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행 2 _ 수행의 개념정의와 문제의식

생활수행/평화명상 - 강성식 (지지협동조합 상임이사) | 2017. 제8

 

 

 

 

 인간의 보편적 삶과 행복

 

 인간의 궁극적 지향을 가장 함축적이고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 행복(幸福, Happiness)이라는 단어이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인류역사의 공통 관심사였고, 모든 종교의 지향점도 내용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 또한 인간의 삶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것이고, 목적은 결국 인간의 행복한 삶이다.

 

 행복(幸福)은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이 편안하거나 또는 희망을 그리는 상태에서의 좋은 감정이라고 사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각각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행복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행복에는 '만족' '기쁨' '즐거움', '재미', '웃음', '보람' '가치감' '평온감' '안정' '의욕' '희망을 그림' 등의 여러 요소가 포함된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행복감은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은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행복의 조건 또한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자신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다. 보통 행복은 원하는 것과 가진 것의 조화로움으로 나타나는데, 자신이 가진 것, 나누기 원하는 것으로 그 행복감의 척도를 매길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에 비해 가진 것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행복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함을 높이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그리고 가진 것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것이란 결국 나의 욕구, 욕망을 얘기하는 것이고 이는 다분히 개인적인 것도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공동체에 대한 것도 있다.

 

 인간의 보편적 삶의 과정을 크게 몇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첫째는 존재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일들이다. 이는 인간이 생명을 계속해서 연장하고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제반 활동이며 보다 더 완전체를 위해 끊임없이 진화 발전해 가는 일이다.

 둘째는 의식주를 획득하기 위한 활동이며셋째는 지식과 기술의 습득 및 능력개발을 위한 활동이며넷째는 자아실현을 위한 다양한 창작활동, 개발활동, 취미활동, 가치의 실현을 위한 활동 등이며다섯째는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맺음을 위한(가정, 사회 등) 활동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원활히 해나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보편적인 삶의 과정속에서 일관되게 관통되어 온 행복의 조건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일들이다. 물질적 풍요와 여유로움, 편리함과 안온함, 고통스럽지 않고 즐거운 것,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오랫동안 살고자 함, 화목한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 나의 할 일, 하고자 하는 바의 실현(자아실현)과 장애의 극복, 자유, 평등, 평화 등 보편적 가치의 실현, 문화 취미활동, 기타 일상의 성취감 등 소소한 행복 등이 그것이다.

 

 불교에서의 행복, 이고득락의 삶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행복의 감정조차도 머무르지 않고 항상 변하는 것이기에 완전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행복은 깨달음이 전제된 삶이다. 붓다께서는 무상, 무아, 연기의 이법을 모르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전도몽상하게 되고, 전도몽상은 계속해서 갈애와 집착을 낳고 끄달리게 되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붓다는 괴로움, 불행을 유발하는 근본원인인 무명으로부터 벗어나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 안온함을 성취하는 것을 인간최상의 행복이라고 하였다.

 대길상경에는 인간최상의 행복에 대한 붓다의 말씀이 있다. 무엇이 인간 최상의 행복이냐는 물음에 붓다께서는 조목조목 최상의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것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식을 배우고 기예를 익히며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부모를 봉양하고, 아내와 자식을 잘 돌보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사람을 사귐에 현명한 사람과 사귀며 공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좋은 환경에 살며 공덕을 쌓고, 바른 서원을 세우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친족과 이웃을 위해 보시하고 돕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악행과 비난받을 일을 하지 말고 바른 행위을 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규율있는 생활(계율)을 하고 이롭고 즐거운 말을 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겸손하고 만족함을 알고 세상에 감사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일을 함에 인내하고 온화하게 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진리)을 듣고 배우며 논하고 전하는 삶이 최상의 행복이다. 청정한 행을 닦아 자기를 잘 다스리고, 사성제의 진리를 이해하여 안온하면 이는 더 이상 얻기 힘든 인간 최상의 행복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행복관은 불자가 실천해서 구현해야 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보편적인 행복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사성제 가르침의 실천으로서 무명으로부터 벗어나 집착과 갈애를 벗어야 함이 강조되는 것은 붓다 가르침의 특징이면서 행복을 찾아가는 불교수행의 길, 즉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불교의 이상적 인간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매우 의미 있게 살펴야 될 가르침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후세 제자들에 의해 깨달음만 너무 강조되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치 않게 여겨진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행복이 보편적인 인간의 행복과 어떻게 다른지 잘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중요하게 강조하지도 않았다. 붓다가 제시하는 행복한 삶이 속세의 행복과 어떻게 다른지, 깨달음과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 그리고 행복한 삶을 실천해가는 길로서의 수행이 어떻게 관계설정 되는지를 잘 살펴서 가르침을 전해야 생활 속 불교의 보편성을 확보 확대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의 개념정의와 목적

 

 붓다는 의사이며 길잡이다

 

 불교경전에서는 붓다에 대해 의사와 같으며 길을 제시하는 길잡이와 같다고 자주 비유한다.

