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제6화 – 라오스 편> 라오스의 전투적 불교, 공산반군과 손잡다)

국제연대 -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 2017. 제9

 

<라오스 승려들이 북부 샹쾅 지방 탐뷰(ThanPieu) 동굴 학살 추모제 기간 동굴을 방문하고 있다. 1968년 11월 24일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이 동굴에 피신해 있던 374명이 목숨을 잃었다. 50-70년대 라오스는 파텟 라오 공산주의 혁명 세력과 친미우파 정권 간에 전면 전이 벌어졌고 승려들은 공산주의 혁명진영에 적극 가담했다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연대한 전투적 불교의 중추적 역사로 남아 있다(© 이유경 2008)> 

 

 

 라오스는 전체인구 약 7백만명 중 67%가 불교도. 불교도 12%인 베트남을 제외하면 대부분 90%대를 웃도는 이웃 국가들에 비해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베트남, 라오스 모두 소위 공산주의 혁명을 거쳤고 오늘날까지 사회주의를 체제이념으로 공식 채택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라오스의 경우, 1975년 그 혁명정부가 들어선 이래 불교정화정책을 폈다. ‘우주의 기운이라든가 신령 (“Phi”) 숭배와 연계된 미신적 불교도는 불교도 아님카테고리로 전환됐고, 이에 따라 불교도 수가 줄었다는 분석이다. 라오 떵(Lao Theung) (혹은 Kha-노예라는 다소 비하의 뜻)으로 불리는 몬-크메르계 소수 고산족 애니미스트’(animist)들이 이에 속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또 다른 국가 캄보디아도 공산주의를 표방한 크메르 루주 집권(1975-1979)을 경험했다. 캄보디아는 라오스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라오스가 75년 이래 불교정화작업을 폈다면 같은 해 정권을 잡은 크메르 루즈는 극단적 공산주의를 광폭하게 적용하며 불교 말살정책을 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는 단명했고 그들의 집권 기간을 제외하면 캄보디아의 불교는 국교로 회복됐다. 오늘날 캄보디아의 불교도 인구는 95%로 보고된다.

 

 라오스의 전투적 불교는 이와같은 동남아 정치지형과 연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라오스는 캄보디아와 더불어 불교와 공산주의 접목현상이 나타난 최초의 나라로 꼽힌다. 그래서인지 미얀마, 태국 그리고 (동남아는 아니지만 소승불교 주류의) 스리랑카와 달리 라오스의 불교는 극우 민족주의 에 빠진 흔적은 없다. 물론 라오스에서도 민족주의와 불교는 전통적으로 동반해왔다. 예컨대 미얀마의 전투적 불교가 영국 식민지에 저항하던 불교민족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음은 앞서 미얀마의 전투적 불교 1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저항으로 인코딩하던 식민지는 끝난지 오래고 쇼비니즘적 전투주의를 과시하는 오늘날 불교민족주의는 미얀마 사회의 심각한 폐악으로 자리잡았다. 라오스에는 그와 같은 현상이 없다. 라오스 역시 식민지를 경험했지만 그 기간 불교와 민족의 이름을 내건 저항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1895,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국가를 보호령으로 선포한지 8년째 되던 해 대프랑스 저항을 조직했던 한 승려의 이름이 제한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차오 수티산 (Chao Southisan)이다. 하지만 그가 조직한 저항의 내용과 규모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름만 언급한 수준의 보고서가 전부다. 라오스에서 불교민족주의의 저항이 희미한 원인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교묘한 불교 육성정책이 부분 요인으로 분석된다.

 

 

 인도차이나 프랑스의 불교 육성’(?) 정책

 

 프랑스의 인도차이나반도 식민화는 1887년 시작되어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마감됐다. 이 기간 프랑스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세 나라를 아우르는 피식민영토통치를 위해 현지인들의 종교를 노골적으로 억압하기 보다는 식민통치에 유리한 방향으로 육성하는게 낫다고 봤다. 당시 프랑스어 교육기관이었던 극동 프랑스 학교’ (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EFEO)에 불교 경전어인 팔리어 과목을 개설하여 승려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한 건 그 한 예다. 캄보디아 EFEO에도 팔리어 과정이 있었다.

