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7화> ‘베트남 전투적 불교 군기지 장악하다’ 제1편

세계/아시아 -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 2017. 제11
 - 단식투쟁에서 소신공양으로, ‘폭력’투쟁의 전야

  - 1960년 베트남 정세 최대 변수된 남베트남 불교 운동

  - 부패 무능 응오 딘 지엠정권 몰락의 일등 공신

  - 지엠 암살 두고 증언 갈린 미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부통령



 불교도 운동, 베트남 정세를 좌우하다

 

 오늘날 베트남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종교적인국가 중 하나다. 2009갤럽조사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종교가 자신의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 이는 30%. 그 조사에서 베트남은 비종교적 국가 세계 7위에 올랐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30%라는 수치는 베트남의 식민종국이자 세속주의(Secularism) 가치를 법으로 강제하는 프랑스와 같은 수치다. 그렇다고 베트남의 세속성을 프랑스 식민통치가 남긴 유산으로 볼 근거는 없다. 그보다는 1975년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남북통일을 이룬 후 세속주의 국가로 발전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소위 맑시스트정부의 권위주의적 체제는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놓긴 했으나 종교활동에 대한 제약과 규율을 엄격히 해 놓았다. 종교 부흥이 제도적으로 차단된 베트남에선 종교에 근거한 국경일이 없다.

 

 그러나 식민통치 유산이 정치권력으로 계승됐던 60년대 상황은 달랐다. 냉전시대 한 복판에서 전쟁 중이던 베트남 영토 이남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뒤얽힌 내홍을 심하게 앓았다. 베트남의 전투적 불교가 선명한 족적을 남긴 건 바로 이 시기 남베트남에서다. 당시 남베트남 인구의 약 70-80% (900-1,100만 추정)가 불교도로 분류 되곤 했지만 이중 독실한 불교 신자는 약 2백만에서 250만명 정도로 파악됐다. 이에 반해 가톨릭교도는 약 150만 정도였다. 그럼에도 남베트남 국민 대부분은 비가톨릭정서와 정체성이 강했고 그런 맥락에서 불교도가 다수라는 표현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리 틀린 표현은 아니다. 부패한 가톨릭계 정권에 대한 저항을 주도한 건 불교도 운동이었고 다수 국민들은 그 배에 동승하고 지지했다.

 

 

 

 19544월 제네바 협정으로 분단 된 후 남베트남에선 왕족출신 총리 응오 딘 지엠(Ngo Dihn Diem, 이하 지엠혹은 지엠 정부”)이 총리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5년 그는 형식적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대통령을 자처했다. 지엠 정부는 집권 기간 (1955-1963) 줄곧 가톨릭에 대한 편애를 숨기지 않은 반면 불교에 대해서는 차별적인 지도자였다. 1958년 장황한 공식행사를 마친 후 성녀 마리아에게 국운을 맡기는 충성서약을 한 적도 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의(NSC) 대베트남 정책기구였던 남베트남 워킹 그룹’(South Vietnam Working Group 혹은 PDF6.참조)의 여러 보고서들은 남베트남 불교도 운동이 반 지엠 성향을 가졌음은 물론 반가톨릭 정서도 매우 강하다는 걸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다.

 

 또, 베트남 소수 가톨릭계는 식민시절부터 특혜를 입어온 지주계층과 관료들이 많았다. 성당이 소유한 땅은 토지개혁에서 제외됐으며 국가 공식 행사가 있을 때면 바티칸 깃발이 펄럭였다. 반면 불교도들은 사사건건 허가를 받아야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사소한 사원 증개축도 모두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런 사소한것에 대한 엄격한통제는 오늘날 미얀마 당국이 자국내 이슬람교도를 대하는 태도 일부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그와 같은 차별이 저항 없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1963년 남베트남 불교도들은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이 서서히 고조되는 가운데 격화되던 남베트남 불교도 운동은 60년대 베트남 정세, 특히 미국의 대베트남 정책의 중대 변수로 급부상했다.

