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전투적불교시리즈> 버마/미얀마편 2. 반제식민저항에서 이슬람포비아 폭동까지

국제연대 -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 2016. 제5
 - 세속주의에 밀려났던 불교민족주의, ‘이슬람 포비아’로 폭발하다

 30년대 사야산 ‘반란’, 전투적 불교의 마지막 반제무장봉기 
 아웅산의 ‘따킨’(Thakins)그룹, 세속적 민족주의로 30-40년대 독립운동 주도 
 21세기 전투적 불교, 박해받는 소수를 적으로  
       

  
  2011년 개방 노선 이후 불교민족주의는 이슬람포비아 캠페인으로 폭발해왔다. 이런 캠페인이 버만족, 불교도 중심으로 정책을 펴온 국가의 소수자 차별 정책과 적극 부합해 온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무슬림, 특히 로힝야 무슬림들은 각각 종교 그리고 종교와 인종으로 국가의 제반 시스템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박해받아왔다. 21세기 버마 전투적 불교의 얼굴이다. (사진 : 이유경)        
                                                                                 
  

 1930년대 영국식민치하 버마는 두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첫째, 1930년부터 약 2년여 이어진 소농무장반란은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이 저항은 승려출신의 사야산이란 인물이 주도하여 사야산 반란’(Hsaya San Rebellion)으로 불린다. 최하층민이나 다름없는 소농들이 무장봉기에 나선 건 반제저항의 정치성을 높였다. 동시에 전투적 불교에 기반한 마지막 반제무장봉기가 됐다.

 두번째, 1920년대부터 청년학생층을 중심으로 기지개를 펴온 세속주의 (Secularism, 정교분리원칙) 정치세력이 30년대 들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내 곧 이들이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30년대 초 ‘사야산 반란’까지만 해도 반식민투쟁의 지배적 이념은 ‘불교 민족주의’였다. 그러나 반란이 진압된 후 종교주의는 세속주의 서서히 압도당했다. 그 중심에는 버마독립군의 창시자이자 아웅산 수치의 부친인 아웅산 장군이 있다. 


 사야산 반란 : 전투적 불교 반제운동의 마지막 전성기

 우선, 사야산 반란부터 짚어보자. 사야산은 민족주의자이자 왕정주의자였다. 전 승려로서 지닌 ‘종교’적 신념과, ‘민족주의’ 그리고 ‘왕정주의’ 이 세 박자는 당시 독립운동의 주류이념과 조화를 이뤘다. 사야산이 지지자들에게 약속한 것도 버마왕국의 부활, 불교의 재부흥 그리고 영국외세의 축출로 요약할 수 있다.
 


  사야 산 (출처 : 위키피디아)

 

 1920년대 저항을 주도한 승려 우 오타마, 우 위싸라 등이 비폭력 노선을 택했다면 사야산은 무장노선을 택했다. 1880년대 버마가 영국에 복속된 직후 변방에서 들끓었던 민중봉기가 좀 더 조직화된 형태로 부활한 셈이다. 봉기는 1930년 12월 22일 중부 페구 지방 따라와디 타운에서 동을 틔워 전국으로 급속하게 퍼졌다. 곳곳에서 경찰소를 습격하고 정부시설물을 공격한 후 빠지는 게릴라식 전술이 이어졌다. 1931년 8월 2일 사야산이 체포되고 그해 11월 28일 사형당한 이후로도 저항은 계속됐다. 그러나 지도자를 잃은 운동은 길게 가지 못했다. 
  

