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본래 이름은 목멱산
목멱산(木覓山)은 한양(漢陽) 도성의 내사산(內四山)으로 북쪽의 백악(白岳),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남쪽에 위치하여 풍수 지리적으로 안산(案山)의 역할을 합니다. 이 산줄기에서 북쪽 사면인 도성(都城)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청학동천(靑鶴洞天)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남산(南山)으로 부르고 있지만 본래 이름은 목멱산으로 그 동쪽의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峯)이라고도 합니다. 잠두봉이 그 지기(地氣)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에의 먹이인 뽕잎이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에의 머리가 향하는 한강 건너편에 지금의 ‘국립양잠소(國立養蠶所)’에 해당하는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조선 초부터 설치되어 이곳을 잠실리(蠶室里)라 불렀습니다. 행정개편으로 서울에 편입될 때 이미 송파구에 잠실동이 있으므로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 ‘잠(蠶)’자와 가까이에 있는 신원리의 ‘원(院)’자를 따서 잠원동(蠶院洞)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고속터미널 부근의 잠원동이 그곳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遷都)하면서 백악을 호국(護國)의 상징인 진국백(鎭國伯)에 봉하고 그곳에 백악신사(白岳神祠)를 짓고 백악신과 삼각산신을 모셨습니다. 또 목멱산에는 국사당(國祀堂)을 세워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고 나라에 큰일이 일어났을 때 하늘에 제사지냈습니다. 목멱산의 명칭은 목멱대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산(南山)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대명사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마을은 대개가 전해져 오는 풍수지리적 생각에 따라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좌향(坐向)을 남향(南向)으로 합니다. 큰 마을이라 할 수 있는 고을들은 대부분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 있고 앞에는 내(川)가 흐르는 분지형(盆地形)의 형국(形局)입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모든 고을의 앞산은 남산(南山)일 수밖에 없으며, 도읍인 한양도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국사당(國祠堂)이라고 불리던 목멱대왕을 모신 사당(祠堂)은 일제가 국사당 아래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인왕산(仁王山) 선바위 부근으로 강제로 이전시켰습니다. 이전하면서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국사당이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팔각정이 들어서 있습니다.
목멱산에는 봉수의 최종 종착지인 경봉수대(京烽燧臺)가 설치
조선의 통신체계는 파발(擺撥)과 봉수(烽燧)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목멱산에는 봉수의 최종 종착지인 경봉수대(京烽燧臺)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경봉수대 : 사진 필자 제공>
파발은 말을 타고 가서 직접 전하는 방식이고 봉수는 불을 피워 연락을 하는 방식으로,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였습니다. ‘밤에는 횃불(烽)을 피워,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晝煙夜火)’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위급한 소식을 궁궐에 전달하였습니다.
봉수제도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의종(毅宗) 때 확립되었으므로 봉수대의 시설도 그 때 확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비낟. 조선시대에는 세종 4년(1422년)에 각 도의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세종 20년(1438년)에 완비하여 5개 노선에 650여 개의 봉수가 설치되었습니다.
제1봉수로는 경흥을 기점으로 함경도, 강원도의 봉수를 양주 아차산봉수대(신내동)에서, 제2봉수로는 동래 다대포를 기점으로 경상도의 봉수를 광주 천림산(천천현)봉수대에서, 제3봉 봉수로는 강계를 기점으로 평안도, 황해도의 봉수를 무악 동봉봉수대에서, 제4봉 봉수로는 의주를 기점으로 평안도, 황해도의 해안의 봉수를 무악 서봉봉수대에서, 제5봉 봉수로는 순천을 기점으로 전라도, 충청도의 봉수를 양천 개화산봉수대에서 받아서 목멱산에 있는 경봉수(京烽燧)로 전해주면 그 정보는 병조(兵曹)에 종합 보고되고 병조에서는 승정원(承政院)에 알려 임금에게 아뢰었습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잇는 노선이 두 개인 것은 당시 조선이 중국을 사대(事大)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의 통신망이 발달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봉수는 전황(戰況)에 따라 5번을 올리는데 이상이 없는 평상시에는 1홰,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침범하면 4홰, 접전 중이면 5홰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봉수대 마다 5개의 굴뚝이 있으며, 안개가 끼고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화포나 나팔 등과 같은 소리를 이용하여 전달하기도 하였고 이 방법도 여의치 않을 경우 깃발이나 봉수군이 직접 다음 연락 지역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했습니다.
