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행 1 _ 수행의 개념정의의 필요성

생활수행/평화명상 - 강성식 (지지협동조합 상임이사) | 2017. 제7

 

 개념정의의 필요성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갖추어야 될 가장 핵심적인 것 중의 하나는 개념을 정의하고 기준과 원칙을 정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결정과 판단 혹은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잣대를 설정하여야 뒤죽박죽되거나 혼란스럽거나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서로 개념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거나 기준과 원칙이 서로 다르다면 대화와 토론을 지속시켜 의견을 모아가기 어렵다. 서로 딴 이야기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 속에서 자주 이루어지는 대화마당이나 토론광장에서 우리는 흔히 이러한 경우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럴 때 일을 수월히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은 차분히 다시 처음부터 개념정의 등의 원론적인 것부터 풀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불교에 있어서도 소모적인 논란을 줄이고 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방향을 잘 잡기 위해서라도 몇 가지 핵심적인 용어에 대한 개념과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부터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불교의 목적하는 바와 깨달음, 수행, 신행 등의 용어는 그 개념과 의미하는 바가 먼저 정리되어야 논의나 대화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내올 수 있다생활수행에 있어서도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생활수행에 대한 개념부터 정의되어지고 동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생활수행이란?

 

 생활수행은 수행을 위해 특별한 시간을 할애하거나 별도의 공간과 장소를 찾아가 행하거나, 특별한 수행법을 익히고 행하기 위한 수행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공간과 활동 속에서의 수행이다. 즉 생활수행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일상적인 활동, 먹고, 자고, 배우고, 일하는 등의 일상과 일상생활이 주로 일어나는 공간인 가정과 학교, 직장 등 사회활동의 관계맺음 속에서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또한 생활과 수행이 어떻게 결합되어 이루어지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수행이라는 다른 어떤 것을 끌어들이는 것이기도 하고, 일상적인 삶의 전부 혹은 일부가 곧 수행과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매칭의 문제, 즉 삶과 수행이 분리되지 않고 삶속에 수행이 녹아들어 하나됨을 이루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생활수행을 이와 같이 형식적으로 정의 하였지만 생활수행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고 적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활과 수행이 내용적으로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붓다의 삶과 수행

 

 우리가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타마 붓다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타마 붓다는 인간의 삶에 있어 생, , , , 애별이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등의 괴로움의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기득권을 버리고 사문의 길로 들어섰으며, 일체의 고를 소멸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방식의 다양한 수행법을 행하였다. 알라라 칼라마를 찾아가 무소유처정(일체는 무라고 관하는 선정) 선정을 하였고, 웃다카 라마풋타를 찾아가 비상비비상처정(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하는 선정)의 경지를 성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정 삼매에서 깨어나면 괴로움은 여전하여 붓다의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이후 육체를 괴롭혀 이를 극복함으로써 해탈을 얻으려는 고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두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보리수 아래에서 양극단을 버린 명상에 들어 세계와 존재의 실상을 통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하고 괴로움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또한 고타마 붓다는 스스로 알고 닦고 버림으로써 붓다가 될 수 있었다고 말씀하고 계시며, 성도이후 최초의 사성제 설법을 통해 다섯 비구를 교화하여 깨달게 하였고,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함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는 전도선언을 하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45년간 수행자로서 전법활동을 하여 수없이 많은 제자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경전은 전하고 있다.

 

 우리는 고타마 붓다의 이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서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고타마 붓다 당시에 사용된 수행, 수행자, 붓다, 사문 등의 용어를 통해 이것이 불교만의 고유한 용어가 아니었고, 당시에 보편화된 용어로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행하는 일들을 수행이라 하였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수행자, 사문이라 하였다. 깨침을 얻어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붓다라고 칭하였다. 따라서 용어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현재에 있어 동질성을 갖고 혼란을 피하기 위해 수행, 깨달음, 붓다 등의 불교적 용어 정의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둘째, 고타마 붓다는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고, 요가, 고행 등 다양한 당시의 수행법을 행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비상비비상처정 등의 선정 삼매에 드는 것 또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수행법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상과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이법, 즉 무상 무아 연기에 대한 통찰이 깨달음이고, 선정삼매는 깨달음을 심화하고 체화하기에 유익한 수행법이지만 선정삼매가 곧 깨달음은 아니며, 깨달음을 위한 필수 조건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통찰을 원활하게 하는 교량, 혹은 매개체의 역할이 있으므로 선정 수행이 깨달음의 실천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이해 할 수 있다.

