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행 3 _ 한국불교의 수행 및 전통적 수행법에 대한 성찰

생활수행/평화명상 - 강성식 (지지협동조합 상임이사) | 2017. 제10

1. 개념정의와 범주 구분 없는 수행이란 용어 남발

 

어떤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의견을 나누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설명하거나 의견을 나누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개념 또는 범주를 정의하여 동일한 개념의 의제를 설정하는 것이다. 동일한 개념정의를 통한 의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어야 배가 산으로 가지 않고 의견의 통일성을 찾는데 집중을 할 수 있고 시간을 허투로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불교에 있어서도 몇몇 중요한 용어나 단어에 대해서는 분명한 개념 정의와 범주 설정을 한 후에 의견을 개진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수행이란 용어 또한 마찬가지다. 수행에 대한 정의나 개념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같은 수행이란 용어를 쓰거나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생각하는 범주가 다르고, 논지가 전혀 다르게 흘러가게 됨으로 뜻을 모으기가 매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수행이라 하는 용어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말이기에 또한 그 정의를 내리고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같은 수행이란 용어를 쓰면서도 뜻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쓰고 있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말이 된다.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으로써의 수행은 붓다가 제시한 가르침과 방식으로 문제 있는 고통스런 삶()을 변화시켜 안온하고 행복한 삶(해탈(解脫), 이욕(離慾), 정토(淨土))를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즉 이고득락을 실현해 가는 삶이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수행은 문제 있는 삶이 무엇이고 왜 그런지를 알기 위한 행위(지혜행)가 당연히 포함되고, 해탈, 이욕, 정토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이상적인 불교적 인간상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행위(수신행)가 있어야 한다. 나와 너 우리가 하나의 운명공동체임을 깨닫는다면 나와 너, 우리를 연결하는 구조적 시스템인 사회를 변화시키는 행위(자비행, 정토구현행)도 마땅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수행의 개념 정의를 마음을 닦아 자기변화를 추구하는 것혹은 깨달음 성취를 위한 행위등으로만 이해하거나 일정한 형식의 수행법을 행하는 것만을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개념 정의를 하고 있다. 따라서 수행이란 용어를 같이 쓰고 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으며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해 가는 행위, 혹은 불교의 가르침이 개인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으로 잘못 이해시키거나 곡해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각인하고 이를 수정해가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의 수행은 지혜행에 치우쳐 있고, 평생 깨달음만 쫓다가 끝나버린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마치 수행의 전부인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현재의 참선수행 풍토는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평생 선방에만 앉아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 있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이는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고,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시키고 있다. 불교수행은 지혜행만으로는 목적을 성취할 수가 없다. 깨달음의 성취가 불교의 목적이라고 해도 지혜수행만으로는 깨달음이 성취될 수가 없다. 연기를 이해하여 자타불이의 이법을 깨닫는다면 왜 지혜행만으로는 깨달음이 성취될 수 없는지가 자명하게 드러난다. 때문에 불교수행은 지혜행과 자비행, 수신행과 정토구현행이 치우침 없이 조화롭게 실천되어져야 한다. 한국불교의 수행은 이러한 측면에서 재검토되어야 하고 구체적인 실천수행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2. 목적성을 상실한 수행

 

일반적으로 불교인의 머릿속에는 수행을 마치 어떤 정형화된 틀로서 생각함으로써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던 간에 수행자체가 목적화되어 버린다. 때문에 수행이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절, 염불, 참선, 주력, 간경 등의 단어들이다. 이와 같은 몇몇의 수행방법들이 수행의 전부인양 생각하고 불교인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수행방법들을 이루어 내는 사람을 불교인 혹은 불자라고 칭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불자라는 규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목적과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전도되거나 불교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다른 수 많는 방법들을 사장시켜버린다. 우리는 오랜 업으로 인해 다르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전통적인 몇몇 수행방법들이 불교인을 규정하는 전부인양 생각하여 교조주의적으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목적성을 상실한 전통적 수행방법들이 진정한 불교의 수행일 수는 없는 것이며, 이러한 규정을 가지고 불교인, 불자라는 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이다.