 

 프랑스는 또 라오스의 주요 불교사원과 건축물들을 개조하거나 재건축하며 보존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6세기 건축물로 라오스의 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원 프라 탓 루앙 (Pra That Luang)’도 이 시기에 개조됐다. 불교 도서관이나 왓 시사켓(Wat Sisaket)도 두번이나 재건축됐다. 이를 두고 프랑스 식민정부가 불교를 육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혹은 전통적 불교를 억압하고 새롭게 판을 구성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간에 견해차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대불교 정책은 피식민지의 종교와 문화를 공격적으로 다루던 영국식 통치와는 분명 차이를 보였다. 그 배경은 다음의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프랑스 식민정부는 불교정책을 통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간 경계를 허무는 것은 물론 세 개의 공국 (북부 루앙프라방, 중부 비엔티엔, 남부 참파삭)으로 나뉘어있던 라오스를 통합하여 인도차이나를 하나의 피통치체로 만들고자 했다. ‘인도차이나 불교의 정체성을 재 수립하는 건 식민정부에게 훨씬 더 수월한 통치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둘째, 시암(태국의 옛 국호)의 불교 - 특히 라마 4몽꿋왕1833년 왕자시절에 창시한 탐마윳파가 라오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의식한 결과다. 시암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방콕이 아니라 라오스나 크메르 지역이 승려 고등 교육의 중추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태국과 프랑스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점령 기간 (1887-1954) 두차례나 전쟁을 치뤘고 이 지역 일대 영토 일부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패권 다툼을 벌여온 사이다. 첫번째 전쟁은 프랑코-시암 전쟁’ (Franco-Siamese War) (1893) 으로, 두번째 전쟁은 태국의 국호명이 바뀐 후라 프랑코-타이 전쟁’(Franco-Thai War) (1940-1941)로 불린다. 오늘날 태국과 라오스의 국경선도 1893시암(태국)-프랑스 전쟁의 결과로 1907323일 맺어진 조약에서 확정된 것이다. 프랑스는 시암이 인도차이나 지역 특히 라오스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적극 견제해야 했다.

 

 그럼에도 대식민 봉기는 일어났다. 1901년 라오스 남부에서 시작하여 태국, 베트남 등지로까지 영향을 미친 이 반란은 푸미푼의 난’(Phu Mi Boun) 혹은 성자의 난’ (Holy Man’s rebellion)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반란이 식민정부의 불교 탄압정책에 대한 반동이라 볼 근거는 약하다. 혹은 불교로 이념 무장한 이들의 대식민 저항으로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와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 푸미푼 반란의 지도자 옹케오(Ong Keo)는 라오스 남부 오스트로 아시아계인 알락(Alak)’ (-크메르계 고산족) 으로 그가 바로 라오텅 출신이다. 그는 라오스 남부 지방 사라완 (Saravane)에서 불교 파라다이즈의 축복을 즐기는 신으로 추앙받으며 반란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흔히 도사로 묘사되곤 했는데 앞서 언급했듯 미신적 신앙과 불교가 결합된 이 소수민족의 특수성이 반영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반란은 19013월부터 시작됐다. 옹케오는 비록 1910년 사라완 지방의 식민지사인 자크 도플레이(Jacques Dauplay)에 의해 암살당했지만 반란의 여파는 대략 1936-37년까지 계속됐다고 전해진다. 푸미푼의 난은 1930년대 버마에서 발생했던 사야산 반란과 흡사한 면이 있다. (‘사야산 반란에 대해서는 버마/미얀마 2편 반제식민저항에서 이슬람포비아 폭동까지 참조). ‘무속신앙과 접목된 불교가 대식민 저항의 정신으로 활용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후 고산족 라오 텅들은 공산주의 무장 혁명 세력인 파텟 라오 (Pathet Lao) 라오인민해방군’ (Lao People’s Liberation Arm) 전선에 대거 모집 군단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편, 라오스의 전투적 불교는 태국의 경우와도 확연한 차이를 보였는데 특히 왕정주의에 대한 태도면에서 그렇다. 우선, 태국의 전투적 불교는 저항의 코드로 연결짓기 어려운 면이 있다. 앞서 푸미분 반란이 라오스, 태국을 두루 걸쳤다고는 하지만 태국의 전투적 불교틀에서 보자면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태국은 승가사회 상층부가 반동극우세력의 이념적 동지가 되어 불교 자체가 지배구조의 3대 기둥 중 하나로 존재해 온 국가다. 3개의 기둥이 똘똘 뭉쳐 지배질서를 재편하거나 권력을 공고히 하는 혼란기마다 불교는 전투성을 발현했다. 그게 바로 태국의 전투적 불교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체제의 최정점에 있는 왕실과 불교는 따로 떼놓고 상상하기 힘든 두 기둥인데 바로 이 점이 태국과 라오스 전투적 불교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다. 라오스 불교 자체는 왕정주의와 동반했지만 라오스의 전투적불교로 좁혀 보면 왕정주의와 결탁했다기 보다는 왕족일부세력 - 특히 왕자들과 손을 잡았다. 라오스 왕자들 일부가 공산주의 무장 혁명에 참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리하여 그 헉명전선에 왕자, 승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독특한 ‘3자 연대가 이뤄졌다.