 

 "나는 의사와 같아 병을 알고, 약을 말하는 것이니, 먹고 안 먹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다. 나는 길잡이와 같아 좋은 길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니, 듣고서 가지 않더라도 그것은 길잡이의 허물이 아니다."<유교경>

 

 이 경구는 의사가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붓다도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말씀이다. 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 원인을 파악하고, 고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상태와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하여 처방전을 주듯이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붓다이다. 다만 사람들이 처방전에 따라 꾸준히 약을 복용하여 병을 완쾌하거나 먹지 않고 그냥 환자로 계속 살거나 하는 것은 의사인 붓다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 각자가 스스로 선택해야 될 일이라는 것이다. 약을 붓다가 억지로 먹일 수 없으며, 가르켜준 길을 알아서 찾아가야지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다고 하였다. 방법을 명확히 제시했으니 그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해야지 붓다가 대신 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가 제시한 처방전에 따라 자신과 사회의 병을 치유하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붓다로 살아가는 것이 수행이고 수행자의 삶이다.

 

 수행은 불교적 행복을 찾아가는 길

 

 불교에서의 수행은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것은 붓다가 제시한 가르침과 방식으로 문제 있는 고통스런 삶()을 변화시켜 안온하고 행복한 삶(해탈(解脫),이욕(離慾), 정토(淨土))를 실현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은 해탈, 이욕, 정토의 행복한 삶을 위해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실천해가는 모든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수행에는 알기 위한 행위(깨달음), 나를 변화시키는 행위, 우리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행위가 모두 포함된다. 그러나 많은 불자들은 보편적으로 수행에 대해 마음을 닦아 자기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수행이라거나, 수행을 깨달음 성취를 위한 행위로만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일정한 형식의 수행법을 행하는 것만을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좁을 의미로의 수행이라고도 이해 할 수 있지만 이는 커다란 생각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첫째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수행법을 행하는 것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서로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음을 간과하는 것이다. 즉 붓다의 앎을 위한 수행과정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정 수행을 통해 삼매에 들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무상, 무아, 연기 등 진리의 이법을 깨닫는 것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계와 존재의 이법인 무상, 무아, 연기를 통찰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했을 때 수행을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실천행으로만 이해한다면 결국 깨달음과 동시에 수행과 수행자의 삶을 끝나버리게 만든다. 깨달음이 최종 목적이 되는 것이기에 그 이후의 삶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며 인간의 보편적 삶을 필요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의 보편적 삶이 배제된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깨달음은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조건이며 과정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결과를 갖게 된다.

 셋째는 너와 나, 우리와 사회라는 관계에 대해 무심하게 만든다. 깨달음의 성취로 불교의 모든 실천행이 종결된다면,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행은 필요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결국 불교를 철저하게 개인적, 주관적 가르침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수행에는 알기 위한 행위(깨달음), 나를 변화시키는 행위, 우리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행위가 모두 포함되고 이것을 조화롭게 실천해야 됨을 잊지 않아야 된다.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기에 불자는 모두 수행자이다. 다만 불교의 수행자는 처해진 상황과 역할에 따라 출가수행자와 재가수행자로 구분된다. 수행의 목적은 각각의 세부적인 실천행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상적인 인간형으로의 거듭남과 정토사회의 구현을 통해 너와 내가 모두 안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다.

 수행은 궁극적인 완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그것은 수행을 행하는 인간도 무상, 무아, 연기적 존재로서 불완전한 존재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인과 조건이 불완전함으로 완전무결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삶에 있어서 수행은 완성형이 아니고 항상 과정이고 진행형이고 평생을 걸쳐 해야 될 일이다.

