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길을 걷다-21> 응봉 산자락 따라 동궐과 종묘를 걷다.

인문/기행 - 최연 (사단법인 해아라 이사장) | 2017. 제9

 

삼각산(三角山)의 세 봉우리인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에서 시단봉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석가봉, 용암봉, 시단봉 지나는데 한줄기는 문수봉에서 서쪽으로 의상능선(義湘稜線)을 따라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지나 의상봉까지 북한산성의 남쪽부분을 이룹니다.

다른 한줄기는 보현봉(普賢峰)에서 남쪽으로 도성(都城)을 향하여 그 지맥을 뻗었는데 형제봉(兄弟峰) 지나 보토현(補土峴)에서 급격히 낮아졌다가 구준봉(狗蹲峰) 건너 백악(白岳)에 이릅니다.

다시 본줄기는 남쪽으로 경복궁(景福宮)을 향하여 그 정기를 한껏 부려 놓았고 서쪽으로는 인왕산(仁王山)으로 이어지면서 한양 도성의 우백호(右白虎)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낙산(駱山)으로 이어지면서 좌청룡(左靑龍)을 이루었으나 좌청룡의 산세가 우백호에 비하여 급격히 낮아져 여러 가지 비보책(裨補策)이 마련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산세가 허약한 좌청룡 산줄기에 북쪽 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을 지나 말바위 아래에 예사롭지 않은 봉우리가 하나 솟아 있으니 이를 매봉우리 즉 응봉(鷹峯)이라고 합니다. 응봉은 한양도성의 좌청룡 산줄기에 있는 봉우리지만 그 산세는 도성 안쪽인 남쪽으로 힘차게 뻗음을 이어가면서 동궐(東闕)인 창덕궁, 창경궁과 국립대학인 성균관, 그리고 역대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宗廟)를 품고 있습니다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응봉의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서 있습니다.

 

궁궐은 그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는데 임금이 상주하면서 통치행위를 하는 곳을 정궁(正宮)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양궐(兩闕)체제로서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북궐(北闕)인 경복궁(景福宮), 그 이후에는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이 정궁 역할을 했습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조선 초기에 태종 이방원에 의해 이궁으로 작게 건립된 궁궐입니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경복궁을 세우고 고려의 모든 기득권이 응집되어 있는 개경(開京)을 버리고, 마침내 한양으로 천도(遷都)하여 힘찬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원에 의해 자행된 1왕자의 난으로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두 아들인 방번(芳蕃)과 방석(芳碩),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고 있는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등을 참살하는 비극이 벌어지자 태조는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납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정종은 피비린내 나는 경복궁이 싫어서 개경 근처에 있는 생모인 신의왕후(神義王后)의 묘를 참배하고는 그대로 개경에 눌러 앉았습니다. 결국은 개경환도(開京還都)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원은 경쟁관계에 있던 형 방간을 제거하는 2왕자의 난을 일으켜 스스로 세자가 되어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받고 바로 한양천도(漢陽遷都)를 결심하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상왕(太上王)인 태조 이성계의 뜻을 받들어 한양천도를 단행합니다.

그런데 원래 있던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새롭게 이궁(離宮)을 하나 더 지어 창덕궁이라 명명하고 그곳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아마도 1차 왕자의 난 때 많은 사람을 참살한 현장인 경복궁이 꺼림직 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태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세종이 경복궁으로 다시 이어하여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까지 경복궁은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의 3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宣祖)는 머무를 곳이 마땅치가 않아 임시방편으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私邸)였던 정릉동 행궁(行宮)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궁궐 중건 사업에 착수 하였으나 그 복원대상이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이었습니다. 풍수가들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건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따른 것입니다. 선조는 창덕궁의 복원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은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구하고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짓고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창덕궁은 고종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될 때 까지 조선의 또 하나의 정궁으로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복원해 놓고도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경운궁과 창덕궁 사이를 수시로 오갔으며 더 나아가서 재정상태가 어려운데도 왕기가 서려 있다는 인왕산 아래에 경덕궁(慶德宮 지금의 경희궁)과 인경궁(仁慶宮)을 새로 짓는 등 궁궐 짓기에 몰두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궁궐을 무리하게 많이 지은 이유는 정비(正妃)의 소생이 아닌 첩빈(妾嬪)의 소생이라는 출생의 약점과 장자(長子)가 아닌 차자(次子)로서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의 우여곡절, 그리고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의 책임을 다하면서 겪었던 많은 고초들을 극복하기 위해 군왕의 권위를 세우려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비 소생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시켰으며, 궁궐을 새로 짓고자 무리하게 재정을 조달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등 서인에게 빌미를 주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은 결국 폐위되었습니다. 이렇듯 새로 지은 정궁의 첫 주인은 참혹하게 그 권좌를 찬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창덕궁의 아픔은 이어지는데, 조선의 모든 주권을 침탈한 일본은 명목상의 황제인 순종을 창덕궁에 꼭두각시로 앉혀 놓고 모든 권력을 농단하였습니다. 이때 창덕궁의 전각들은 태반이 훼멸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일본 관리들의 향응을 위한 장소로 탈바꿈하였습니다. 또 차량통행을 위해 대부분의 계단을 흙으로 덮었고 자동차가 정차할 수 있도록 전각의 출입문 앞에 지붕이 달린 현관을 달아내는 등 궁궐의 구조와 형태를 철저하게 훼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금만이 노닐 수 있었던 후원(後園)을 일반인에게 공개 관람시킴으로서 조선왕실의 위엄을 실추시켰는데 그나마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창덕궁은 주인 잃은 궁궐로 쓸쓸하게 남게 되었습니다. 창덕궁은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정궁(正宮)으로 역할을 하며 격변하는 역사의 중심에 서서 사육신의 참변, 연산군과 광해군의 패륜, 인조반정(仁祖反正),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그리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를 묵묵히 지켜보았습니다.