 

 

 왕자승려공산주의자들의 3자 연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일대에서 연합군과 제국주의 대결을 벌이던 일본이 프랑스를 몰아내자 라오스에는 독립 아닌 독립이 왔다그러나 그해 8월 일본 패망 후 프랑스는 다시 식민진출의 기회를 노렸다. 1946년 10월 27일 프랑스는 식민지가 아니라 메트로 폴리탄 프랑스 (Metropolitcan France)”라는 변형된 지배구조를 내밀며 인도차이나 통치를 재개하려 했다이에 프랑스의 재식민화 시도를 필사적으로 막고자 민족주의 무장운동즉 라오 잇싸라 운동이 시작됐다1945년 10월 12일 이 운동을 창설한 이는 라오스 왕자 펫사라뜨 라따나웡사 (Phetsarath Rathanavongsa)그는 베트남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인 비엣 민(Viet Minh)의 영감을 크게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비엣 민은 45년 8월 이미 베트남 민주 공화국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한 후 라오스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재정은 물론 무기와 병사 그리고 군사훈련과 자문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40년대 후반 이미 라오스와 베트남 국경 정글에는 저항본부”(Resistance Bases)도 셋업을 마쳤다.

 

 라오 잇싸라 운동의 공개조직은 1945년부터 1년간 라오스 영토안에서, 46년부터 49년까지는 방콕에서 망명정부 형태로 존재했다공식적으로 보면 1949년까지 4년간 유지된 한시적 운동이지만 이후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된 채 그 명맥을 이어갔다온건파는 프랑스가 제시한 프랑스 연방내 자치국 안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다이 온건파를 이끈 건 왕자 수완나푸마(Souvanna Phouma)이다강경파는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며 베트남 비엣 민 세력과 손을 잡고 무장 투쟁에 돌입했다이 강경파를 이끈 건 수완나푸마의 이복형제인 또 다른 왕자 수판누웡(Souphanouvong) 과 현장 지도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푸미 웡위칫(Phoumi Vongvichi) .