 

수행은 분명한 목적성을 가져야 한다. 수행은 지혜행과 자비행과 수신행과 정토구현행을 통해 이상적 인간상과 이상사회로 전환시켜 나와 세상 사람들이 이익 되고 안락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있다. 궁극적으로 이고득락의 삶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수행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궁극의 목적을 어떻게 성취해 갈 것인가를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혜행을 통해 얻어야 하는 것은 존재와 세계에 대한 실상을 명확히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으로서 무상 무아 연기의 이법을 깨닫는 것이다. 자비행은 연기적 관계를 체득함으로써 너와 내가 따로 떨어져 무관한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 정신을 체득함으로써 자비심을 무한히 증장시켜 나 혼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괴로움과 얽매임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아울러 정토구현행은 자타불이 정신을 바탕으로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다방면의 제도와 관습 등 고통을 유발하는 시스템과 환경을 변화시켜가는 것이며, 이러한 행들을 원활히 해나가기 위해서 내가 갖춰야 될 마음가짐, 태도 등을 습득하고 오랜 업으로 인해 잘못된 현재의 나를 변화시켜 가는 것은 수신행을 통해 얻어야 될 것들이다.

 

이와 같은 수행은 해야 될 우선순위가 있어 지혜행을 닦고 이어서 자비행을 하며, 다음에 정토구현행을 하는 식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원만히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이라고 일컬어지는 대한불교조계종에서 5대수행법이라고 설정한 것을 보면 수행의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5대수행법은 각각 참선, 기도, 염불, 간경, 주력이 그것인데, 이들 수행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수행법이 불교의 궁극의 길로 이끌어가는 수행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참선이나 간경은 그 목적성을 쉽게 알 수 있지만 기도나 염불, 주력이 내용적으로, 사상적으로 얼마나 불교적인 것이냐 에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어떤 목적(그것을 종단에서는 삼매라고 이름 짓고 싶어 하지만)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의 기도, 염불, 주력은 이해 할 수 있지만 간화선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는 조계종에서 5대수행법에 기도와 염불, 주력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라 할 수 밖에 없다. 기도와 염불, 주력을 통해 삼매에 든다고 하지만 삼매에 드는 것이 불교수행의 목적이 될 수 없을진댄 전통적으로 해왔다고 하여 중요한 수행이라고 내세워 의미 부여하는 것은 매우 옹색한 자기변명이다. 특히 깨침, 각성을 강조하는 조계종에서 지혜수행의 근본을 조용히 생각하는 것으로 바탕을 삼아 선정삼매를 통한 관찰, 통찰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 수 있지만 염불, 주력, 기도를 중요한 수행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수행체계를 세우는데 있어 지혜행을 위한 간경, 선정 수행과 대승의 육바라밀행 중 보시와 지계수행 등을 중심으로 지혜행과 수신행과 자비행들이 조화롭게 실천될 수 있는 균형잡힌 수행체계를 잡아가는 것이 훨씬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3. 관성적으로 행하는 수행

 

현재의 한국불교는 역사속에서 정형화된 수행이라는 것들을 우리의 생활속에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 실행하거나, 수행이 과정으로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법을 행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너무도 관성적이거나 맹목적으로 수행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마조선사와 남악선사의 대화는 이러한 관성적인 수행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마조도일 선사가 남악회양 선사 아래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마조는 날이면 날마다 좌선에 힘쓰고 있었다. 어느 날 남악이 다가와서 마조에게 물었다.

 

뭣하고 있는고?”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뭣에 쓰려고?”

부처가 되기 위함입니다

 

마조가 그렇게 답하자 남악은 마조 곁에 앉아서 기왓장을 주워 묵묵히 갈기 시작했다. 기묘한 일을 하고 있는 남악에게 놀란 마조가 물었다.

 

무엇하고 계십니까?”

기왓장을 갈고 있다.”

갈아서 어디에 쓰시렵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까 한다.”

