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제정연대 토론회] 발제 2. 차별금지법 2021년 제정, 운동은 무엇을 목표로 싸울 것인가?

사회정의평화활동 - 신대승네트워크 | 2021. 제34

 

 

차별금지법 2021년 제정, 운동은 무엇을 목표로 싸울 것인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2010년대 초반부터 몸집을 키워온 "혐오의 정치"에 대항하는 것은 최근 몇 년 간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주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혐오선동세력의 폭력과 차별, 혐오의 확산을 방치하고 조장하는 정치와 제도, 혐오와 차별에 대한 사회적 관점과 역량의 부족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제정 운동은 단순히 혐오를 지적하고 규탄하는 것을 넘어서, 차별을 승인하는 구조와 혐오선동-기득권 세력에 대항할 수 있도록 개인/집단의 권리를 키우는 방향으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해왔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혐오선동에 대한 "처벌"과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할지언정, 그 대안으로 "평등"을 선언하지는 못하는 시기가 계속되며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나왔다.

 

2020년 숱하게 회자되었던 코로나19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나도 차별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차별과 불평등을 사회적 경험으로서 감각하는 조건이 됐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로 가시화된 여성 대중, 그리고 2017년 촛불시민이라는 주체, 광장이라는 공간을 열어젖히고자 했던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이 소수자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다시 쓰고자 했다면, 코로나19로 드러난 불평등을 체감한 사람들은 어떤 정치적 장으로 모이고 있을까.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하지만 차별과는 무관한 것처럼 여겨져 왔던 조건 속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반차별과 평등을 대안으로 제시해왔지만, 힘의 관계를 변화시킬 전망과 세력을 모으는 과제를 여전히 남겨두고 있다.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와 뉴 노멀이라는 단어가 한국사회를 점령하던 아주 짧은 시기를 지나, 어떤 사회로 나아갈 것인지를 둘러싸고 다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회복"을 갈구하며 노동세계를 계속 후퇴시키는 정치와 자본의 움직임,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평등을 기대할 수 없다면) "공정"하기라도 할 것을 요구하는 흐름이 가시적으로 등장했다. 혐오와 마찬가지로 공정과 능력주의, 저학력-비정규직 혐오와 안티페미니즘을 필두로 한 역차별 담론은 이미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이다. "노동/복지"로 일부의 자원을 취약계층의 손에 쥐어 주면서 성평등이 애저녁에 도래했을 뿐 아니라 과도하다는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장에 시민으로 등장하기 위해 요구했던 권리와 역량을 경쟁과 능력으로 구분하고 제한하려는 움직임과 떨어질 수 없다. 평등을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위치시키고자 했던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돌파해 나가야 할 조건이다.

 

왜 우리는 차별금지법을 "생존의 요구"라 선언했나


지금까지 차별금지의 중요성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인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때문에 부당하게 대우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 차원에서 논의되어 온 측면이 강하다. 실제로 많은 차별 당사자들이 용기내어 차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단순히 물질적/재정적인 보상이라기보다 바로 그 부당한 대우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반인"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사회자원의 평등한 분배보다 인격적 존중이나 배려 혹은 보호, "인정"을 더욱 중요하게 인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차별금지법이 구체적인 차별을 구제하거나 가해자를 처벌하는데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이는 차별의 당사자가 어떤 사회적 조건과 압력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가지는 유무형적인 이익을 과소평가하는 인식의 반증이기도 하다.

 

"동성애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 선거와 인사청문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질문은 차별금지법이 가로막혀 있던 현실의 표지였다.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을 문제삼는 사회에서 "후퇴 없는 차별금지사유"가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주요한 합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공동체에서 관계맺을 수 있는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지위와 위상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등하기 전에는 결코 엇비슷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는 "사각지대 없는 차별금지법"을 만들기 위한 과정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할 것으로서 특정한 집단의 정체성/문화를 상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차별의 경험이 단순히 심리·문화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회구성원과 사회정치적 장에서 완전한 상호작용을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적이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함께 문제제기 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한 운동의 토대 위에서 (특히 올해 10만행동의 성과 위에서) 이제 적어도 보수개신교의 "동성애 반대"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룰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분명히 해 가고 있다. 이 세력을 핑계 삼아 공공연하게 차별을 선언했던 정치인들의 입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에 "공감한다",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올해 초 우리가 함께 겪어야 했던 김기홍 활동가, 이은용 작가, 변희수 하사의 죽음이 차별금지법의 부재를 더욱 인식시켰고, 차별금지법이 "있어야겠다"는 필요성과 공감대를 증폭시킨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특정한 사회적 소수자의 고통과 비극, 죽음들을 통해서 이런 사회적 감각들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에 대한 긴장 역시 존재한다.

 

단순히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정의로운 명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별금지법이 어떤 일을 가능하게 하는지 그 고유하고 구체적인 의미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 닿고 있을까. 홍석천의 커밍아웃 이후는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이에 대한 사회의 불인정과 폭력을 드러내지만, 노동권의 침해와 생계의 문제로 상상되지 못했다.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의 삶을 드러냈지만, “국가에 의해 버림받은 "직업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의심하는 국가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만 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도 어렵다. GS 편의점 사태 이후 페미니스트 아르바이트생 채용 거부 문구는 "안티페미니즘"의 증거로 소환되었지만, 취업과 생활비를 걱정하는 "청년"의 의제에서도 거부당했다. 진주교대가 장애인은 날려야 한다며 장애학생의 성적을 조작하고 불합격 시킨 사건은 장애인 차별로는 이해되어도, 공정한 경쟁의 실패 혹은 능력주의가 약속한 평등의 실패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차별 혹은 차별받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정보다 노동세계의 관점에서 물리적 분배와 배제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체성에 대한 인정 문제는 "물질적 분배""정치적 대표성"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정체성"의 이름으로만 남기를 요구하는 사회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차별의 현실이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에서 어떻게 경험되고 드러나고 있는지, 개개인들이 자신의 삶과 일상이 차별금지법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떠올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동시에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수동적으로 응답하게 되는 조건이기도 하다.