 

 

<라오스 왕족 출신으로 파텟 라오(Pathet Lao)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수판 누웡(Souphanouvong, 사진 왼쪽)1978년 라오인민민주주의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루마니아 독재자 차추 세스쿠 방문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 출처 : Romanian Communication Online Photo Collection)>

 

 강경파는 이내 곧 라오 동부와 북 베트남 근방에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작은 게릴라 조직들과 결합하게 된다이렇게 규합된 무장혁명 세력은 라오스 공산주의 운동 즉 파텟 라오 (Pathet Lao)를 결성하게 된다비엣 민과 본격적으로 동맹하기 시작한 파텟 라오 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두 라오 이싸라 민족주의 운동시절 부터 관여해온 인물들이다파텟 라오에는 북 베트남의 인적 지원도 가세하게 된다. CIA 1950년 10월 20일자 리포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파텟 라오 전사들 (By Unknown - Kenneth Conboy: War in Laos 1954-1975, Carrollton, TX, 1994, ISBN 0-89747-315-9.,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0362963)> 

 

 “태국 동북부의 베트남 난민들은 지금 군사 훈련에 한창이다. 13세에서 35세 사이 사지 멀쩡한 남성들은 전부 비엣 민(Viet Minh) 군으로 모집되고 있다..(중략라오 이싸라 운동 (필자 강조과 비엣민 연합세력은 지금 비엥티엔 부근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다. (태국동북부 농까이 (Nong Khai,라오스 비엔티엔과 국경을 맞댄 태국 동북부 지방지방내 베트남 전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파텟 라오 당원이었던 한 몽족 남성이 CIA 비밀전쟁 기간 경험을 구술하고 있다. 8분에 한번꼴로 폭탄을 떨어지던 9년 비밀 전쟁 기간 대부분의 주민들은 동굴에서 살았고 하루 한두번 먹거리를 모으기 위해 동굴 밖을 나올 수 있었다. (© 이유경 2008)> 

 

 한편, 1953년 10월 22일 프랑스가 완전히 떠나자 라오스 정치세력은 중도파친미우파왕정세력 (이하 친미우파), 공산주의자 이렇게 세 진영으로 갈렸다세 진영 모두 왕족 출신 왕자들이 대표하고 있다중도파는 라오 잇싸라 운동의 온건파를 대표하는 수완나 푸마(Souvanna Phouma)친미우파는 분 움(Boun Oum)왕이공산주의 진영은 수판누웡이 각각 대표했다이중 권력을 잡은건 친미우파였다하지만 중도파의 쿠테타와 비엔티엔 점령, 그리고 친미우파의 비엔티엔 재수복 등이 이어지고 공산주의 진영은 무장혁명을 계속하면서 입헌군주국 라오스의 불안한 정세는 계속됐다세 진영의 연립정부 구성 논의가 계속됐으나 성공하지 못했다이런 가운데 라오스는 1962년 7월 23일 제네바에서 중립국임을 공식 선포됐다제네바 선언에 따라 라오스에 주둔 중인 모든 외국군사시설물과 군사인력은 철수해야 했다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북베트남은 파텟 라오와 동맹을 계속했고 미국은 이미 라오스에서 반공전선을 구축하며 비밀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USA’ 마크와 년도가 선명하게 보이는 라오스 비밀전쟁(1964-1973)의 잔해들. (© 이유경 2008)>

 

 1960년 12월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미 대통령은 퇴임직전 미중앙정보국 CIA(이하 “CIA”)가 라오스의 소수민족인 몽족을 대반공전선에서 지원하는 계획에 승인하게 된다그리고 1961년 1월 CIA 첩보요원 빌 라이어(Bill Lair)는 몽족 지도자인 방파오(Vang Pao)를 만나 지원을 개시했다. 1964년 2라오스는 파텟 라오를 한편으로 하고 친미우파와 중도파를 또 다른 한편으로 하여 전면전에 돌입했다그해부터 CIA는 1973년까지 비밀전쟁을 통해 호치민 루트로 연결된 파텟 라오 구역을 쉴 새 없이 공격했다선포되지 않은 그 비밀전쟁에서 미군 전폭기는 50만회 이상 출격으로 집속탄 2억 7천만 발을 포함하여 2백만톤이 넘는 폭탄을 중립국 라오스에 퍼부었다집속탄의 불발탄 비율은 약 30%에 이른다당시 투하된 집속탄 8천만 발이 전후로도 남아 여전히 라오스 국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라오스 비밀전쟁의 잔해들. CIA는 라오 공산주의 세력인 파텟 라오와 북베트남의 물자 수송로인 호치민 루트를 파괴하겠다며 중립국 라오스에 200만톤의 폭탄을 퍼부었다. 그 잔해들은 라오스 시골 마을 집짓기나 화분으로도 활용되며 불발탄으로 남아 라오스 국민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 이유경 2008)> 

