(臺山離宮)이라 하는 낙천정(樂天亭)이 그 곳이다. 북쪽에 이궁이 없는 이유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인 장의동 본궁(壯義洞本宮)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도성 주변에 이궁을 설치한 까닭은 건국 초기에는 왕가(王家)에 횡액(橫厄)이 생기던지 아니면 왕자(王子)의 난()’과 같은 변고가 생기면 왕이 이를 피하기 위함이었는데 후기로 가면서 왕이 쉬어가는 단순한 휴양지(休養地)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연희궁은 원래는 정종(定宗)이 태종(太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거처하였던 곳이었고, 세종(世宗) 때에 와서는 상왕인 태종을 위한 궁으로 서이궁(西離宮)이라 불렀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연희궁이는 이름을 얻어 세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는 이어소(移御所)로 사용하였고 세조(世祖) 때는 연희궁을 서잠실(西蠶室)이라 하여 정5품의 관리를 배치한 양잠소(養蠶所)로 사용하였다.

 성종(成宗) 때는 장녀 신숙공주(愼淑公主)의 묘를 이곳에 두었고 연산군(燕山君) 때에는 연희장(演戱場)으로 사용하다가 폐쇄되었으며 영조(英祖) 때에는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묘를 안장하였다. 영빈이씨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어머니로서 그의 묘를 수경원(綬慶園)이라 불렀으나 묘는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장되고 지금은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만이 남아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봉원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벌고개(罰峴)라 하였다. 그 유래는 이곳이 수경원(綏慶園)의 주룡(主龍)이어서 사람이 다니면 산등성이 낮아질 염려로 고개 통행을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는 자를 벌하였으므로 벌고개라 불리어졌다.

 

 수경원 터에는 의사이며 선교사였던 알랜이 고종에게 병원을 설립하자고 제안하여 설립한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이었던 광혜원(廣惠院) 건물이 한옥으로 복원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은 고종의 윤허로 1885410일 재동에 있는 홍영식(洪英植)의 집(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설립되었고, 2주 후에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알랜의 제안으로 설립된 왕립병원(王立病院)이었던 광혜원(제중원)은 조선정부 외부(外部) 소속으로 건물과 경비를 지원하고 하급관리(主事)를 파견하여 일반재정을 관리하였다. 선교부(미국 북장로회)에서는 의사들을 파견하고 의료 및 의학교육에 대한 경비를 관리하였다. 당시 교사들이나 의사들을 직접 고용해서 급여를 주었던 다른 기관들과는 달리, 미국의 선교부에서 직접 파견했고 의사들은 공식적인 보수를 받지 않았다1887년 제중원은 구리개(을지로에서 명동성당에 이르는 언덕)로 확장 이전했으며 1894년에는 제중원의 모든 운영권이 미국 선교부로 이관되어 사립병원(私立病院)으로 전환되었다. 1904년 재정난에 처한 제중원은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씨의 15,000달러 기부 등으로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앞의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자리)로 새 병원을 지어서 이전하였다. 이때 기부자인 세브란스를 기념하여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기념병원으로 바꾸었다1905년 의사 숙소 등으로 사용되던 구리개의 옛 제중원 대지와 건물들은 조선정부로 반환되었으나 조선 정부나 백성들은 그 이후 오랜 동안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이라고 불렀다.

 

 봉원사(奉元寺)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道詵) 국사가 연희궁 터의 어느 저택을 절로 만들어 반야사(般若寺)라고 부른데서 연유되었다. 고려 말에 태고 보우(太古 普雨) 스님이 반야사를 증축하여 금화사(金華寺)로 고쳐 불렀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린 것을 영조(英祖) 때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영조가 친필로 쓴 봉원사 현판을 하사(下賜)하였다. 이런 사정들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가까이에 있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묘인 수경원의 원찰(願刹)로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그러나 아쉽게도 이때 지어진 대웅전과 영조의 현판 글씨, 탱화, 목조삼존불 등은 모두 소실되었다. 지금은 정도전(鄭道傳)이 쓴 명부전(冥府殿) 편액(偏額)과 대원군이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다시 쓰기 위해 불태운 충남 덕산 가야사(伽倻寺)의 범종(梵鐘)이 봉원사로 옮겨와 종각에 걸려 있다.

 

 봉원사는 한글학회가 창립된 곳이기도 하다. 1908831일 주시경(周時經)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우리말과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국어연구학회>를 봉원사에서 창립했다. 그 후 단체의 이름이 여러 번 바뀌며 1911<배달말 몯음>으로, 1913<한글모>, 1921<조선어연구회>, 1931<조선어학회>, 1949년에 지금의 <한글학회>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고종 21(1884)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었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住錫)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하다.

 

 봉원사에는 매년 5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영산재(靈山齋)가 거행된다. 영산재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시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상징화한 의식으로 영산회상을 열어 영혼을 발심(發心)시키고, 귀의(歸依)하게 함으로써 극락왕생(極樂往生)하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국가의 안녕과 군인들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국가적으로 치렀던 불교의식이다.

 영산재의 의식을 간단히 요약하면 우선 괘불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내어 거는 괘불이운(掛佛移運), 괘불 앞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의식(讚佛儀式), 영혼을 모셔오는 시련(侍輦), 영가(靈駕)를 대접하는 대령(待靈), 영가가 생전에 지은 욕심내고(), 성질부리고(), 어리석었던() 삼독(三毒)을 씻어내는 의식인 관욕(灌浴), 공양(供養)드리기 전에 의식장소를 정화하는 신중작법(神衆作法), 불보살에게 공양을 드리고 죽은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권공의식(勸供儀式), 구체적인 소원을 아뢰게 되는 축원문 낭독, 영산재에 참여한 모든 대중들이 다 함께 하는 회향의식(回向儀式)과 봉송의례(奉送儀禮) 순으로 회향하게 된다.