 

서울 신촌 지하철에 걸렸던 광고의 "성소수자가 여기 있다"는 선언은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인정하라는 요구에 멈추지 않는다. 성소수자의 일상이 "성적 지향"으로만, 파트너십이나 성적 행동으로만 제한되는 관점을 거부하고 우리 모두의 삶과 연결된 누군가의 일상을 떠올리라는 요청이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유명한 문구이자 선언인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역시 마찬가지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생존의 요구, 삶의 문제라는 선언은 우리의 삶이 무엇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지, 시민들의 삶의 취약성을 만들어내는 구조와 권력관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수자라는 지위를 여전히 특수하고 특별하게 만드는 정치경제 제도와 사회문화, 선별과 분류의 자격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기득권에 맞서서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우리"가 함께 싸우겠다는 선언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바로 이런 이들의 연대를 키워온 과정이었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공정담론과 안티페미니즘 : 누구와 함께 싸울 것인가

-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민들의 생존, 삶의 문제라는 점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선언하듯이 차별 금지하는 항목들을 늘리기보다는 

애매한 것들은 제외하고 정말 인권의 보호에 결정적인 것부터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면 

不要不急(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차별을 골라내어 혼란을 줄이는 것도 현명한 길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서 예측했지만 당도하지 않은 미래로 "재계의 반대"가 있었다. 차별금지법의 가장 큰 규율 영역이 고용이고 가장 많은 쟁점을 담고 있지만, 그 동안에는 혐오의 정치에 밀려 시장의 목소리는 비가시화되어 있었다. 현재 차별금지법이 "기업 옥죄기"라는 주장들이 가시화된 상황은 그만큼 차별금지사유에 대한 보수개신교 반대 진영과의 싸움을 넘어서 제정 운동이 새로운 논쟁의 장으로 이동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논쟁의 시작에서 성별, 학력/학벌/출신학교, 사회적 신분으로 자리매김한 고용형태 등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 합리적인 "차이"에 근거한 정당한 "차등" 조치라는 주장들을 정면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한 차별금지사유의 삭제 혹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를 외치던 혐오선동세력과 같은 방식으로 싸워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차별이다, 차별에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역차별 담론은 평등이 민주주의의 확대나 경제성장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결과물"로 여겨지는 상황 속에서 힘을 얻어왔다. 그 과정에서 "혜택""자격"을 선발하고 분류하는 권력이 정당화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시민으로서의 참여 확대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의 문제로 전환되면서,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고 실질적인 불평등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로서 등장한 적극적 조치(이른바 할당제)는 국가 지원에 대한 구성원들의 의존으로 문제화되었다. ("그러므로 여성도 성별을 이유로 혜택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동등하게 능력으로 경쟁해라") 또한 생존과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 개인의 능력과 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기획의 확장 속에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의 문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등한 지위를 얻고 싶다면 다시 시험을 쳐서 SKY에 입학해라, 정규직으로 입사해라") 이 과정에서 "공정"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는 공정하고 올바른 방향이라는 지향이 탈각된 채, 능력주의에 잠식되고 있다.

 

이준석의 "돌풍"으로 가시화된 안티페미니즘이 사회문제로 등장했지만, 평등 담론과 정치를 무력화시키고 안티페미니즘을 정상화, 이용하는 정치에 대한 비판은 그 대안이 되기 어렵다. 실제로 성평등 지향 인식에서는 20대 남성/여성의 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반페미니즘 정서가 강한 역설적인 20대 남성의 조건을 "이대남" 비판으로 흡수되는 것은 바로 그 "혜택""자격"을 가르는 차별 주체들을의 권한을 제어하지 못한다. 코로나19로 가장 많은 해고와 실직, 계약해지를 경험한 20대 청년의 자살율이나 디지털 성범죄, 고용 성차별과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이 젠더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흐름에, 남녀 청년 모두가 직면한 문제에 어떤 정책적/제도적 대안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는 사회적 세력은 형성되고 있는 것일까.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권리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과 체계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노동시장 차별의 현상, 조건, 구조와 원인 등을 현재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보편적인 문제로서 드러내려는 시도가 중요하다. 애초의 노동시장이 젠더와 섹슈얼리티로부터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성별화 과정(gendering process) 그 자체라는 사실을 폭로했던 수 많은 #미투 운동 속의 여성 대중, 한 번의 시험, 그 시험을 잘 본다는 차원의 능력이 직업능력, 대인관계, 리더십 등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흐름을 거부해 온 청소년/청년 집단, 복지를 통해 서비스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장애인 노동권을 일하는 사람의 권리로 만들어 가려는 진보적 장애인권운동, 차별과 불평등이 개인의 능력과 공정한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학력이나 학벌, 출신학교나 입직 과정에서부터 촘촘하게 짜여진 위계화된 노동시장의 결과로 이야기해온 비정규직과 불안정 노동자들아직 충분히 권리를 주장해보지도 못한 이들이 겪는 일상이 보편적인 차별의 모습이다. 그리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등장할 수 있도록 변화의 방향과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존재에 대한 거부와 혐오, 정체성에 기반한 차별의 문제를 해소하고 기본권을 보장할 책임만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비롯한 모든 노동자, 청년세대, 여성대중 등이 직면하고 있는 차별적인 현실을 드러내고 이를 해소할 방법으로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럴 때 성소수자, 이주민 등이 사회적 소수자의 대표주자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권리를 요구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등장할 수 있다 

신대승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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