 

 

 소신공양을 바베큐에 비유한 퍼스트레이디 : “가솔린만 낭비했다

 

 196358일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베트남 중부도시(남베트남의 북부) 후에(Hue)에서는 불교 행사가 예정돼 있었다. 지엠 정부는 이 행사에서 불교 깃발이 공개적으로 펄럭이는 걸 금지시켰다. 후에는 불교세가 강한 도시였다. 동시에 지엠 대통령의 형 응오 딘 둑’(Ngo Dinh Duc)이 천주교 주교로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불과 일주일 전 둑 주교 취임 기념행사가 있었고 바티칸 깃발도 휘날린 바 있어 깃발에 대한 차별은 뚜렷해 보였다. 게다가 지엠 정부는 이미 1957년 한 차례 부처님 오신날을 국경일에서 제외했다가 불교도들의 반발로 다시 복원한 적도 있다. 불교도들의 누적된 앙금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불교도들은 깃발금지 조치에 순응하지 않았다그들은 불교깃발을 펄럭이며 부처님 오신날 도심 행진을 예정대로 진행했다지엠 정권은 이를 무력으로 대응했다경찰의 발포로 9명이 목숨을 잃었고 14명이 부상당했다지엠 대통령은 공권력의 책임을 부인한 채 공산주의 테러리스트가 수류탄을 던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말했다불교도 시위대를 남베트남에서 활동 중인 공산주의 조직 민족해방전선(NLF, 일명 베트콩”) 세력으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들이댄 것이다그의 말은 성난 불심에 더욱 불을 지폈고 불교도들은 더 조직화된 저항을 이어갔다.


 

 

 

 시위를 주도한 건 불교도총연합’(General Association of Buddhist, 이하 “GAB”) 승려들이었다. GAB1951년 창립된 대승불교 조직으로서 그들 주장에 따르면, 1962년 기준 비구 회원만 3천명이고 비구니 600, 신도수는 무려 3백만에 달했다. 청년 신도수만 7-9만명 정도인 대규모 조직이었다. 이 조직에는 북베트남 실향민 출신 틱 탐 찬 (Thich Tam Chan) 같은 반공주의 성향의 승려도 있고 틱 찌 꽝(Thich Tri Quang) 같은 급진적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이들은 베트남 불교도 신앙 선언이라든가 가슴으로 쓰는 편지등을 발표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가시적으로 비폭력 원칙을 고수했지만 저항의지는 대단히 결연했다. 시작은 깃발에 대한 차별이었지만 목표는 점점 지엠 정권의 몰락으로 향했다. 그해 111일 군 쿠데타로 지엠 정권이 몰락하기까지 베트남 정세를 좌우했던 이 총체적 소요사태는 불교도 위기(Buddhist Crisis)’라 불린다.

 

 ‘불교도 위기6월 들어 승려들의 소신공양이 시작되면서 한층 더 심각해졌다. 첫 소신공양부터 쿠데타가 발생하기까지 약 5개월간 알려진 것만 총 7명의 승려들이 몸을 불살랐다. 그 첫 사례인 틱 꽝 둑(Thich Quang Duc) 승려의 소신공양은 역사적 상징으로 남아 있다. 611일 사이공 거리 한복판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내외신 기자들과 승려들, 군중과 경찰들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반신반의하며 모여들었다. 그 거리 한복판에서 한 승려가 틱 꽝 둑 승려의 몸에 기름을 부었고 불을 붙였다. 승려의 몸은 아무런 동요 없이 타 들어갔고 그곳의 모든 승려들이 엎드려 경의를 표했다. 이 분신 장면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와 함께 전 세계로 타전됐다. 남베트남 불교도 상황과 어지러운 시국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미국은 지엠 정부가 자신들이 전폭 지원해온 괴뢰정권이나 다름없지만 불교도들의 심기를 과하게 건드려 내치에 혼란을 야기하는 점을 못 마땅히 여겼다. 미국은 지엠 대통령이 자국민 탄압에 힘 쏟기보다는 선거 민주주의체제를 적당히유지하며 공산주의자 세력과의 전쟁에 심혈을 기울여주길 바랐다.