목멱산의 동쪽자락 청학동천에 정자와 시단에 많아
목멱산의 북쪽자락 중앙에 위치한 청학동천에는 출사(出仕)하지 않은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북촌에 있는 출사한 사대부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던 정자(亭子)와 시단(詩壇)도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이안눌(李安訥)의 집에 있었던 동악시단(東岳詩壇)이 유명하였습니다. 동산 기슭에 단을 쌓고 당대 명인인 이호민, 권필, 홍서봉 등과 어울려 글을 외우고 시를 읊기도 하여 그 단(壇)을 이안눌의 호를 빌러 동악시단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재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 이라고 바위에 음각한 글씨가 지금의 동국대학교 중문 근처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영조 때 문신인 조현명의 귀록정(歸鹿亭)과 고종 때의 영의정인 이유원의 쌍회정(雙檜亭), 정원용의 화수루(花樹樓) 등의 정자가 있었으며, 특히 남별영(南別營) 계곡물에 세워진 천우각(泉雨閣)은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집터를 잡아준, 조선의 건국공신(建國功臣)인 권람(權覽)의 집이 있었고 그 집터 위에 소조당(素凋堂) 유적이 있어 후에 후조당(後凋堂)이라 했다가 녹천정(鹿川亭)으로 이름이 바뀌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녹천정에서 동쪽으로 필동 골짜기에는 둔덕 바위 위에 청학동이상국용재서사유지(靑鶴洞李相國容齋書舍遺址)라 새긴 암각 글씨가 있는데 이곳이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 불리는 이행(李荇)의 집터입니다. 이행은 우의정, 대제학의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몸이건만 이곳에 공부방을 꾸미고 퇴궐 후에는 망건에 무명옷 차림으로 동산을 거닐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곳에 남산 한옥마을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청학동천 아래 마을에 함께 살았던 인연으로 임진왜란 때 유성룡에 의해 충무공이 발탁되었으며, 충무공이 자란 곳이라고 해서 청학동천 아래를 충무로(忠武路)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목멱산의 동쪽자락에는 훈련원(訓練院)이 있어 하급 장교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그들에게 월급 대신 필요한 의복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복을 그냥 내다 팔기도 하고 그 천으로 댓님과 띠 그리고 댕기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한 난장(亂場)이 들어섰는데 이것을 배오개(梨峴) 난장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발달하여 지금의 광장시장(廣藏市場)이 되었습니다.
훈련원 옆에 있었던 군사훈련장인 예장(藝場)은 목멱산 남쪽 자락의 녹사장(綠莎場)과 북악 아래 경복궁(景福宮) 신무문(神武門) 밖의 공터(지금의 청와대)와 더불어 조선시대 씨름대회 장소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지금의 예장동이라는 동명(洞名)과 녹사평(綠莎坪)이라는 전철역 이름이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처럼 청계천 하류에 해당되는 목멱산 동쪽 산줄기 아래 지역에는 훈련원이 있어 무인(武人)인 하급 장교들이 많이 모여 살아서 이곳을 아랫대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경복궁의 궐내각사(闕內閣舍)에 출근하는 문인인 경아전(京衙前)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인왕산 아래 청계천 상류지역을 우대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가 되는데 조선시대에는 하급관리들에게도 문무(文武)의 차별이 있었나 봅니다.
장충단은 을미사변 때 순국한 군인들을 위한 초혼단
같은 동쪽 기슭에 남아 있는 장충단(獎忠壇)은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여러 장병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 1900년에 만든 초혼단(招魂壇)입니다. 그 이후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 그리고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서 순직한 장병들도 함께 합사(合祀)하였는데 이곳에 제향(祭享)된 인물은 대부분 일제에 항거한 고종을 호위하던 사람들입니다.
<장충단 비석 : 사진 필자 제공>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감행한 일제는 1908년에 대일감정을 악화시킨다는 구실로 장충단의 제사를 금지시키고 민영환(閔泳煥)이 쓴 비석도 숲속에 방치하였습니다. 1919년에는 장춘단 일대에 벚꽃 수천그루를 심고 공원으로 만들었으며 장춘단 위쪽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사당인 박문사(博文祠)를 세웠는데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옮겨와 정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서있습니다.
장충단을 지나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목멱산에서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도성이 잘려나가고 지금은 그 언저리에 호텔이 들어서 있습니다만 조선 초기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남쪽의 작은 문으로, 광희문(光熙門)과 남소문(南小門)이 있었으나 남소문이 목멱산과 이어져 있어 도적의 출몰이 잦을 뿐만 아니라 위치가 너무 높아서 백성들이 이곳으로 잘 다니지 않고 광희문 쪽으로 돌아 다녔기 때문에 이 문을 폐쇄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소문이 있었던 고개는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더불어 벌아현(伐兒峴)이라고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