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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천도예정지(遷都豫定地)는 계룡산(鷄龍山), 한양(漢陽), 그리고 안산(鞍山)의 세 곳이었습니다.
계룡산은 정감록(鄭鑑錄)에도 나와 있는 길지(吉地)로서 제일 먼저 천도 후보지에 올라 도성 축성을 일정부분 진행하였습니다만 그 위치가 나라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남서쪽에 치우쳐 있고 도참사상(圖讖思想)에 의하면 계룡산 일대는 정씨(鄭氏)가 도읍을 세우는 곳이라는 주장 때문에 10개월 만에 공사가 중단되어 기단 일부의 석축물만 남아 전해지고 있으며 이곳의 지명이 ‘새로운 도읍지’라는 뜻으로 신도안(新都案)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지금은 이름을 계룡대라 고쳐 부르며 육, 해, 공군의 참모부가 들어섰습니다.
다음으로 하륜(河崙)이 주장한 안산 주산론(主山論)은 이곳의 지형이 앞이 확 터여 한강(漢江)으로 접근하기가 쉽고 한강은 바로 서해(西海)와 맞닿아 있어 해양진출이 용이함으로 도성으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풍수 지리적으로는 주산(主山) 앞에 안산(案山)이 있어 내룡(來龍)한 기운이 어느 정도 맺혀야 그 기운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이곳 지형이 막힘이 없기에 맺힘도 없어 풍수 지리적으로는 길지(吉地)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성리학(性理學)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운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분명히 나누었는데 해상무역(海上貿易)은 바로 가장 낮은 층인 상(商)에 해당함으로 그 직업을 천하게 여겼던 당시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 집니다.
역사적으로 백제, 신라, 고려는 동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서 백제는 중국의 동쪽 바닷가 도시에 백제원(百濟院)을 개척하였고 신라도 그 전통을 이어 신라방(新羅房)을 두었고 고려의 도읍 개성에서는 복식부기(複式簿記)를 사용할 정도로 무역의 거래가 활발하였으나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을 치국이념(治國理念)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전통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안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터는 연희동 입체교차로 어름일 것이고 좌청룡(左靑龍)은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老姑山), 우백호(右白虎)는 서대문 구청 건너편 백련산(白蓮山)이 됩니다.
그러나 풍수 지리적으로 터가 옹색하고 한강까지 훤히 터여 있어 산의 정기를 담아내지 못한다고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여 아쉽게도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마침내 한양이 천도지로 결정되었습니다.
‘산남수북왈양(山南水北曰陽), 일지소조왈양(日之所照曰陽)’은 중국식 지명을 정하는 원칙 중의 하나로서 산의 남쪽, 물의 북쪽이면서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양(陽)이라고 한다고 하니 한양(漢陽)이란 ‘북 한산 마을’의 양지 바른 곳으로 한강의 북쪽, 북한산의 남쪽을 지칭하므로 한양은 북한산에 기대고 한강을 품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읍의 위치가 정해지고 나면 제일 먼저 도읍의 울타리를 둘러쳐야 했을 것입니다.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북으로 북한산(北漢山)이 남으로는 관악산(冠岳山)이 동쪽 끝머리에는 워커힐 호텔이 기대고 있는 아차산(峨嵯山)이 서쪽 끝머리에는 행주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덕양산(德陽山)이 큰 울타리를 쳐주고 있으니 이를 일러 외사산(外四山) 즉 한양의 바깥 경계라고 합니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봉우리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보현봉에서 솟구쳐 형제봉을 지나 보토현(補土峴)에서 내려앉았다가 다시 솟아오른 곳이 백악(白岳)으로 한양의 주산(主山)으로 조선의 법궁(法宮)으로 그 권의와 위용을 떨쳤던 경복궁(景福宮)이 기대고 있는 산이기도 합니다.
백악에서 동쪽으로는 낮은 산줄기가 이어지다가 조그만 봉우리가 아주 낮게 봉긋 솟았으니 이름 하여 ‘매 봉우리’인 응봉(鷹峰)으로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 성균관(成均館) 그리고 종묘를 품고 있는 봉우리입니다.
응봉을 지나 동쪽 끝머리에 타락산(酡駱山)이 있으니 지금의 낙산(駱山)을 이름이요, 백악에서 서쪽으로는 불끈 솟아올라 인왕산(仁王山)을 일구었고 무악재(毋岳)에서 내려앉았다가 안산(鞍山)으로 다시 솟구쳐 서쪽 끝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남으로는 남산(南山)이라 불리는 목멱산(木覓山)이 부드럽게 엎드려 있습니다.
이렇듯 주산인 백악,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 안산(案山)인 남쪽의 목멱산이 한양의 좁은 울타리로서 내사산(內四山)이라 하는데 이 네 봉우리를 둘러친 울타리가 한양도성입니다.