 사야산 반란에 대한 평가는 다면적이다. 지지자 대부분이 젊은 승려들과, 빈곤에 허덕이던 소농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피지배계층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준 운동임이 분명하다. 버마 역사학자들이 사야산 반란 이면에 식민치하 착취적 경제구조를 강조하는 것도 계층성에 방점을 찍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착취 구조는 식민시대 이전부터 존재해온 바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외세척결을 내건 민족주의 정서가 불교와 왕정이라는 전통적 요소와 결합하여 만든 복고주의가 이들이 추구한 가치였다. 이 가치는 오늘날 불교와 접목된 다양한 컬트 전통을 남겼다. 특히 사야산이 굳게 믿었던 문신과 부적의 힘 등 미신적 오브제들은 오늘날 까지도 일상은 물론, 정치환경에도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야산 반란은 시기적으로 보면 불교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던 독립운동이 세속적 민족주의 세력에게 넘어가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이미 20년대 중반부터 민족주의 진영 내에서는 종교주의와 세속주의간에 이념적 갈등이 아른 거리고 있었다. 30년대 들어 랑군대 학생 아웅산 등 청년들의 진취적 행보가 이어지면서 이 두 세력간의 지렛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교민족주의의 쇠퇴, 세속적 민족주의의 부상
 아웅산은 사야산 반란이 온전히 진압된 다음해인 1933년 랑군대 학생이 되었다. 맑시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는 이미 이 시절부터 공개적으로 세속주의를 천명해온 인물이다. 랑군대 첫 학기 학생회가 주최한 영어토론장에서 그는 “승려들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아웅산 수치는 1984년 처음 발표한 수필 <내 아버지> (My Father)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웅산이 부정확한 발음과 서툰 영어로 투박하게 설파한 메시지는 정말이지 알아듣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토론을 주관한 그의 형을 당황스럽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웅산은 팔리어(고대불교경전어) 단어와 문구가 혼합된 부적절한 영어를 거침없이 내뱉었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야유와 모욕들을 무시한 채 하고자 했던 말을 끝까지 했다” (Aung San Suu Kyi 1991, Freedom from Fear – chapter1 ‘My Father’, Penguin Books P7 재인용) 
 

  

 아웅산 (출저 : aungsan.com)



 청년 아웅산의 이런 배짱이 세속적 민족주의 진영의 동력이  됐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1935년 동료들과 함께 “우리 버마인들의 사회”(We Burman Society, 버마어로는 “Dobama Asiayone”) 라는 정치 조직을 결성한다. 흔히 “타낀”(Thakins)으로 더 잘 알려진 운동체다. 그는 이 운동에 대해 “인종을 초월하고, 종교를 벗어난 유일한 운동조직” 이라고 자부심으로 평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세속주의가 불교자체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다. 그는 불교가 “종교이상의 관념이며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철학”이라고 말했을 만큼 불교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았다.    

 

 당시 젋은 세속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승가사회를 주저없이 비판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테인 페 뮌 (Thein Pe Myint)이란 인물을 들 수 있다. 그는 1935년 출간된 소설 ‘텟 퐁지’(“Modern Monk 근대적 승려”라는 뜻)의 저자이며 좌파지식인으로 통했다. 그는 소설 텟 퐁지를 통해 왕정체계의 위계질서를 비판하고 불교 성직자들의 성추문 등 비도독적 행위를 고발했다. 소설은  충격이었다. 그는 살해협박을 받았고 소설 ‘텟 퐁지’는 금지됐다. 결국 승려들에게 공개사과까지 해야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역사적 진화 물결을 탄 독립운동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불교민족주의자들이 주창하는 버마왕국의 부활과 세속주의 민족주의자들이 지향하는 버마 공화국의 건설, 이 둘 사이의 갈등에서 후자의 정치력이 월등히 앞섰다. 그들은 1948년까지 독립될때까지 국면을 주도했다. 독립의 막후를 주도한 건 1945년 창설된 ‘반 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 (AFPFL, 이하 “반 파시스트동맹”)’이다. 반파시스트동맹은 버마공산당(Communist Party of Burma, CPB) 등 좌파정당과 아웅산의 ‘버마독립군’이 함께 결성한 정치동맹체다. 반파시스트동맹은 그들의 마니페스토에서도 세속주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국가는 종교적 문제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 종교는 대중정서를 착취하거나 이용돼서는 안된다”
  

 반파시스트인민동맹 본부 (출처 : 위키피디아)