기왓장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습니다.”

저런, 그건 알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좌선을 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가? 좌선을 해서는 부처가 될 수 없느니라.”

 

마조에게는 답할 길이 없었다. 잠시 후 마조가 남악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리하면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사람이 우차를 타고 가는데 우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대는 어찌하겠는가? 수레를 때리겠는가, 소를 때리겠는가?”

 

그런 가르침을 받자 마조는 깨닫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지금껏 수레를 때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여기서 남악 선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좌선을 하면 부처가 된다. 깨달음이 열린다는 마조의 선입견이다.

 

좌선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는 인간은 분명 좌선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좌선이 인간을 속박해 버리고 말았다는 뜻이다. 남악선사가 그것을 마조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즉 마조는 관성적으로, 수행을 위한 수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한국불교 수행자의 모습 또한 이와 같은 마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저 관성적으로 깨달음을 찾기 위해 참선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저 세상사로부터 벗어나고자 삼매의 경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행의 근본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

 

역사속에서 정형화된 수행이라는 것들을 우리의 생활속에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관성적으로 행하는 모습은 결코 올바른 수행일 수 없다. 불교의 수행에 있어서 고정화된 것들은 없으며 그것을 관성적으로 받아들여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불교수행자의 삶은 불타의 가르침이 나의 삶속에서 용해되어 나의 삶 자체가 불교여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불교인의 수행은 언제나 창조적일 수밖에 없으며 나의, 우리의 삶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4.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실천을 주장하는 수행

 

한국불교의 수행에 있어 가장 큰 병폐중의 하나는 깨달음과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문제이다. 깨달음이 이루어져야 실천행이 따를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몇 십 년씩 선방에 앉아 화두만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죽을 때까지도 깨달음을 몰라 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불교를 개인적이고 삶과 무관한 종교로 만든다.

 

깨달음과 실천은 유기적 관계이다. 깨달음은 실천행을 유발하고, 실천행은 다시 깨달음을 만든다. 확철대오하여 한 번에 모든 것을 안다라는 식의 깨달음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다. 불교의 실천과 수행은 시시각각 닥쳐오는 삶의 제 문제에 대해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어야 하는데,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 삶속에서 고정된 그림 속의 숨은그림찾기 하듯 나를 찾는다는 식의 깨닫는다는 것은 유아론적 세계관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깨달음의 실체가 있다거나, 어떤 경지의 정신세계에 이른다는 것은 그런 경지를 깨달음이라고 명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간화선에서 확철대오 한다는 것 또한 그런 경지를 스스로 깨달음이라고 설정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그들만의 세계이고, 그들만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내가 깨달아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깨닫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불교 혹은 불교의 깨달음이 일상적인 삶과 다른 어떤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깨달음을 삶속에 도움이 되는 그 어떤 것이 아닌, 마치 저 멀리 딴 세계에서 찾아야 될 파랑새로 인식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삶과 깨달음을 이원화 시키고 있는 것이며, 깨달음을 수행의 전 과정이 아니라 오로지 결과물로서만 받아들이게 한다. 무상 무아 연기의 이법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복잡다난한 삶의 현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삶의 제 문제에 대한 답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상 무아 연기의 창조적 활용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5. 개인중심 수행

 

불교는 오랜 세월 개인의 몸과 마음을 닦는 것에 방점이 있었다. 개인 중심의 대표적인 수행법은 선정수행이다. 선정수행법은 주로 불타재세시의 초기불교시대와 부파불교시대에 중심적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선정수행은 개인적 깨달음에 치우쳐있는데, 보다 정확하게는 불타의 교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보다 깊은 정신통일과 집중 그리고 그 세계를 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초기의 수행법으로 8정도를 들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8정도를 이해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은 선정수행이었다. 선정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마을과 떨어진 깊은 산속에서 홀로 행하였으며 선정수행의 담지자들은 주로 출가수행자였다. 이들의 수행의 목적은 이상적 인간상으로서의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행이 선정수행을 통한 삼매의 경지에 머무르며 개인의 안온을 찾는 개인중심으로 흘러가면서 변질되고 왜곡되어갔다. 이에 자타불이가 없는 개인의 안온이 있을 수 없다며 지혜와 자비행의 균형 잡힌 실천이 붓다가르침의 근본정신임을 강조하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나와 너와 우리가 함께 깨닫고, 함께 안온하며 행복할 수 있는 수행방법을 제시하게 되었는데 육바라밀, 사무량심, 사섭법 등이 그것이다.