 

 

 

 

 그러나 지엠 정부의 상황 인식은 현실과 상당히 괴리돼 있었다. 이를 가장 잘 반영한 건 당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던 쩐 레 쒄’ (Tran Le Xuan, 이하 마담 누”)CBS 방송과의 인터뷰. 마담 누는 지엠 대통령의 동생이자 공식직함을 달지 않고 남베트남 군 특수부대’ (ARVN Special forces이하 특수부대”)를 지휘하던 소위 비선실세중 실세인 응오 딘 누(Ngo Dihn Nhu)의 아내다. 미혼인 시아주버니를 대통령으로 둔 덕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왔다. 마담 누는 문제의 인터뷰에서 승려들의 소신공양을 바베큐에 비유하는 등 후안무치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래서 불교지도자들이 뭘 성취했나요? 그들 여럿이 바베큐했고 그중 하나는 승려이지요. 불교도들이 그 승려들의 자신감을 악용한 거 아닌가요? 바베큐 한답시고 중요한 가솔린만 낭비했잖아요.”

 

 

응오 딘 지엠처리 두고 의견 갈렸던(?)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

 

 틱 꽝 둑 승려의 소신공양은 남베트남 시국에 큰 변곡점이 됐다. 바로 지엠 정권을 겨냥한 쿠데타 음모가 연기를 피기 시작한 것이다. 음모는 지엠 권력에 불만을 품어온 군인들이 머리를 맞대면서 시작했다. 육군 장성 뒁 반 민 (Duong Van Minh, 일명 빅민 Big Minh” ), 육군참모총장 쩐 반 돈 (Tran Van Don), 그리고 돈 총장과 사돈 지간이었던 르 반 킴(Le Van Kim) 3인방은 쿠데타 음모의 중심축이었다.

 

 이 문제를 미국과 처음 상의한 인물은 쩐 반 돈 육군참모총장이다. 돈 총장은 78 CIA요원 루시엔 코네인(Lucien Conein)에게 자신들의 쿠데타 계획을 알리며 협조를 구했다. 그는 계속되는 불교도 사태를 베트콩이 악용하지 않도록 군 차원에서 조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승려들은 시위를 계속하면서 필요하다면 자기희생적 자살을 더 이어가겠다고 한다. 극단적 불교도들은 지금 결연해 보인다. 지엠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소요사태를 이어가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쩐 반 돈 총장이 CIA 요원과 얘기를 나눈 지 채 24시간도 되지 않아 워싱턴의 CIA 국장 존 맥콘(John A. McCone)은 남베트남 군 쿠데타 계획을 케네디 대통령에게 브리핑했다. 그런데 이 브리핑에 오른 쿠데타 음모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정치세력들이 지엠 정부를 제거할 계획을 갖고 있었고 불교도 위기사태는 그들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그런 음모중 하나는 지엠 정부의 전 정보국장 쩐 킴 뚜옌’(Tran Kim Tuyen)에 의한 계획이었다. (박정희를 겨냥한 김재규 암살 계획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 정보국장의 쿠데타는 브리핑 다음날(7/10)이라도 실행할 뻔 했다고 문건은 적고 있다. 이 브리핑에서 존 맥콘 국장은 남베트남에서 불교도 문제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중대한지 강조했다.

 

 미 국가안보회의(NSC) 기밀해제자료에 따르면 이런 쿠데타 음모들을 브리핑 받은 지 한달 후인 그해 8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처음으로 쿠데타 지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11일 쿠데타가 발생하고 지엠 대통령과 마담 누의 남편이자 비선실세인 응오 딘 누가 다음 날 (11/2) 암살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암살발생 이틀 후인 114일 케네디가 개인적 소회를 남긴 녹음 자료를 들어보면 그는 지엠이 암살까지 되는 건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디엠과 누의 암살에 충격받았다. 여러 해 전 더글라스 판사(지엠에 호감을 갖던 인물로 지엠 암살 뒤 베트남 전쟁 반대입장을 강하게 구축했던 인물 필자 주)와 함께 지엠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개성이 아주 강한 인물이었다 [] 그는 적대적 환경하에서도 지난 10년간 자신의 나라 독립을 지켜왔다. 그가 죽은 방식이 너무나 끔찍하다.(지엠과 누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머리에 총을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필자 주)”