 그로부터 71년이 지난 올해 4월 25일, 랑군의 거리는 유사한 이름 ‘반 파시스트 반 인종주의’를 높여든  젊은이 25명을 맞았다. 이들은 “민족주의 엿먹어라” “인종주의는 이제그만” 같은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71년전 반파시스트 동맹의 마니페스토가 미래지향적 선포였다면, 지난 4월의 구호는 오늘을 고발하는 분노의 외침이었다. ‘종교적 중립을 져버린 국가’, ‘대중들을 착취하고 현혹시키는 종교극단주의’ 가 오늘 버마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반 파시스트 동맹’(AFPFL) 마니페스토 71년만에 부활한 이유     
 2007년 10월 중순 버마 중북부 소도시 포코쿠(Pokoku) 사원의 후미진 방에서는 어두운 형광 빛 아래 저음 인터뷰가 진행 중이었다. 그 몇 주전 승려들이 주도한 민주화운동 ‘샤프란 혁명’이 휩쓸고 간 뒤로 버마는 완벽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포코쿠는 서부 아라칸 주 시뜨웨 시위 (8월 24일) 다음으로 시위가 벌어진 곳이다. 시뜨웨와 달리 9월 5일 포코쿠 시위에선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다음 날 승려들은 군의 차량을 공격했고 일부 관료들을 인질로 삼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만일 포코쿠에서의 폭력적 장면이 아니었다면 샤프란 혁명의 거대한 물결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은 평론가들이 포코쿠 시위를 혁명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다. 그런데 이날 인터뷰에서 필자는 당시까지만 해도 세상에 좀체 알려지지 않았던 근 과거의 역사 한줄을 얻어낼 수 있었다. 포코쿠 승려들이 과격성을 보인데는 4년전 발생한 한 사건이 연계돼 있었다. 

 “2003년 승려들이 무슬림과 충돌했을때 군이 불교사원에 총격을 가했다. 우린 그 사건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번에 군 차량을 공격했다. 4년전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  



 

 포코쿠 사원 누비스 승려들이 식사 후 설거지 중이다. (사진 : 이유경 2007 촬영)


 필자 앞에 앉은 승려가 말했다. 그가 언급한 ‘승려와 무슬림이 충돌한 2003년 사건’ 이란 승려를 포함한 불교도들이 벌인 안티 무슬림 폭동을 말한다. 바로 최근 불교극단주의 승려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우 위라뚜가 관여했던 폭동이다. 인터뷰에 동석한 포코쿠 주민은 이렇게 추임새를 넣었다.  

 “무슬림, 그러니까 그 인디언놈들이 사우디 아라비아 도움을 받아서 ‘786’ 운동을 나라 전역에 확산시키고 있기 때문에..”


 ‘786’은 남아시아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통하는 상징수로 ‘자비로우신 신의 이름으로’라는 이슬람 성서 꾸란의 첫 구절을 상징한다. 그러나 버마 불교도들 사이에서 이 숫자는 음모의 상징이다. ‘786’ 세 숫자를 더하면 21이 된다. 그것은 무슬림들이 21세기에 버마를 점령할 거라는 음모론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불교 극단주의 세력이 안티 무슬림, 특히 로힝야 무슬림에 대한 증오 캠페인에 나서며 내세우는 논리 중 하나가 바로 ‘무슬림 점령음모’다.

 로힝야 무슬림들이 아이도 많이 낳고, 또 방글라데시-아라칸 주 국경을 넘어오는 바람에 인구수로 버마를 점령한다는 주장도 매우 흔하다. 버마의 무슬림 인구는 대략 5%에서 최대 10%정도로 추산된다. 게다가 버마와 방글라데시간 이주 현상은 이들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수십만명의 로힝야 무슬림들이 아라칸 주를 떠나 방글라데시에 자리잡았다. 혹자에겐 웃고 넘어갈 음모론이지만 그들 사이에선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786’은 무슬림의 21세기 음모?

 그로부터 5년이 지난2012년, 버마에서는 무슬림들의 ‘786음모’에 맞서 불교도들의 ‘969운동’이 본격화됐다. 969는 불교전통에서 나온 상징수로 9는 부다를, 6은 부다의 가르침 법륜을, 마지막 9는 부다의 제자 즉 승려를 가리킨다. 969의 이와같은 이념적 기원은 이미 99년 종교부 (Ministry of Religious Affairs) 에 근무하던 우 초 르윈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969운동 사이트 역시 이 운동의 시작을 “99년 우 초르윈에 의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2012년부터 급격히 부상한 969운동은 우 위라뚜 승려를 선두로 하는 전투적 불교민족주의로 대열이 정비됐다.  