초기불교와 부파시대의 은둔적이고 출가수행자 중심의 수행법에 반해서 대승불교시대에는 재가중심의 불교를 이루면서 수행법도 재가자들이 행해야 될 육바라밀 수행을 강조하였다. 이는 초기불교와 부파시대에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여 아라한의 지위를 얻는 것을 이상적 인간형으로 설정한 것과는 달리 개인과 전체,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그래서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설하고 그것의 수행으로서 육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불타의 가르침은 인간의 모습을 관계성속에서 여실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역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도 관계성속에서 풀어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대승시기에는 이러한 관계성에 중심을 두어 부파불교시대의 개인에 치우친 점을 극복하고 자타불이, 자리이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그것의 실천자이자 이상적 인간형으로서 보살을 내세우고 있다.

연기의 이법에 입각한 자타불이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여전히 다양한 수행법을 통해 개인의 안온을 추구하고 있다. 내 마음을 깨닫고 다스리면 된다거나, 혹은 일체유심조라면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온통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개인수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교역사 속의 대승의 뼈저린 교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수행, 개인의 깨달음을 얻는 것에서 나아가질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결국 수행에 대한 개념정립부터 다시 해야 됨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6. 수행과 생활의 이원화

 

수행은 현실의 생활과 동떨어질 수 없다. 수행은 생활속에서 이루어지고 적용되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불교적 인간형으로 개조시키는 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항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수행 따로, 생활 따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행은 수행대로, 생활은 생활대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행을 할 때는 고결한 모습으로 있지만 실재의 생활은 수행 때와는 별개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또한 수행기간에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서원하고 다짐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객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또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러한 수행의 모습과 더불어 잘못된 수행경향 중의 하나가 현실을 떠난 도피적 수행이다. 현실을 떠난 수행은 선수행의 맹점인데 수행을 오로지 존재와 세계의 모습을 깨닫기 위한 행위로서만 바라보거나 마음만을 찾는데 얽매이게 하여 인간의 삶과 마음, 존재의 모습과 인간의 삶을 일치하여 보지 못하고 존재의 모습이나 마음을 대상화시킨다. 또한 수행이나 수행의 결과물도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한 것으로 간주하게 하고 수행을 삶과 생활과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왜곡하게 만든다.

또한 현실을 떠난 도피적 수행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절이나 산으로 들어가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어떤 문제점을 인식했을 때 이의 해결을 위해 현실을 떠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잘못된 마음을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관조하기 위한 집중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일정정도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그러한 모습은 현실 도피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즉 어떤 문제와 부딪쳤을 때 객관대상 앞에 무기력하게 되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피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변명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수행은 객관현실이 변화해가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나를 변화시켜가야 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항상 현실의 삶속에 그 토대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의 모습들은 불교 수행이 생활속에서 실천해야 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실천을 강조하지 못했기에 빚어진 결과이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수행지침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하나 생활 속에서 실천해 갈 때 수행과 생활을 하나로 만드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다음 글의 주제는 수행을 통해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상” 입니다.

강성식 (지지협동조합 상임이사)
돌이켜 보면 지난 세월은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일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더욱 나락으로 떨어진 작금의 불교모습을 보면서는 삶이 처량해 지기까지 합니다. 이제 새로이 신대승불교운동을 통하여 이생의 마지막 인연의 불씨를 지펴보려 합니다.
현직 : 지지협동조합 상무이사
역임 : 대불련지도위원, 봉은사사무장, 사)불교아카데미/참여불교 사무처장, 달마사종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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