 붓다 또한 깨달음을 성취한 완성형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진행형(수행자)이기도 하다. 보통의 수행자는 붓다로 거듭나기 위한 행과 붓다가 되어서도 행해야 될 삶의 과제를 동시에 추구한다. 살아 있으므로 삶의 유지를 위해 해결해야 될 과제들을 실천해가야 하며, 시시각각 닥쳐오는 나를 둘러싼 주변의 제 문제들 또한 내가 해결해가야 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타마 붓다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어 대각을 이룬 것을 반열반이라 하고 인간으로서의 생을 마감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수행의 범주별 구분과 실천과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자 문제 있는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인 수행은 크게 앎을 위한(깨달음) 수행, 자기를 변화시키는 수행,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행의 범주로 구분해 볼 수 있지만 이를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내용별로 지혜행(智慧行)과 자비행(慈悲行) 그리고 정토구현행(淨土具顯行)과 수신행(修身行)의 네 분야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의 카테고리별 구분은 우선순위가 있어서 이것을 먼저하고 저것은 나중에 하는 식의 구분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일방적인 수행은 붓다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곡해하게 만들고 불교를 외면하게 한다. 불교 역사 속에서 부파불교의 허물과 대승불교의 흥기과정, 그리고 한국불교에 있어서 대중들의 삶에 대해 무관심한 불교행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면 그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수행자는 따라서 이와 같은 네 분야의 수행에 대해 어느 한쪽을 외면하거나 등한시 하지 않도록 조화롭게 실천함으로써 붓다 가르침의 진의와 행복한 삶을 위한 수행이 구족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수행의 첫째 분야는 지혜행(智慧行)이다. 지혜행은 보편적으로 앎을 위한 행이고 깨달음과 관련된 문제이다. 깨달음의 내용은 존재와 세계의 이법인 무상 무아 연기 등 세상의 보편적 진리에 대한 이해와 체득이다. 따라서 지혜행은 또한 사성제의 이해와 체화이며, 깨어있는 삶(정신차리고 사는 삶)을 살기 위한 실천이다. 나아가 객관적 진리, 문제의 원인, 참된 삶, 참된 인간형을 찾기 위한 과정들이 포함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교의 마음 닦는 수행법(선정, 위빠사나, 참선 등)들이 지혜를 닦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자비행(慈悲行)이다. 자비행은 근원적인 입장에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 정신에 기초하기에 왜 둘이 아닌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비심을 무한히 증장하여 행할 수 있다. 자비행은 불교가 현학적이고 개인적 해탈에 몰두하여 그 본래적 가르침의 진면목을 잃어버리고 있을 때 대승의 가르침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대자대비행은 대자여락(大慈與樂)이고 대비발고(大悲拔苦)라 하였으니 그에 합당한 다양한 실천행을 찾아야 할 것이나 근본적으로 자비행은 나누고 베푸는 것이 근간이 됨으로 보시의 실천(재보시, 법보시, 무외시, 무재칠시 등), 애민사업 등 이타행을 실천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셋째는 정토구현행(淨土具顯行)이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함께 사회를 이루고 산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토구현행은 불교적 이상사회인 정토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행이다. 붓다는 전도선언에서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길을 떠나라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역사속에서 정토구현행은 중요치 않고 수행이 아닌 것처럼 외면 받아 왔다. 그럼으로써 불교가 사회적 역할에 소극적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아 대중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정토구현행 또한 수행의 한축으로써 사회를 맑고 밝게 하는 일, 자유, 민주, 평등, 공정, 공평사회의 구현, 부조리와 불합리의 극복, 평화 비폭력 지구촌 건설, 생태환경 보전 등 구체적인 지구촌의 공존과 공영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행위로 이어져야 한다.

 

 넷째는 수신행(修身行)이다. 수신행은 행위의 주체자로서 사람이 가져야 될 삶의 올바른 마음가짐과 자세와 태도 등 몸가짐 그리고 언어생활과 관련된 실천행으로써 이상적 인간형으로의 거듭남을 목적으로 한다.

 괴로움의 직접원인인 갈애 또한 수신행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다. 존재와 세계의 실상인 무상, 무아, 연기를 여실히 보았다고 해서 오욕락으로 대표되는 갈애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인간의 역사속에서 이루어진 잘못된 다생습기(多生習氣또한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살아있으므로 해서 발생되는 수많은 현실의 문제들이 있다. 삶이 유지되는 한 그것을 컨트롤 할 수 있도록 극복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개조하고 변화시켜 몸과 마음을 컨트롤하는 것이 수신행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도록 길들여야 하는가? 그것은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바른 몸가짐으로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비폭력, 부드럽고 온화한 눈빛, 미소얼굴, 단정한 행동과 자세, 옷차림, 건강한 육체, 기타 바른 몸가짐을 갖는 것이고,

 구()는 바른 말로써 솔직하고, 따뜻하고, 쉽고, 화합되고, 유익하고, 도움되는 말을 하고, 망어, 악구, 양설, 기어와 증오와 다툼의 원인이 되는 말을 삼가는 것이며,

 의()는 바른 마음가짐으로 맑은정신, 주인의식, 능동적자세, 열린마음, 참회와 성찰, 탐욕을 버리고 소욕지족하고, 성냄, 분노를 다스리며, 무지하여 어리석음을 벗기 위해 배우고 익히며, 겸손하고, 배려하며, 존중하는 마음가짐, 불방일정신, 중도적 자세 등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수행의 이러한 범주별 네 분야의 조화로운 실천행이 불교의 본래 목적인 해탈, 이욕, 정토의 행복한 삶을 성취할 수 있다. 지혜행만 하거나, 자비행만 하거나, 수신행만 하거나, 정토구현행만 하는 각각의 잘못되고 허물어진 행이 아니고 네 분야가 조화롭게 실천 될 수 있도록 정진하여 인간 최상의 행복을 구현해가는 수행자이자 불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신대승 e-매거진 제7호 "생활수행 1_수행의 개념정의 필요성"에 이어진 글입니다.

강성식 (지지협동조합 상임이사)
돌이켜 보면 지난 세월은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일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더욱 나락으로 떨어진 작금의 불교모습을 보면서는 삶이 처량해 지기까지 합니다. 이제 새로이 신대승불교운동을 통하여 이생의 마지막 인연의 불씨를 지펴보려 합니다.
현직 : 지지협동조합 상무이사
역임 : 대불련지도위원, 봉은사사무장, 사)불교아카데미/참여불교 사무처장, 달마사종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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