 

 불교 극단주의 969운동 로고. 로고위에 아웅산 장군을 비롯한 아웅산 수치 가족들의 사진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아웅산 수치와 969을 동시에 지지하는 이로 추정 (사진 : 이유경)
 

 포코쿠 승려들을 화나게했던 2003년 안티 무슬림 폭동, 위라뚜를 감옥으로 보냈던 그 폭동은 만달레이에서 약 44km떨어진 촉세(Kyakse)라는 곳에서 발생했다. 촉세는 군사정권의 마지막 실세로 1991년부터 2010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탄쉐 장군의 고향이다. 당시 폭동으로 위라뚜를 포함한 6명의 승려는 25년형을 선고 받았다. 위라뚜의 당시 이름은 위사이타 비운타(Wiseitta Biwuntha)이다. 그는 지금 전투적 불교의 대표적 얼굴이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2013년 7월 위라뚜를 표지모델로 실으며 “불교도 테러의 얼굴”이란 타이틀을 부여했다. 위라뚜도 스스로를 ‘버마의 빈라덴’으로 자칭한 바 있다.
  

 위라뚜는 현재 만달레이 타운 마수예인(Masoeyein) 사원의 주지승으로 있다. 마수예인 사원은 급진적 불교민족주의 전통을 지닌 곳이다. 이 사원의 승려들은 2008년 버마를 강타했던  사이클론 나르기스 사태 이후 구호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또, 2011년 버마의 개방 정책 이후 부각된 중북부 지방의 토지수탈 (Land Grab)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대표적 사례인 ‘라파다웅 캠페인’에 참여한 승려중에는 마수예인 사원 출신이 많다. 라파다웅은 군이 공식 소유한 기업 미얀마 이코노믹홀딩스(MEHL)과 중국 기업 완바오가 함께 개발 중인 구리광산지대다. 2012년 12월 미국무부 동남아 담당 국장 이케 리드(Ike Reed)등 미 대표단 일행은 라파다웅 문제를 두고 이 사원을 방문하여 우 위라뚜를 비롯한 승려대표들을 만난 적이 있다.
 

 “969는 극단주의 운동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은 물론 작은 미물까지도 존중한다. 살생과 피보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종교를 모욕하지도 모욕을 부추기지도 않는다”
  

 

  우 위라뚜 승려의 거처에는 자신의 사진과 초상화가 적잖이 걸려 있다. 그는 불교극단주의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사진 : 이유경)

 

 2013년 8월, 우 위라뚜가 필자에게 건넨 ‘969 정책 리플릿’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969 로고를 달고 확산되는 위라뚜의 무슬림 혐오설교는 그즈음 무슬림 겨냥 폭력이 발생하는 곳마다 울려퍼졌다. 그해 3월 20일, 만달레이에서 차량으로 약 3시간 정도 달려 이르는 소도시 멕띨라(Meiktila)의 무슬림 학살은 대표적인 사례다. 표면적으로는 이날 금은방을 운영하는 무슬림 상인이 불교도 고객과 언쟁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됐다. 그러나 이미 안티 무슬림의 기운은 이 도시 깊숙한 곳에서 고조되고 있었다. 폭동이 발생하기 여러달 전부터 위라뚜는 이 지역 설교 투어에 집중했다. 그 시기 이 지역에 배포된 리플렛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매일 매일 한 무리의 ‘칼라’(Kalar, 피부색이 어두운 이들 즉 무슬림을 비하하는 용어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 무슬림의 ‘니그로’식 호명)들이 모스크를 갈때마다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우리를 지원해줄 이가 필요하다”
 

