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미 씨와 법성게

편집진 편지 - 백승권 (글쓰기연구소 대표) 제2호
# 너는 온통 세상과 싸우고 있는데

“사랑합니다. 잘 왔어요.”
지난 6월 1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아줌마 몇 몇이 청년들에게 ‘엄지척’을 하며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됐다. 끌어안는 아줌마의 눈엔 굵은 눈물이 쏟아졌고, 품에 안기는 청년의 어깨는 흐느낌으로 들썩거렸다. 그걸 보는 내 눈에서도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한편으론 가슴이 아렸지만, 한편으론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었다. 

퀴어문화축제에 나타난 ‘성소수자 부모모임’ 어머니들의 프리허그 동영상 장면은 이렇게 한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세상을 다 품을 듯 사랑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성소수자 청년들을 품어 안는 한 어머니의 얼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뒤 한겨레신문에서 그 어머니의 인터뷰를 읽게 됐다.  

레즈비언 딸을 둔 뽀미 이은재 씨는 딸이 17살 때 남자보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성인이 되면 달라지겠지, 하고 기대했지만 딸은 바뀌지 않았다. 그 후론 ‘네가 동성애자고 안 바뀐다고 하면 엄마는 터치하지 않을게. 하지만 동참하진 않을 거야’, 무관심과 방관의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6년이 흐른 어느 날 뽀미 씨에겐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린다. 

“제가 다니던 직장에서 1년 전에 부당한 해고를 당했어요. 나는 정당하고 옳은 일을 했다고 믿는데 아무도 내 얘기를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배척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지하철을 탔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다른 세계에 있고, 나만 동떨어져서 혼자만의 세계에 버려져 있다’는 느낌이 왈칵 몰려왔어요. ‘아, 이 괴리감이 우리 딸이 끊임없이 내게 말하던 그것이구나’ 싶었지요. 내 딸이 늘 이런 느낌으로 살아왔구나…. 딸한테 ‘누가 너의 섹스라이프를 궁금해하겠어? 연애하는 것만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될 거 아냐?’ 했었는데, 그게 얼마나 가슴 아픈 폭언이었는지 새삼 느꼈어요. 누구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근원적인 에너지가 되고, 그게 사회적으로 자신의 가치와 자존감을 세우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난 그걸 분리시키라고 한 거예요. 딸한테 진심으로 사과했어요. ‘너는 온통 세상과 싸우고 있는데, 엄마는 그걸 오늘에야 이해했구나. 미안하다’ 하니까, 눈만 껌벅껌벅하며 듣던 딸이 눈물을 쏟더라고요. 둘이 손잡고 펑펑 울었어요.”(한겨레 ‘이진순의 열림’에서 인용) 

뽀미 씨는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다른 세계에 있고, 나만 동떨어져서 혼자만의 세계에 버려져 있다’는 부당해고의 경험을 통해 딸이 ‘온통 세상과 싸우고’ 있으며 ‘이 괴리감이 우리 딸이 끊임없이 내게 말하던 그것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뽀미 씨 자신과 딸의 문제, 나아가 세상의 문제가 따로 떨어진 별개가 아니었다. 뽀미 씨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따가운 눈총과 편견에 굴하지 않고 ‘성소수자 부모모임’ 활동을 적극 벌이고 있는 것이다. 

# 증지소지비여경

불한당(불교를 한글로 풀어내는 모임)에서 의상스님 ‘법성게’를 공부하다 앞 대목에서부터 논쟁이 벌어졌다.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
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證智所知非餘境 증지소지비여경

법의 성질은 무르녹아 두 가지 모습이 없고,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고 본래 고요하다.
이름도 모양도 없이 일체가 끊겨
증득한 지혜로만 알 수 있을 뿐 그 밖의 경지는 없다.

논쟁의 이슈는 바로 넷째 행 ‘증지(證智)’의 증이었다. 이 ‘증’을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 이 ‘증’은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깨달음에 대한 논쟁을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다. 증득(證得), 증오(證悟)라는 단어로 쓰이는 ‘증’의 뜻에 대해 성철스님을 비롯한 한국 불교의 주류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일단 해오(解悟)와 증오의 뜻을 명백하게 구분한다. 성철스님은 “증도가”를 편역하면서 증오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한다.

‘실상을 증득하면 인(人)과 법(法), 즉 주관과 객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증(證)자를 쓰는 것은, 선종에서 주장하는 깨침(悟)이라는 것은 증오이지 해오가 아니기 때문에 실상을 증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인과 법이 떨어진 곳을 알고 실상을 알려면 증오해야만 알지 해오로써는 도저히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증오의 경지는 어떻게 다다를 수 있을까? 성철스님은 “증도가” 편역에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마음[心]이란 제팔 아뢰야를 말한 것인데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어버리면 제칠 말라식과 제육 의식은 자연히 끊어져 버리는 것이므로 마치 나무뿌리를 뽑아 버리면 가지나 잎은 저절로 말라 죽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 제팔 아뢰야식의 근본무명을 끊어버리면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돈오(頓悟)며 증오(證悟)인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인간의 감각(색성향미촉)과 의식(법, 말라식, 아뢰야식)을 넘어서 깨어 있든 잠을 자든, 심지어 꿈을 꿀 때조차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해야 비로소 ‘증오’라고 역설했다. 성철스님이 늘 강조한 오매일여(寤寐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는 그런 의미를 담은 가장 극적인 레토릭이다.  

이렇게 성철스님을 비롯한 한국불교의 주류는 문사수(聞思修) - 즉 학습, 사색, 실천이라는 인식과 체험의 과정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인 해오가 아닌 감각과 의식과 체험을 넘어선 경지인 증오를 최상승으로 여긴다. 해오를 점수(漸修)로, 증오를 돈오(頓悟)로 연결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증오와 돈오는 논쟁과 논란의 대상일 뿐 실체도, 자취도 찾아보기 어렵다. 원래 불교가 이렇게 관념적인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 엄마는 그걸 오늘에야 이해했구나. 미안하다
 
‘너는 온통 세상과 싸우고 있는데, 엄마는 그걸 오늘에야 이해했구나. 미안하다’ 하니까, 눈만 껌벅껌벅하며 듣던 딸이 눈물을 쏟더라고요. 둘이 손잡고 펑펑 울었어요.
 
난 법성게의 ‘증지소지비여경’을 풀이할 때 뽀미 씨의 이 말이 생각났다. ‘증’은 뽀미 씨처럼 그걸 실제 삶과 실천으로 겪어냄으로써 성철스님이 말한 ‘인(人)과 법(法), 즉 주관과 객관’이 사라진 상태, 너와 나, 나와 세계가 별개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아닐까.

백승권 (글쓰기연구소 대표)
글쓰기연구소 대표
동양미래대학 글쓰기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