 

 바로 이 내전기간 우파정부도 파텟 라오 공산혁명 세력도 라오스의 승가사회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보다 많은 승려들이 결집하고 지지를 보낸 건 파텟 라오 진영이었다파텟 라오 지도부인 푸미 웡치윗(Poumi Vongchivit과 수판누웡(Souphanouvong과 모두 불교가 갖고 있는 혁명적 사상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다특히 푸미 웡치윗은 1954년 파텟 라오의 정치국 라오 애국전선(NLHS)’에서 문화와 예술부장관을 맡으면서 불교의 혁명적 정치성에 대한 선전작업을 강화했다대중들을 조직화하려면 그들에게 영향력이 큰 승가사회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혁명 초기부터 승려들을 적극 끌여들였고 승려 정치의식화에 심혈을 기울였다그리하여 승려들은 파텟 라오의 무장공산혁명의 프로파간다 유포에 적극 동참했다이들은 공산주의와 불교가 모순적이지 않으며 불교적 은유레토릭들이 사회주의 프로파간다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예를 들면계급없는 이상적 공산주의를 불교의 미륵(Maitreya)신앙과 연계지어 설명하는 식이었다.

 

 파텟라오는 또한 승려들을 공산주의 종교 전선’ (Communist Religious Fronts)으로 규합했다이 종교전선을 통해 파텟 라오는 비엔티엔처럼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의 승려들까지 접선할 수 있었다전쟁 말미였던 1973년 2월 불교전선 지도부인 마하 쿠 수완나메띠’ (Maha Kou Souvannamethi) 승려와 푸미 웡치윗이 비엔티엔의 영향력 있는 승려들을 찾아갔던 건 좋은 예다이 시기는 비엔티엔의 라오 정부와 파텟 라오 공산주의 진영은 연립정부 구성을 논의하던 때였다. 1973년 3월 21일 CIA 기록에 나와있는 이 내용에 따르면 파텟 라오는 비엔티엔은 물론 정부통치구역에 거주하는 승려들이 라오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정부가 자신들과 평화협정을 맺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푸미 웡치윗은 비엔티엔 내 친 파텟라오 지지승려들’ 리스트를 주문하기도 했을 만큼 승가사회를 끌어들이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1974년 4월 19일 미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사무국이 본국에 보낸 텔레그램은 마하 쿠 수완나메띠 승려가 주로 중도 진영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지만 그가 비밀스런 공산주의자라는 건 거의 분명하다고 적고 있다.

 

 

 공산주의 혁명 선전대가 된 승려들

 

 라오스 승가사회특히 고위직 승려들이 공산주의 진영에 더 기울었던 건 파텟 라오 운동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유도 있지만 내전이 전면전으로 흐르기 전부터 친미우파 정부에 대한 승려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었다. 1959년 5월 우파정부가 새로운 승가법을 통과시킨 전후의 상황은 이를 말해준다이 법에 근거하여 우파정부는 친 파텟라오 승려인 마하 쿤 마니옹(Maha Khun Manivong)을 그가 맡고 있던 승가사회 최고위직에서 합법적으로’ 해고했다파텟라오와 협력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원과 불교기관들을 감시하며 소속 승려들을 좌천시키는 한편 반공친미 세미나를 열어 좌파승려들에게 강제 사상교육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 파텟라오 승려들의 행보는 약화되지 않았다비엔티엔 팔리어 학교 교장이었던 부아캄 보라펫 (Buakham Voraphet) 승려는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등 급진정치사상 교육을 편 것으로 유명하다그는 파텟라오 정치국인 라오애국전선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인물로 이미 프놈펜 유학 시절부터 반프식민 운동에 동참하여 4개월 징역을 살았던 정치 승려다부아캄 승려처럼 공산주의 진영에 가담한 승려들 중에는 유학파가 적잖았다.