 

같은 정궁이지만 경복궁과 창덕궁은 그 전각의 배치가 확연히 다릅니다. 경복궁이 중국의 법식에 맞게 정문, 중문 정전, 편전, 침전이 남북 직선축 상에 대칭으로 자리 잡은 인위적인 공간배치인 반면에, 창덕궁은 모든 전각들이 지형조건에 맞게 비대칭으로 자리 잡은 자연스러운 공간배치입니다.

 

창경궁(昌慶宮)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지금의 창경궁 자리에 수강궁(壽康宮)을 짓고 그곳에 살았던 것이 그 연원으로 성종은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며 정사를 보았습니다만 이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정궁인 경복궁보다는 무척 비좁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종에게는 할머니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작은 어머니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등 세분의 대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처소가 따로 필요해서 창덕궁에 붙어 있는 수강궁 터에 새롭게 지은 것이 별궁(別宮)으로서 창경궁인 것입니다.

별궁으로 창건되어 정궁으로서의 역할은 못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덕궁이 정궁의 역할을 할 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창경궁도 정궁의 보조역할을 담당하며 당당히 정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으나 광해군 때 중건하였고 다시 인조 때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탔으나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 지어 놓고 사용하지 않은 인경궁의 전각들의 목재를 활용하여 다시 지었습니다.

창경궁에서도 여러 사건이 일어났는데 숙종 대에는 인현왕후(仁顯王后)와 장희빈(張禧嬪)의 갈등과 반목의 현장이었고, 영조 대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정치적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의 현장이었습니다.

낙선재(樂善齋) 부근에 있었던 취선당(就善堂)은 장희빈이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하던 곳이었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간의 지옥 같은 고통을 겪었던 곳은 문정전(文政殿) 앞뜰입니다.

이 시기에는 낙선재(樂善齋)가 창경궁의 일부였습니다만, 새로이 담장을 쌓아 창덕궁의 일부로 만들었고 창덕궁 후원의 일부였던 춘당지 또한 담장을 둘러 창경궁에 속하게 하고 그곳에서 뱃놀이를 하였습니다. 함께 어울려 있던 종묘와 동궐 사이를 가로 질러 신작로를 내서 그 둘을 갈라놓기도 했습니다.

 

창경궁은 고종 대까지는 본래의 모습을 유지해 왔으나,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궁궐 전체를 공원화시키고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꾸고 일본의 국화인 사꾸라를 심고, 심지어는 동물원까지 조성하여 유원지(遊園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마주보고 있는 서울대학교 병원 언덕배기가 함춘원이 있었던 곳으로 함춘원(含春苑)이란 궁궐에 인접해 있는 작은 언덕입니다. 이곳은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민가(民家)를 짓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금하였으며, 나무를 심고 가꾸어 보호하는 궁궐에 딸린 동산인 유원(囿園)을 말함인데 궁궐 가까이에 있는 동산에 오르면 궁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취해진 조치입니다.

이러한 유원은 창경궁의 동쪽인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 창덕궁 서쪽이면서 경복궁 동쪽인 지금의 북촌일대의 언덕배기, 경희궁 남쪽이면서 경운궁 서쪽인 러시아공사관 자리의 세 곳에 있었습니다.