 

 반면, 당시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Lindon B. Johnson)의 소회는 달랐다. 소회가 달랐을 뿐 아니라 지엠과 누의 암살에 미국이 개입했는가라는 의문도 풀어주는 발언이 린든 존슨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196621일 당시 매카시 상원의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때는 이미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 린든 존슨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기다.

 

 기억하시나, 지엠은 부패한 정치인이고 죽어 마땅했다. 그래서 우리가 죽였다. 그 빌어먹을 악당들(쿠데타 군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지엠을 암살했다. 그런데 그때 이후 지금 정치적 안정이라곤 없고.”

 

 

 불교사원 침탈과 학살 후 이어진 미국의 베트남 정책 변화와 혼선

 

 한편, 지엠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소요사태를 이어가겠다던 승려들의 시위는 반 지엠 쿠데타 음모하던 군인들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그러나 쿠데타 실행을 위해서는 물적으로나 인적으로나 협치 세력이 필요했다. 이들은 우선, 쿠데타에 필요한 탱크 등 군사력을 주요 지역으로 집결하기 위해 지엠 대통령에게 계엄령 선포를 채근했다. <뉴욕타임즈> 1963116일자 사이공 쿠데타의 내막(Coup in Saigon Detailed Account)”(쿠데타 5일후)는 이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다. 쿠데타 음모 군인들은 지엠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는 톤 닷 딘’(Ton That Dinh) 중장을 구슬려 인적 물적 군사력 확보에 들어갔다. 톤 닷 딘 중장은 사이공 일대를 관할하는 제3군단(3 Corps)를 책임지고 있었다. 쿠데타 음모 세력은 딘 중장의 허영심과 명예욕이 응오 형제 권력을 배신할 수 있다고 봤고 쿠데타에 끌어들이기에 완벽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가히 그랬다. 그는 응오 가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가톨릭 정치 조직이자 사실상 응오 가문 권력 유지에 이용되던 칸 라오 당’(Can Lao Party, “인격주의 노동혁명당” Personalist Labor Revolutionary Party라는 뜻)의 민병대 대장도 맡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결국 반 지엠정권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됐다.

 

 821일 지엠 대통령은 쿠데타 음모 군인들이 채근한대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지엠이 단순히 군인들의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계엄령 선포가 불교도 탄압에도 효율적일 수 있을 거라 여겼고 군인들까지 채근하는 마당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날 밤 자정께부터 비선실세응오 딘 누가 이끄는 특수부대와 군은 불교사원 여러 곳을 동시다발로 침탈했다. 특히 사이공의 최대 사원 싸 로이(Xa Loi) 파고다에 대한 폭력적 침탈은 불교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사원 침탈로 승려와 불교도 신자 수백명이 사망 혹은 실종됐고 1,400명이 체포됐다. 침탈에 동원된 특수부대는 형식적으로는 남베트남군에 소속되어 있지만 사실상 응오 가문의 민병대 수준이었다는 게 여러 보고서들의 평가다. 사원 침탈을 현장 지휘한 건 레 꽝 퉁(Le Quang Tung)으로 응오 가문의 충신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싸 로이 사원 침탈은 지엠 정부의 몰락은 가속화됐다. 미국은 남베트남군이 불교 사원 침탈에 동원됐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 군은 대 반공전선에서 미국의 주요 파트너였다. 미국은 우선 대 베트콩 작전을 위해 레 꽝 퉁에게 쏟아붓던 지원금을 전면 중단했다. 그리고 사건 3일 후인 824일 미 국무성은 사이공 미 대사관 핸리 캐봇 라지(Henry Cabot Lodge, Jr, 이하 라지 대사”) 대사에게 보낸 케이블 (“Cable 243”으로 잘 알려짐, 사진 참조) 에서 응오 딘 누 제거에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권력이 누(Nhu)의 손에서 놀아나는 걸 더 이상 좌시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우선 지엠(대통령)이 누를 (알아서) 제거하고 가장 적절한 군 정치가로 대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게 좋겠군요. 당신(대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엠이 완고하게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는 지엠도 무사할 수 없을 겁니다.”