 

 안산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 작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금화산(金華山)으로 그 이름은 봉원사의 고려시대의 이름인 금화사(金華寺)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산에서 금화산을 지나 동남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애오개(阿峴)를 지나 만리재를 넘어 효창공원으로 이어져 용산(龍山)에 닿는다.

 이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금화산 조금 지난 곳에서 능안정(陵安亭)이라는 정자를 만나게 되는데 금화산 남서쪽 산록인 북아현동을 능안리라 부른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능안리라는 지명은 금화산 자락에 의령원(懿寧園)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인데 의령원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라 불리는 혜빈 홍씨(惠嬪洪氏) 사이에 태어난 장자로서,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3세에 죽은 의소(懿昭)의 묘원(墓園)을 말한다. 그 위치는 지금의 북아현동 중앙여자고등학교 자리이며, 의소묘(懿昭墓)로 불리다가 고종 때 의령원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장되었다.

 

 금화산 산줄기의 끝자락에는 서대문에서 마포 쪽으로 넘나들던 떡전고개(餠市峴)로도 불렸던 애오개(阿峴)가 있다. 애오개를 넘어 신촌 쪽으로 가자면 굴레방 다리를 건너 큰 고개(大峴)’를 넘어야 하는데 지금의 아현동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의 이름을 따서 이화여대 앞이 대현동(大峴洞)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굴레방 다리는 큰 고개에서 흘러온 물줄기와 금화산에서 능안리를 따라 흘러온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일 뿐만 아니라 큰 고개를 넘어 신촌 쪽으로 가는 길과 마포 쪽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 위치한다. 이곳의 지세는 풍수지리적으로 큰 소가 길마는 안산에 벗어놓고 굴레는 이곳에 벗어 놓은 뒤 서강(西江)을 향해 내려가다가 홍익대 뒷산인 와우산(臥牛山)에 가서 누운 형국(形局)이라고 한다.

 아현시장 뒤편 즉 서강 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에 기대어 골목길을 맞대고 마을을 이루었던 전통부락은 지금은 뉴타운 개발로 모두 철거되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애오개는 조선시대 도성의 서남쪽 강화방면으로 가는 노선의 경유지이다. 숭례문을 나와 칠패시장을 지나 만리재 옆에 붙어 있는 약현과 애오개를 넘고 굴레방 다리를 건너서 큰고개를 넘어 노고산 북쪽을 돌아 나온 후, 와우산 북쪽을 지나 양화진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배로 한강을 건너 양천에 닿고 김포, 통진, 갑곶진을 거쳐 강화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이 강화로이며 조선의 제6대 간선도로이다.

 

 애오개를 지나 숭례문 쪽을 향해 있는 약현을 비껴 지나면 만리현(萬里峴)에 이르는데 이곳에 세종 때의 집현전 박사였던 최만리(崔萬理)가 살았다고 하여 만리현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양의 지세상 우백호의 끝자락인 만리현이 풍수지리적으로 백호(白虎)의 형상으로 그 세력이 급하고 움직이는 기운이 넘쳐난다고 본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이를 눌러 앉히기 위해 만리현이 바라다 보이는 관악산(冠岳山)에 호압사(虎壓寺)를 짓고 상도동 남쪽에 솟아 있는 국사봉에 사자암(獅子庵)을 지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관악산 옆에 붙어 있는 호암산(虎岩山)의 전설에도 나타나고 있다.


 만리현을 지나 용산 쪽으로 내려서면 청파동 뒷자락에 효창공원이 있다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묘역으로 백범(白凡김구(金九묘역삼의사(三義士묘역임정요인(臨政要人묘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원래 이곳은 정조(正祖)의 큰아들로 다섯 살에 죽은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인 효창원(孝昌園)이 있었던 자리로서 이곳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宜嬪성씨순조(純祖)의 후궁인 숙의(淑儀박씨숙의 박씨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가 안장되어 있었다일제 강점기 때 효창원의 모든 무덤은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겨지고 이곳은 소나무만 우거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때는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애국열사(愛國烈士)들의 묘역이 되었는데 효창공원 중앙 위쪽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主席)인 백범 김구 선생이 모셔져 있고, 동편은 삼의사 묘역으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의사가 모셔져 있고,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가묘(假墓)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삼의사 묘가 아니라 사의사(四義士) 묘인 셈인데 묘의 석축에는 의사들이 남긴 향기가 백세토록 영원하라.”라는 뜻으로 백범이 쓴 유방백세(遺芳百世)’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입구 바로 오른쪽의 임정요인 묘역에는 중국에서 순국한 이동녕(李東寧), 차이석(車利錫), 조성환(曺成煥)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최연 (사단법인 해아라 이사장)
젊은 시절 불교사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보겠다고 참으로 오랜 세월을 몸부림치다가, 혹여 변화를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정치에 잠시 기웃거리다가 나와서, 인문학에 재미를 더하고 있는데, 옛 동지들이 신대승의 기치를 내걸어 그 길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국민운동체인 ‘민주주의 국민행동’ 기획위원장,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생존을 위해 사단법인 ‘해아라’이사장,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서울학교, 고을학교 교장
편집진 편지
카드뉴스

2025년 2월 소모임 활동 소식

- 신대승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