 증오설교→증오 리플렛→그리고 폭동    
 3월 20일 부터 4일간 계속된 불교도들의 폭동은 국가공권력의 철저한 방관과 협조로 마치 잘 짜여진 각본마냥 진행됐다. 모스크, 마드라사(이슬람 학교)와 학생들, 무슬림 거주구역 등 이슬람에 관한 모든 것들이 공격받았다. 공식 희생자는 44명이다. 그러나 이 학살을 가장 밀도있게 리서치한 <인권을 위한 의사회>는 사망자를 최소 148명으로 보고 있다. 희생자 대부분은 ‘마드라사’ 기숙사에 머물던 10대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4천명의 국내피난민(IDPs)이 발생했다. 멕띨라는 지난 10월 첫 주말 다시 긴장이 고조됐다. 학살 후 3년 피난민 생활을 접고 자신들의 본 주거지로 돌아가려던 무슬림들을 성난 불교도들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멕띨라 타운. 2013년 3월 폭동이 지나간 자리 건물이 남아 있지 않다. (사진 : 이유경)


 성난 불교도들의 물리적 ‘제지장면’은 2013년 8월 21일에도 연출된 바 있다. 그날 유엔 인권대사 토마스 퀸타나 (Thomas Quintana)는 현지 조사차 멕띨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200명가량 되는 불교도 시위대의 폭력적 제지를 받았다. 이때 퀸타나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했던 이는 소위 버마의 민주화 세대로 불리는  ‘88세대’소속 민 카잉이라는 인물이다. 이는 안티 무슬림 캠페인에 관한한 소위 ‘민주대 반민주 (혹은 독재)’의 정치적 색깔이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준다. 분열과 분파가 모자라지 않은 버마 사회는 그러나 이슬람 포비아 깃발 아래서 만큼은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불교를 국가적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극우민족주의를 상식으로 포장하는한 이와같은 통합에 금이 갈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해서 969 운동이 민족주의를 진지하게 흡수하고 있는가에는 의문이 따른다. 민족주의에 대한 그들의 단상은 난잡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정책’ 리플렛에 담긴 온갖 “민족주의”가 이를 말해준다.

 “(969운동은) 민족주의 같은 정치적 의제는 없다. 다른 종교를 모욕하지도 모욕을 부추기지도 않는다. (중략)  우리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거부한다. 우리는 민족주의를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는 민족주의를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 결혼할 때도 민족주의를 염두해 둬야 한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민족주의의 가치를 숭고하게 담아라”


 2013년 멕띨라 타운 금은방 언쟁으로 시작된 폭동 이후 4천명 가량 피난민이 발생했다. 3년넘게 난민캠프에서 지내던 이들은 최근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불교도들의 물리적 제지로 돌아가지 못했다. (사진 : 이유경)

 ‘결혼할 때도 민족주의를 염두하라’는 이들의 설교는 이 운동이 갖는 쇼비니즘적 여성주의를 담고 있다. 그들 프레임에 따르면 여성의 몸은 민족과 국가의 순결한 관리대상이다.

 2014년 1월 15일 만달레이에서 출범한 불교 극단주의 조직 ‘종교와 종족 보호 위원회’ 즉 마바따(Ma Ba Tha)는 이점을 과감없이 증명했다. 마바따는 969 운동의 자매 조직격이다. 사실상 겹친 조직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만큼 인적 구성에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마바따의 수사는 969 운동에 비해 좀 더 진지한 민족주의 성향을 담고 있다. 자문 변호사, 국제담당 서기 등 전문적 인적구성을 보유한 것도 특이하다. 이들이 출범시 내건 모토는 ‘소승불교 보호와 민족성 보호’였다. 그러나 출범직후 가장 중점을 둔 활동은 바로 ‘종족과 종교보호’를 위한 4개 법안 통과였다. 이 법안들은 사실상 안티 무슬림 정책의 일환이자 동시에 여성혐오적  애국주의나 다름없다.