 

 케이블은 이어 미국이 남베트남 정부에 필요한 압력을 가해야 한다면서 그 첫번째 사항으로 (Nhu)가 계엄령을 빌미로 불교도를 탄압하는 걸 더이상 좌시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사실상 쿠데타를 승인한거나 마찬가지인 이 케이블은 미국무성 극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힐스만(Hilsman)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힐스만 케이블”(Hilsman Cable)로 불렸다. 그런데 케이블 작성 과정과 내용을 두고 논란이 불거졌다. 힐스만이 CIA 맥콘 국장은 물론 백악관과 미국무성의 주요 인사들과 상의 없이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국무성의 쿠데타 지원문제는 민감한 사항이었다.

 

 

 

베트콩불교도 운동에 침투한 건 사실

 

 해외의 불교 주류 국가들이 남베트남의 불교도 위기 상황에 공식적 목소리를 낸 것도 바로 사원 침탈 이후다. 196396일자로 작성된 CIA 특별 리포트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왕자는 이 문제를 빌어 지엠 정권 비판에 열을 올렸다. 남베트남 불교도 중 일부는 캄보디아계 크메르족이어서 묵과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태국에서도 일반 불교도들 사이에서 비판이 거셌다. 그러나 태국의 친미군사정권 사릿정부는 자국의 공산반군들이 이 문제를 이용할까봐 노심초사했다. 자국 공산당이 이 문제를 이용할까 두려워하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남베트남 불교도에 대한 연대 메시지는 불교+민족주의+극좌의 혼합이 낯설지 않은 스리랑카(당시 국명 실론 Ceylon”)에서도 전달됐다. 흥미로운 건 스리랑카 공산당(Communist Party of Sri Lanka, CPSL)미국 꼭두각시인 지엠 정부를 비난하며 시위를 주도한 15명의 승려들을 공산당 전위조직 소속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전위조직으로 볼만한 민족해방전선’(National Front for Liberation of South Vietnam)에 반정부 승려들이 어느 정도 연계됐는지는 선명하지 않다. 다만 연계 자체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고려해볼 때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첫째, 1963년 상반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지엠 정부의 대반군작전에 위축되는 중이었다. 불교깃발 시위가 벌어지기 전달인 19634월 그 위기의식이 꽤 높았다는 분석이다.

 

 둘째, 제네바협정 모니터팀인 국제통제위원회’(International Control Commission) 일원으로 북베트남 하노이에 머물던 폴란드 외교관 미에치스와프 마넬리’(Mieczyslaw Maneli)는 그의 저서 항복자들의 전쟁’(War of the Vanquished)에 관련 기록을 남겼다. “1963년 봄 여름 내내 (북베트남) 호치민 정부는 남베트남 지엠 정권과 미국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라놓으려던 중이었다. 따라서 남부에서 계속되는 불교도들의 반정부 시위사태에 남베트남 공산주의조직이 관찰만 하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셋째, ‘불교도 위기' 사태에 적극 동참했던 승려 틱 티엔 하오(Thich Thien Hao)는 남베트남 공산주의 조직 즉 민족해방전선의 고위 간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1974년 홍콩발 중국 외교 케이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19일부터 11일까지 북베트남을 친선 방문하는 중국외교단은 남베트남내 “(공산주의) 해방구인 꽝 (Quang Tri) 지방을 방문했다. 민족해방전선 꽝 치 지방 의장인 틱 티엔 하오승려가 (밑줄 필자 강조) 10일 중국 대표단을 위한 리셉션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1963628일 작성된 CIA 보고서는 틱 티엔 하오 승려가 민족해방전선과 연계돼 있는지에 대해 여전히 100% 확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민족해방전선은 여전히 중앙위원 명단에 틱 티엔 하오 승려 이름이 올려놓았는데 그는 베트남불교연합(Vietnamese Buddhist Association)의 의장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민족해방전선에 오른것과 관련해서는 (확인) 가능한 정보가 없다.”고 쓰여 있다.