 

 1975년 파텟라오 혁명세력이 중앙정부를 장악한 이래 라오스불교의 이데올로그로 통했던 마하 캄탄 텝부알리(Maha Khamthan Thepbuali)도 그런 경우다그는 50년대 방콕에서 불교 심리학을 공부한 후 귀국한 이래 급격히 정치적 승려의 행보를 보였던 인물이다또 마하 위칫 싱가랏(Maha Vichit Singhalat)은 50년대 인도에서 공부한 후 파텟 라오 정치국인 라오애국전선’(Neo Lao Haksat, NLHS)에서 정치활동을 해왔다그는 1975년 이래 파텟 라오 정부하에서 승왕을 지냈다.

 

 CIA의 프런트 조직이자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던 <아시아 파운데이션>은 1964년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파텟라오는 매우 잘 조직화되어 있고잘 교육 받았으며불교 관련 문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총체적으로 볼 때 라오스에서 불교가 공산주의의 대항마로 되긴 어려워 보인다파텟라오는 승가사회 내부에 상당히 깊이 침투해 있다

 

 한편파텟라오 지도부에 왕족출신들이 참여한 점 또한 불교와 공산주의를 접목시키는데 편의적 논리로 작용했다고타마 붓다 역시 왕족 출신이지만 부귀영화를 버리고 계급없는 사회를 꿈꿨던 혁명적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이런 삶이 파텟라오 지도자 수판누웡에게 그대로 오버랩 됐던 것이다레드 프린스라는 별명을 얻었던 수판누웡은 실제로 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8개국어에 능통하고 영민한 공산주의 혁명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그는 1946년 라오 잇싸라 시절 대프랑스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1959년에는 라오스정부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던 중 교도관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전도하여 이듬 해 5월 그들과 함께 탈옥했다이 탈옥 무리가 300마일을 걸어 파텟라오의 정글로 돌아왔던 건 매우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 몽족 마을에서 아이들이 전쟁 놀이를 하고 있다. 라오스는 50-70년대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파텟 라오 공산혁명 진영에는 라오스의 승려들, 그리고 CIA 비밀전쟁의 용병으로 알려진 몽족도 일부 참여하고 있었다. (© 이유경 2008)> 

 

 1975년 4월 1파텟 라오가 비엔티엔에 입성하기 약 넉달여전 CIA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수판누웡의 인기가 치솟는다많은 라오인들이 이 왕자를 단순히 공산주의에 조종당하는 인물로 보지 않는다그는 라오스에서 진정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수판누웡의 강렬한 개성과 그의 출신 성분 모두가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파텟 라오 운동 초기부터 수판누웡은 공산주의 혁명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라오민중들에게 비춰졌다많은 사람들이 그가 언젠가 정부의 수장이 될 것이라 예측했다

 

 예측은 현실이 됐다. 1975년 8월 23일 파텟라오는 마지막 남은 비엔티엔으로 입성하면서 라오스 전역은 공산주의혁명세력의 손에 넘어갔고 그는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그해 12월 2일 라오인민혁명당(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은 비엔티엔 입성을 축하하며 대규모 집회를 벌였다집회장소는 한때 프랑스 식민정부가 개조했던 탓 루앙 사원이었다라오스의 혼이 깃들어 있는 그 사원으로 승려들세속적(비종교적정치 세력들과 혁명 세력 모두가 모여들였다공산주의 혁명 승리집회를 불교사원에서 치른 건 파텟 라오 지도부의 신중한 선택이었다.

 

*<아시아의 전투적 불표 7-베트남 편>에서는 베트남의 전투적 불교군사기지를 장악하다’ 편이 이어집니다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이유경 기자는 태국 방콕에 베이스를 두고 아시아의 분쟁과 인권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2004년 이래 아프칸, 버마, 인도, 라오스, 태국 등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집중탐사취재를 했다. 그동안 <한겨레21>, 독일 등에 기사를 게재하였다. 2014년부터 KBS 라디오 방콕 통신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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