 이 법안들은 다른 종교간 결혼을 금지하고, 일부 다처제를 금지하며 ‘가족계획’이라는 이름하에 여성들의 출산은 36개월의 간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바따의 법률 자문 위원인 우 에 파잉(U Aye Paing)은 이 네개의 법안이 “불교도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것이라며 ‘보호대상’을 구체적 종족과 종교로 지목했다. 이 법안은 지난 해 9월 총선 직전 전임 정부하에서 승인됐다. 969운동 위라뚜가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야도 바로 이 여성문제다. 그는 무슬림 남편에게 얻어맞는 불교도 아내들의 고발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모았다는 사례들에 대한 검증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진 바 없다. 그럼에도 그의 외침은 자명하다. ‘무슬림들이 불교도 여성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불교도 여성을 억압한다” : 위라뚜  
 2011년 버마가 개방 노선을 걸으면서 폭발적으로 발발한 안티 무슬림 폭동에는 거의 늘 ‘여성’이 등장했고 강간 수사학(修辭學)은 불교 극단주의자들의 동력이다. 2014년 7월  1일 만달레이에서 발생한 ‘안티 무슬림’ 폭동도 그중 하나다.
 이 폭동은 “불교도 여성이 찻집을 운영하는 두명의 무슬림 형제로부터 강간당했다”는 소문에서 시작됐다. 소문의 최초 근원지는 팃 투 르윈이라는 이의 블로그 포스팅이었다. 이 포스팅을 일파만파 키운 건 위라뚜의 (지금은 삭제된) 페이스북 포스팅이었다. 위라뚜는 “마피아들이 확산되고 있다. 그들이 타운으로 오고있다”며  선동적 톤으로 타이틀을 잡았다. 그리고는 “검과 창으로 완전 무장한 지하드(무슬림)가 현지 불교도들을 공격할 준비 중이다”고 덧붙였다. 위라뚜의 포스팅이 올라간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폭동은 시작됐다.  

 

  

 만달레이 마수예인 사원 위라뚜 승려의 거처 입구에는 무슬림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불교도 장면을 전시해놓았다. (사진 : 이유경)

 
 폭동 당일인 7월 1일 “버마출신 망명객”이라는 자기소개를 건 ‘라 우(Hla Oo)의 블로그’는 폭동관련 정보를 자세히 전하며 마치 동참을 자극하듯 불을 지폈다. 그러나 강간은 사실이 아니었다. 다음 해 <알자지라> 탐사팀 보도에 따르면 강간 소문의 주인공 퓨퓨민(Phyu Phyu Min)은 궁핍한 환경에 이끌려 돈을 받고 ‘강간당했다’는 거짓 신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마바따 승려인 아이다팔라 (Sayadaw Eindaparla)는 <미얀마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마바따 운동의 출범이 2012년 “아라칸 여성 강간사례”에서 비롯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2012년 강간 사례’란 그해 5월 28일 불교도 여성인 ‘마 띠다 뛔(Ma Thida Htwe, 27 이하 “띠다”)’가 아라칸 주에서 3명의 로힝야 무슬림 남성에게 강간 후 살해당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실로 엄청난 파장과 결과로 이어졌다.
  

 이 사건 후 로힝야 무슬림과 라까잉 불교도간의 커뮤널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결국 공권력과 불교도들의 적극적 공조는 로힝야를 겨냥한 학살로 이어졌다. 6월과 10월 두 차례 폭동이 발생하면서 최소 280명의 목숨을 잃었다. 뉴욕에 기반을 둔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는 다음 해 153쪽에 달하는 방대한 조사보고서를 통해 이 학살을 “인종청소”라 불렀다. 보고서는 그해 10월 23일 므약우 (Mrauk-U) 타운쉽 얀 떼이(Yan Thei) 마을에서 하루동안만 70명의 로힝야가 학살당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 지역은 라까잉 불교도들이 그리워하는 마지막 아라칸 왕국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그만큼 불교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지역이다. 
  

  위라뚜 승려가 아내를 구타한 무슬림 남편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위라뚜 승려는 무슬림 남편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불교도 여성 사례 고발창구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사진 : 이유경)

 

 로힝야 무슬림 문제는 버마의 다른 무슬림들이 직면한 ‘이슬람포비아’ 문제와 또 다른 차원의 심각성이 있다.  이들은 종교뿐 아니라 인종적으로도 박해받는 이중박해자이기 때문이다. 멕띨라 무슬림 학살을 자행한 불교극단주의세력에 분노하는 “평화 활동가”들도 로힝야 문제에 관해서는 ‘불법이주자’ 혹은 ‘침입자’ 문제로 바라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여, 시민권, 이동의 자유, 생계의 자유가 모두 부재하고 두아이 이상 출산금지 법을 유일하게 적용받는 로힝야들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권을 박탈당한 수십년간 박탈당해왔다. 유엔은 로힝야를 지구상 가장 박해받는 마이너리티라 명한 바 있다. 
   