 

 틱 티엔 하오 승려는 실제로 남부에서 활동하는 민족해방전선 간부였다. 그는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된 후 공산주의 정권이 유일하게 승인한 베트남불교승가협회의 부의장을 지내다 19977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편, 111일 정오 직전 드디어 반 지엠 쿠데타가 시작됐다. 이날 CIA 가 정리한 쿠데타 진행사항을 보자.

 

 사이공 시각 오후 1345분 쩐 반 돈 육군참모총장이 스틸웰(Stilwell) ‘베트남군사조력명령부 3(MACV-3)’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베트남 군고위 간부들은 모두 그와 함께 협동총력부(Joint General Staff, JGS) 본부에 있고 현재 쿠데타가 진행중이라고 알려왔다. 이내 곧 쿠데타 세력이 국방부, 중앙경찰서, 통신부와 라디오 방송국 등 주요 시설물을 장악했다. 쿠데타 군은 해병대, 공수부대, 장갑차부대 (Armored unit), 그리고 아무개로 구성돼 있다. (CIA 는 기밀 해제 문서라도 매우 민감한 부분은 공란으로 처리해 공개했다 필자 주)”

 

 그날 오후 16:30분경 지엠은 사이공 미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라지 대사에게 미국의 입장을 물었던 것으로 전해졌다라지 대사는 지엠과 누가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쿠데타군에 제안했음을 언급하며 이에 대한 지엠의 견해를 물었다지엠은 여전히 하야할 의지가 전혀 없음을 내비쳤다그는 자신이 여전히 국가 통수권자이며 국가원수로서 임무를 다할 것이라 말했다그리고 법질서 재확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도 답했다그러나 지엠정권은 이미 확실하게 몰락 중이었고 지엠과 누는 터널을 통해 대통령궁을 탈출했다그러나 다음날 (11/2붙잡혔다그리고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엠 정권 몰락 후 거리풍경은 퍼스트레이디 마담 누에 대한 불교도들의 정서를 잘 보여줬다. 군중들은 마담 누가 2만달러나 들여 세웠던 트룽 자매’ (Trung Sisters) 동상을 깨부수며 환호했다. 트룽 자매는 서기 1세기 중국지배에 반란한 후 40-43년 베트남을 지배했던 역사적 영웅들이다. 마담 누는 베트남 역사의 영웅을 동상으로 세우며 그 얼굴을 자기 얼굴로 박아 넣었다. 우상화 작업이었다. 후에(Hue)에서는 지엠 대통령의 형, 응오 딘 둑 주교가 세운 도서관의 책들도 불타올랐다.

 

 쿠데타와 암살, 그리고 거리 군중들이 파괴로 환호하는 동안 미대사관 안에서는 한 승려가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탁 찌 꽝 (Thich Tri Quang) 승려다. 그는 응오 딘 누가 이끄는 특수부대가 목숨을 노렸을 만큼 불교도 위기' 사태의 핵심적 인물이었다. 821일 사원침탈 및 학살사건 후 미대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찌 꽝 승려는 쿠데타 이후로도 끝나지 않은 불교도 운동의 중심인물로 더더욱 부상하게 된다.

 

**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8화에서는 <베트남 전투적 불교 군기지를 장악하다2- ‘내전 속 내전’>이 이어집니다.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이유경 기자는 태국 방콕에 베이스를 두고 아시아의 분쟁과 인권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2004년 이래 아프칸, 버마, 인도, 라오스, 태국 등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집중탐사취재를 했다. 그동안 <한겨레21>, 독일 등에 기사를 게재하였다. 2014년부터 KBS 라디오 방콕 통신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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