 

북촌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조그마한 한옥(韓屋)을 다닥다닥 지어서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러시아 공사관 자리는 상림원(上林園)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으며,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는 함춘회관(含春會館)이라는 건물이름으로 그 내력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곳 함춘원에는 경모궁(景慕宮)이라는 또 다른 사적(史蹟)이 하나 남아 있는데 정조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사당(祠堂)입니다.

정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에 머물면서 경모궁을 가기 위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모궁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문을 내었습니다. 이 문의 이름은 월근문(月覲門)인데, 매달 삼가 찾아뵙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묘(宗廟)<주례(周禮)>에 나오는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社稷)을 둔다(左廟右社)”의 배치원칙에 따라 정궁인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 잡았는데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追尊王)과 추존왕비의 신주(神主)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조선 초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가 한울타리 안에서 문을 통하여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만 일제강점기 때 궁궐을 훼손하기 위해 종묘와 동궐(창덕궁, 창경궁) 사이에 신작로를 내며 단절시키고 도로 위로 일본식 구름다리를 놓고 그곳으로 통행하게 하였습니다. 최근 차가 다니는 도로를 터널로 덮고 그 위로 나무를 심어 동궐과 종묘를 잇는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종묘에는 신주를 모시는 곳이 두 곳인데 정전(正殿)과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입니다. 정전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등 49위를, 영녕전에는 16위의 왕과 18위의 왕후 등 34위의 신주를 모시고 있습니다. 

종묘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으로 창엽문(蒼葉門)으로도 불립니다. 북문도 만들어 창덕궁의 동남 협문과 통하도록 하였으며 종묘 안에는 신주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 외에 제사를 준비하는 많은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제례(祭禮) 때 임금이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는 망묘루(望廟樓), 향축(香祝)과 폐()와 제물을 보관하고 제관(祭官)들이 대기하던 향대청(香大廳), 제례를 올리기 전에 임금이 목욕재계하는 어숙실(御肅室), 제례 때 사용하는 제물(祭物)과 제기(祭器) 그리고 운반기구 등을 보관하고 음식을 장만하던 전사청(典祀廳), 제사를 담당하던 관원과 노비들이 거처하던 수복방(守僕房), 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대기하던 악공청(樂工廳), 음식을 차리기 전에 제물을 심사하던 찬막단(饌幕壇), 제례 때 사용할 물을 긷던 제정(祭井), 제례 때 사용한 축()과 폐()를 불사르는 망료위(望燎位)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묘 안에는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세 곳이 있는데, 역대 왕들의 배향공신(配享功臣) 83위를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춘하추동 네 계절을 주관하는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칠사당(七祀堂), 고려의 마지막왕인 공민왕을 제사 지내는 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이 그곳입니다.

 

종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익선동은 1930년대 주택경영회사를 운영하던 정세권이 북촌에 이어 두 번째로 도시형 한옥마을로 개발한 곳입니다. 대지가 넓은 북촌에는 영호남의 지주들이 정착하여 부촌이 형성된 반면에, 익선동은 15평 안팎의 작은 한옥들로 주로 서민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한옥의 형태는 서민들의 삶에 맞게 변형된 퓨전형식으로 자형, 자형, 자형 외에 지금의 아파트 평면처럼 네모난 모양도 있어 일제 강점기 시대의 변형된 다양한 한옥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사저(私邸)인 운현궁(雲峴宮)은 그의 아들 고종이 출생하여 12세까지 성장한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면서 임금의 잠저(潛邸)라는 이유로 의 명칭을 받게 되었습니다. 운현(雲峴)은 구름재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서운관(瑞雲觀-뒤에 관상감으로 개칭됨)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계동 현대사옥이 서운관 자리였으며, 그 앞 언덕배기가 구름재(雲峴)이었습니다.

현재 운현궁에는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我在堂),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사당(祠堂), 고종이 창덕궁(昌德宮)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수 있는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覲門)이 있었으나 모두 혈려 없어지고,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안채인 노락당(老樂堂), 별당채인 이로당(二老堂)만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운현궁 동쪽에는 양관(洋館)도 있는데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李埈)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되었으나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純宗)의 아우인 의친왕(義親王)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으나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의 건물 일부로 쓰이고 있습니다.

최연 (사단법인 해아라 이사장)
젊은 시절 불교사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보겠다고 참으로 오랜 세월을 몸부림치다가, 혹여 변화를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정치에 잠시 기웃거리다가 나와서, 인문학에 재미를 더하고 있는데, 옛 동지들이 신대승의 기치를 내걸어 그 길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국민운동체인 ‘민주주의 국민행동’ 기획위원장,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생존을 위해 사단법인 ‘해아라’이사장,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서울학교, 고을학교 교장
편집진 편지
카드뉴스

2025년 2월 소모임 활동 소식

- 신대승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