 2012년 학살 후 14만명에 달하는 로힝야 무슬림들과 일부 캄만 무슬림들은 삶의 터전을 잃거나 군에 의해 강제이주 당했다. 이들은 지금도 아라칸주 주도(主都)인 시뜨웨 시 외곽 광활한 게토에서 피난민으로 살고 있다. 시뜨웨 시내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무슬림 거주구역 아웅 밍갈라는 철조망에 둘러쳐진 또 하나의 도심 게토다. 21세기 버마의 아파르트헤이트다. 지난 해 동남아 해역을 달궜던 보트피플 사태는 바로 이런 환경이 야기한 탈출러쉬의 한 단면이었다.
 

 불교 극단주의 공권력 비호하에 ‘인종청소’ 자행 : 휴먼라이츠 워치
 그렇다면 2012년 5월의 불교도 여성 띠다 강간사건은 사실일까. 그해 8월 17일 테인 세인 대통령은 전 종교부 장관을 지낸 묘 뮌 (Dr.Myo Myint) 을 의장으로 내세우고 자신이 임명한 27명을 위원으로 하는 소위 ‘라까잉 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조사위원회는 다음해 7월 8일 186페이지에 달하는 진상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2012년 폭력 사태의 방아쇠로 띠다의 강간을 들었다. 그러나 이 강간을 둘러싼 사실관계는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정치범 출신 코미디언이자 이 위원회 한 사람으로 활동했던 자가나르(Zaganar)는 띠다를 부검한 의사의 소견을 빌어 “강간 흔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한번도 공식화된적이 없다. 다만, 로힝야 문제를 ‘제노사이드’ 과정으로 분석해온 버마학자 마웅 자니의 입을 빌어 외부로 알려졌다. 마웅 자니는 자가나르의 증언을 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이트와 페이스북을 통해 여러차례 이 점을 지적해왔다. 팩트상 오류라고. 아울러 마띠다를 강간후 살해했다는 3명의 무슬림 남성은 로힝야가 아니라 두명은 캄만 무슬림 (캄만 무슬림은 135개 공식 인종에 속하며 시민권을 갖고 있다)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라까잉 남성으로 로힝야 가정에 입양된 이라 말했다. 그중 라까잉 남성인 텟 텟 (Htet Htet)은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의문의 자살로 사라졌다.

 이 사건은 여전히 미제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영원히 미궁에 갇힐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미 학살은 시작됐다. 누구도 사실과 진실을 파려 노력하지 않는 가운데 띠다의 강간은 기정사실로 반복 기술되며 이슬람포비아, 안티 로힝야 캠페인의 단골 메뉴가 되고 있다. 
 

 ‘강간 레토릭’, 전투적 불교의 도구 
 이런 ‘강간 레토릭’은 최근의 또 다른 ‘강간’ 이슈와 대비를 이룬다.
 지난 10월 9일 아라칸 주 북부 로힝야들이 주류로 거주하는 마웅도(Maungdaw) 에서 무장괴한들이 국경경찰 초소 세곳을 공격하고 9명의 경찰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즉각 정부군의 군사작전이 이어졌고 거의 3주간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100여명 이상의 로힝야 민간인들이 사망하고 1만 5천명 (유엔통계)이 피난민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바로 ‘강간’문제가 이 군사작전의 최대 화두 중 하나로 떠올랐다. 정부군에 강간당했다고 주장하는 로힝야 여성들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 타임즈>탐사보도 기자 피오나 맥그리거는10월 27일 로힝야 인권 상황을 수년간 집중 조사해온 <아라칸 프로젝트> 국장 크리스 리와의 말을 인용하여 “10월 19일 한 마을에서만 30명의 여성들이 정부군에 의해 강간당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대통령실로부터 항의를 받은 <미얀마 타임즈>는 11월 초 피오나 기자를 해고했다.
 