 

 셋째, 깨달음은 고타마 붓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많은 제자들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깨달음이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붓다 이후 불교역사를 통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이 고타마 붓다 밖에 없었고, 깨달음이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었다면 불교는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가르침을 널리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넷째,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이 사성제의 가르침으로 전해졌고, 이 사성제의 가르침을 이해하거나 체화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사성제를 이해함으로써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그것이고, 따라서 고집멸도 사성제의 가르침은 깨달음의 내용이자, 수행의 길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고타마 붓다조차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에도 평생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진하였다는 것이다. 즉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깨달음을 얻는 것이 수행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깨달아 붓다가 되었지만 평생 수행자의 삶을 살았음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불교의 목적 혹은 지향점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통해 괴로움, 번뇌로부터 벗어났지만 그것이 삶의 종착이 아니라 또 다른 수행자로서의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즉 깨달음은 즐거운 삶, 안온한 삶을 살기위한 필수조건이며 과정이고, 이고득락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불교가 궁극으로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불교에서의 수행과 깨달음이 의미하는 것과 깨달음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깨달음 이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개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과 깨달음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는 인간의 삶의 길에서 어떻게 해야 너와 내가 모두 번뇌와 괴로움에 구속받지 않고 안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가르침이다.

 

 불교는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과 전도선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속에서 존재하여 왔다. 그 역사속에서 제자들에 의해 수많은 가감첨삭을 거치고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가감첨삭과 다양하게 받아들여지고 전개된 불교로 인하여 무엇이 고타마 붓다 가르침의 진의이며 정수인지 조차 헷갈리고 있으며, 많은 왜곡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2,600년을 관통하는 변할 수 없는 불교에 대한 정의는 불교는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이자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가르침이며,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의 현실 삶속에서 제기되는 괴로움, 번뇌를 극복 소멸하고 안온함과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이 네가지 고귀한 진리라고 명명되는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인간의 삶, 혹은 인간의 삶속에는 괴로움과 번뇌가 있다(고성제). 괴로움을 극복 소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괴로운지 괴로움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괴로움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알아야 하며, 인간 삶의 이해를 통해 우리가 안고 있는 보편적인 괴로움의 실체를 파악될 수 있으며, 괴로움은 또한 개인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각자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제시한 괴로움은 흔히 생로병사의 네가지 괴로움 혹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온성고를 더하여 여덟까지 팔고로 정리되어 있다.

 

 다음은 이와 같이 괴로움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해하였다면, 이제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한다(집성제). 붓다는 이것을 무명과 갈애와 집착으로 고의 원인을 규명하여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에는 고의 규명된 원인에 따라서 극복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붓다는 이를 열반, 해탈, 적멸, 이욕 등의 용어로써 표현하였다.(멸성제마지막으로 괴로움은 어떻게 극복 소멸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도성제). 붓다는 이 방법에 대해 8정도라고 하여 여덟까지 길을 제시하였다. 즉 바른 명상()으로 마음을 챙기고 삼매에 들어, 무상 무아 연기 등 존재의 실상과 진리를 통찰()함으로써 탐욕과 성냄, 분노와 어리석음 등 번뇌를 떨쳐버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며, 바른 마음가짐과 몸가짐과 바른 말과 행위 등 계행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맑고 밝고 안락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괴로움의 소멸방법은 괴로움이 삶속에서 다양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고정화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며, 따라서 그 상황과 조건에 따라 창조적으로 최선의 방법을 찾아 실천해야 한다고 중도의 가르침을 설하였다.

 

 불교는 또한 이러한 계정혜 삼학 등 개인적 심신의 닦음과 함께 자타불이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공동체의 안정과 발전, 그리고 구성원의 행복을 위한 보시 등의 자비행과 평등, 평화, 화합 등 공존, 공영의 가치를 실천하여 정토사회를 구현해야 함을 가르친다.

 

 이와 같이 고타마 붓다의 삶을 통해서나 불교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고찰해볼 때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사성제의 도리를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보다 더 엄밀하게는 모든 고의 근본원인인 무명에 상대하여 밝음을 상징하는 가르침, 즉 존재와 세계의 실상인 무상 무아 연기의 이법을 체득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깨달음은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이며 조건이며 과정이다.

 

 깨달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의 다름에 대한 조율은 일단 차치하고, 깨달음은 불교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가에 대해 먼저 정리하는 것이 수행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할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깨달음은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어 안온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이고득락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즉 붓다가 되라는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지칭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깨달음을 얻어 안온한 삶을 사는 사람,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이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삶의 종착지가 아니고 행복하고 즐겁고, 안온한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 존재의 이치를 깨달아 번뇌에 흔들리지 않고 나와 세상의 행복을 위해 사는 수행자적 삶이 불교가 추구하는 인간의 삶이다. 경전에서 붓다 또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이후 45여년의 삶을 더 살다가 열반하셨다.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다 가신 것이다. 따라서 고타마 붓다의 삶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삶에 있어서 깨달음은 즐겁고 안온한 삶을 위한 수단이고 조건이며 과정일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이와 같은 위상을 가짐에도 많은 출재가 불자들이 깨달음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고,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양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강성식 (지지협동조합 상임이사)
돌이켜 보면 지난 세월은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일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더욱 나락으로 떨어진 작금의 불교모습을 보면서는 삶이 처량해 지기까지 합니다. 이제 새로이 신대승불교운동을 통하여 이생의 마지막 인연의 불씨를 지펴보려 합니다.
현직 : 지지협동조합 상무이사
역임 : 대불련지도위원, 봉은사사무장, 사)불교아카데미/참여불교 사무처장, 달마사종무실장
편집진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