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특검'을 바란다

편집진 편지 - 윤남진 (편집위원) 제5호

 1.
 ‘아힘사의 관점에서 볼 때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차별은 없다. 강도 집단에 들어가 일하기로 자원한 사람은 짐꾼 노릇을 했거나 망을 봐주었거나, 그렇지 않고 그놈들이 부상을 당했을 때 간호를 해주었거나, 강도인 점에서는 강도들 자신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마찬가지고 전쟁에서 부상병만을 시중해준 사람도 전쟁 범죄자임을 면할 수는 없다’
 
 ‘문제는 미묘하다. 견해의 차이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이론을 아힘사를 믿고 있으며 생활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그것을 실천하려고 진지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 앞에 가능한 한 명백하게 펴놓았다. 진리에 헌신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나 관습에 따라서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수정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자신이 잘못임을 알았을 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속죄해야 할 것이다’

 ‘케다 주에 흉년이 들어서 소작료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것을 지도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지방을 조사해 보지 않고는 조언을 할 마음도, 능력도, 용기도 나지 않았다’ 


 (암리차르 학살에 대한 조사위원회인-필자)‘...헌터위원회를 배척하기로 하고 민간 조사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그리고 내가(간디) 이 위원회 업무의 조직책임을 맡게 되었는데....이 위원회의 보고서 초안을 잡는 일도 내게 맡겨졌다...) 이 보고서에 대해서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만 이 것 뿐이다...보고서에는 그 진술의 확실성에 대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의심되는 점은 단 하나도 허락되지 않았다. 오로지 진실을, 진실만을 밝히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 보고서는...내가 아는 한 거기에 기록한 것 중 사실이 아니라고 반증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간디자서전-나의 진리실험이야기>(함석헌 옮김, 한길사)에 실린 글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회고한 자서전임을 믿는 한에서, 간디의 진실성을 믿는 한에서, 역자인 함석헌 선생이 의도적 오역을 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다면, 이 글은 있는 그대로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2. 
 백만여 시민이 촛불을 들었다. 시국이 엄중하다. 민족과 나라의 장래가 갈림길에 선 것처럼 보인다.
 각종의 해법이 난무한다. 고상한 언변으로 표현된 주장들, 날것처럼 펄펄 뛰는 열렬한 주장들, 거의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접은 듯한 음울한 주장들이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섞여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형국을 푸는 불교적 해법을 ‘화쟁’이라고 했던 것 같다. 여러 화쟁론자들이 있었지만 지금 형국에서 ‘화쟁적 해법’은 무엇인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대개의 민초들이 생각하듯이 머리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 세상의 땅위에서 살짝 살짝 뜬구름처럼 고상하게 용쓰는 사람들의 말이란 것은 따뜻한 시국에서나 통하는 고상한 훈계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이 매우 존경하는 모범적 인물 중에 교종(敎宗)와 같은 존재가 간디다. 물론 불가촉천민 출신인 암베드카르와 간디의 상반된 불가촉천민 해방의 해법은 논외로 하고 말이다. 글머리에서 길게 <간디자서전>의 몇 문장을 인용한 것은 그처럼 화쟁론자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그 간디의 구체적 실천행동을 바로 알았으면 해서다. 간디의 아힘사 운동이 간단히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식(<화쟁>, 조계종화쟁위원회, 2015)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제의 <화쟁>이라는 책에서, 이 알쏭달쏭한 대목의 한 문단을 보자. 
 ‘화쟁은 진실에 주목하기 때문에 다툼을 맹목적으로 화해시키거나 이해득실을 조정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함께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는 다툼 너머의 보편적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다툼의 근원적 뿌리를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우리 옛말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는 도대체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옛 말의 맥락이, 어떻게 그 고상한 ‘함께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는 ‘보편적 진실’을 드러내는 행위로 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아둔한 탓이리라 머리를 쥐어뜯고 볼 일이겠다. 현 시국에 대입해 해석하자면, ‘촛불(싸움)은 말리고, 정치적 타협(원탁회의? 대중공사?)은 붙이라’는 것일까? 
 
 3.
 간디의 직업은 변호사였다. 청년 간디는 출발이 사상가이거나 운동가라기보다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어떤 세속적 직업인이었다. 그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그의 주장의 바탕에는 사실과 진실에 대한 엄격한 추구와 확인이라는 직업적, 도덕적 기준이 엄격함을 알 수 있다. 앞서 길게 인용한 <간디자서전>의 문장들에서 그런 덕성이 묻어난다. 물론 내 생각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불교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추구한다. 사실 혹은 진실을 추구한다. ‘다툼 너머의 보편적 진실’은 그 무슨 ‘원리로서의 연기론’(함께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으로 간단히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이야 말로 ‘연기실체론’이다. ‘공(空)에 취착하는 공론’, 전도몽상이다. 모든 것은 연기되어 있으니 공동체를 위해 보살의 삶을 살자는 입장(중생무변서원도)이 아니라,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세상이니 어울렁 더울렁 다툼은 피하고 대강 흥정 좀 잘해가며 살자’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과 진실을 있은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치열해야 한다. 매서운 수리의 눈을 가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간디의 말처럼 그 무엇 하나의 사태를 파악하는 보고서를 쓰더라도, ‘보고서에는 그 진술의 확실성에 대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의심되는 점은 단 하나도 허락되지 않으며’, ‘오로지 진실을, 진실만을 밝히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 보고서는, 내가 아는 한 거기에 기록한 것 중 사실이 아니라고 반증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보고서가 되어야 하고,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논리도 그런 치열한 사실과 진실의 추구에 기초하여 나와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은거하는 도인은 적어도 세상을 망치지는 않는다. 대체로 사기꾼이나 무임승차자가 공동체를 파괴한다. 물론 인류 진화의 역사를 해석하는 지금까지의 학문적 진술에 한해서 그렇다. 간디가 자신하였듯이 사실과 진실에서 스스로 자신할 수 있는, 틀림없는 보고서를 국민 앞에 내놓을 수 있는 특검이 조속히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것이 화쟁의 출발이 아닐까?





윤남진 (편집위원)
1993년 첫 사회생활을 불교시민사회단체에서 시작한 이래 이쪽 바닥을 벗어나본 적 없이 20여년을 보냈습니다.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하여 공부하며 책 쓰며 은거하고자 준비하던 중, 이제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으로 신대승의 창립에 함께 했습니다.
현직 : NGO리서치 소장, 불교사회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조계종 신도교재편찬위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