 사실 버마 정부군에 의한 다양한 소수민족 여성 강간 문제는 수십년간 지속돼온 범죄 유형 중 하나였다. 그때마다 버마 시민사회는 다양한 분노와 비판을 표출해왔다. 이번 로힝야 여성 강간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게 흐르고 있다. 강간 소문만으로도 폭도로 돌변하던 불교도들은 공권력이 가해자로 지목된 이번 강간 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다른 소수민족 진영도 조용하긴 마찬가지다. 오로지 로힝야 디아스포라들과 외국언론 일부만 집요하게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2013년 아라칸 주 시뜨웨 시 외곽에 위치한 로힝야 피난민 게토에서 전날 경찰 총격에 부상을 당한 한 남성이 이웃들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이송중이다. 그러나 게토안에는 적절한 병원이 없다.  (사진: 이유경)

 

 이런 침묵은 이슬람 포비아가 충만한 버마 사회를 이해하는 이들에겐 크게 놀라운 건 아니다. 최근 폭력 상황에 대해 진상조사 중이라는 아라칸 주 의회의 한 불교도 의원이 7일 BBC와 인터뷰에서 보인 태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그는 예의 인종주의에 훔씬 젖은 발언을 카메라앞에서 스스럼없이 했다. 우선 그는  로힝야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가옥을 스스로 방화했다며 군을 변호했다. 그는 또, 정부군에 의한 로힝야 여성 강간문제에 대한 질문에 대해 히죽대는 웃음을 보이며 이렇게 답했다.   

  “그들(로힝야 여성들)은 더럽고 위생상태도 불결하여 군이든 불교도 남성이든 누구도 그들에게 끌리지 않는다” 

  이 라까잉 불교도 의원의 반응은 오늘날 버마 불교극단주의세력의 정신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사진 위>아라칸 주 시뜨웨 시내 아웅밍갈라. 한 남성이 식량 부족한 상황을 마임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웅 밍갈라는2012년 폭동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무슬림 구역이다. 그러나 철조망과 검문소로 둘러쌓여 있으며 거주민들에겐 이동의 자유가 없다. (사진 : 이유경)
 사진 아래>아라칸 주 시뜨웨 시내 아웅밍갈라. 2012년 폭동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무슬림 구역이다. 그러나 철조망과 검문소로 둘러쌓여 있다. (사진 : 이유경) 


 제국을 적으로 삼았던 전투적 불교 vs. 박해받는 소수자를 적으로 삼는 전투적 불교  

 영국 식민시절 전투적 불교의 적이 식민제국이었다면 21세기 전투적 불교는 지구상에서 가장 박해받는 소수자 그룹을 적으로 설정해 놓았다. 그들은 적들에게 자비를 보일 필요는 없다 여길 것이다. 필자는 몇 해전 이들의 냉혈한적 수사를 맞닥드리며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자비심을 제거한 그들의 불심엔 이제  외세저항이라는 시대적 정당성도 남아 있지 않다. 이슬람 포비아와 인종주의적 혐오를 뒤집어 쓰고 파시스트 괴물로 타락한 이들, 그게 바로 21세기 버마 전투적 불교의 민낯이다. 
   

*본 시리즈 버마(미얀마)편에서 다루지 못한 ‘독립직후 & 군사정권기 (1960~2010)’ 전투적 불교는 <휴먼라이츠 워치> 2009년 보고서 “승려들의 저항 The Resistance of the Monks” 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제 3화에서는 ‘전쟁을 반대한 승려, 살상을 도모한 승려’ (태국편) 편이 이어집니다.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이유경 기자는 태국 방콕에 베이스를 두고 아시아의 분쟁과 인권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2004년 이래 아프칸, 버마, 인도, 라오스, 태국 등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집중탐사취재를 했다. 그동안 <한겨레21>, 독일 등에 기사를 게재하였다. 2014년부터 KBS 라디오 방콕 통신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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