울타리를 둘러쳤으니 다음으로 사람들의 왕래를 위해 문을 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네 대문(大門)을 내고 그 사이사이에 소문(小門)을 내 모두 여덟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사대문은 그냥 멋없이 동서남북의 방향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오상(五常),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가운데 인의예지 한 글자씩을 붙여서 명명하였으니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그렇다면 북대문은 지(智)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숙정문(肅靖門)이라 하였습니다.
숙정문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태종 때 풍수학생 최양선이 창의문(彰義門)과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며 상소를 올려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창의문과 숙청문을 폐쇄하고 그 주위에 소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이후로 숙정문은 계속 닫혀 있었으며 다만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시기에만 문을 열었는데 그 이유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따르면 북쪽은 음(陰)과 수(水)에 해당하며 남쪽은 양(陽)과 화(火)에 해당되기에 가뭄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는 북문인 숙정문은 열고 남문인 숭례문은 닫고 장마가 져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낼 때는 남문인 숭례문을 열고 북문인 숙정문을 닫았던 것입니다.
노무현 정권 때 백악 일대를 전면 개방하며 비로소 숙정문이 열렸습니다.
이와는 달리 창의문은 인조 때부터 문이 열렸는데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반정 군인들이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와 반정을 성공시키고 인조를 등극시켰으므로 창의문은 그들의 개선문(凱旋門)이기에 그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숙정문은 최양선의 상소가 없었더라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습니다.
도성의 북문으로서 성 밖을 나서면 그 길이 한양에서 원산으로 가는 경원가로(京元街路)로 이어져야 하는데 삼각산과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사람이 쉽게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숙정문 보다 훨씬 동쪽에는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곳에 혜화문(惠化門)이 있어 이문을 이용하면 쉽게 경원가로를 오갈 수 있기에 숙정문은 만들 당시부터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한 문인 것입니다.
사소문(四小門)의 이름은 동소문이 혜화문(惠化門)으로 지금의 혜화동에 복원이 되어 있는데 동소문의 처음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나 성종24년(1493년) 창경궁(昌慶宮)을 조성하면서 그 정문이 홍화문이라고 하여 혼동을 피하려고 혜화문으로 개명하였고 서소문이 소의문(昭義門)으로 덕수궁 앞 서소문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서소문도 처음에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했는데 성종3년(1472)에 예종의 비(妃)를 장순왕후(章順王后)로 추존할 때 시호에 ‘소덕(昭德)’이 들어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개명하였고 남소문은 광희문(光熙門)으로 지금도 동대문과 장충동사이에 우뚝 서 있고 북소문은 창의문(彰義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리며 세검정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서 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 것은 인의예지신 중에 신(信)이 빠졌는데 신은 어디에 이름 붙였을까요? 그것은 도성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종루에 명명되어 있는데 이름 하여 보신각(普信閣).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신각은 태종 때 이층으로 지어진 누각(樓閣)으로 최초의 이름은 그냥 종루(鍾樓)라고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복원하면서 단층으로 지어져 종각(鍾閣)으로 불렸는데 다시 70년대 지하철 공사로 증축하며 이층 누각으로 지었으니 종루(鍾樓)가 맞는 명칭일 것입니다.
누(樓)란 지면에서 한길 정도 떨어진 마루집이거나 이층집의 이층을, 이에 비해 각(閣)은 단층의 단출한 집을 가리키므로 지금의 종각은 잘못 쓴 것이고 종루로 바꿔 불러야 합니다.
종루에서는 하루에 두 번 종을 쳤는데 “밤이 되었으니 하루를 마감하라. 그리고 성문을 닫는다.”는 뜻으로 동양에서 이해하는 하늘의 기본 별자리 수를 따라 스물여덟 번을 치는 인정(人定)과 “새벽이 밝으니 하루 생활을 시작하라. 성문을 연다.” 는 뜻으로 불교의 33천(天)에서 따와 서른세 번을 치는 파루(罷漏)가 그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궁궐(宮闕)과 종묘(宗廟)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을 건설해야 합니다.
임금의 자리가 세습되는 고대사회는 임금을 낳게 한 조상들을 기리는 사당(祠堂)인 종묘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도록 농사가 풍년이 들어야함으로 튼실한 씨앗과 비옥한 농토를 바라며 토지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직단(社稷壇) 그리고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을 우선적으로 지었습니다.
중국의 관습에 따라 임금은 등을 북쪽으로, 얼굴은 남쪽을 향하여(背北南面) 통치행위를 하므로 임금이 사는 궁궐은 남향으로 좌향(坐向)을 잡았고 궁궐을 중심으로 종묘는 왼쪽 사직단은 오른쪽인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따라, 왼쪽인 동쪽에 종묘(宗廟)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건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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